역대하 28:16-27 읽기

16-21 유다왕 아하스가 앗시리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한 사건을 사관은 기록한다. 에돔 사람이 유다를 치고 백성을 사로잡아갔고, 블레셋 사람도 유다의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정착했다. 이것은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이 주님께 크게 범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하스는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 왕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인데, 앗시리아 왕은 아하스를 돕기는 커녕 유다를 곤경에 빠뜨렸다.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과 대신들의 집에서 보물을 꺼내 앗시리아 왕에게 바쳤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22-26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어도 아하스 왕은 주님께 더욱 범죄하여 앗시리아 신들에게 제사 지냈다. 자신이 앗시리아 신들에게 제사하면 그 신들이 자신을 돕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일히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다. 심지어 성전 기구들을 거두어서 부수고 성전을 폐쇄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이곳저곳에 이방 제단을 세우고 유다 각 성읍에도 산당을 세우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여 주 하나님을 진노케 했다.

26-27 아하스가 행한 일은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하스가 죽었으나 그를 왕실 묘지에 장사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 안에 묻었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아하스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 주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며 살았던 요담에 관한 기록은 27장 단 9절로 마무리 되었는데, 주의 길을 따르다 배신한 왕, 다윗의 길 대신 북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른 아하스의 기록은 길다. 파란만장한 일생이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했다면 은혜겠지만 아하스처럼 성전을 폐쇄하기까지 갔다면 저주다. 갑자기 이력서에 한줄이라도 더 적을 것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주의 길을 따르기보다 나의 길을 갔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든다.
>> 바울은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했는데, 공동번역은 성경은 ‘주님 안에서 자랑’을 ‘주님을 자랑’이라고 해석한다. 곧 주님 안에서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랑은 주님만이 되어야 한다. 이력서에 단 한 줄 쓸 것이 없어도, 주님은 우리가 행한 것을 모두 아신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특별히 자랑할 것이 없다. 그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라고 결산한다. 오히려 악하고 게으른 종이 결산할 때 말이 많다. 하나님이 어떻고, 달란트를 어떻게 했고…
>>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랑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스스로 성전을 폐쇄한 자요, 다른 사람들도 성전에 나가는 것을 막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역대하 27:1-28:15 읽기

[27] 요담에 대한 기록은 27장 단 아홉절로 끝난다. 사관은 요담이 아버지 웃시야가 한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아버지와 달리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고 한줄평가를 한다. 6절에서는 요담은, 주 자신의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며 살았으므로 점점 강해졌다고 사관은 적는다. 사관의 관심은 나라가 강성해지면 주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은 결과요, 그렇지 않으면 범죄한 결과라는 권선징악적 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요담 때도 남유다 백성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는 사관의 기록을 놓쳐서는 안된다. 다윗의 나라를 다스리는 요담이라면, 강성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국방력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성전에 들어가 분향을 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을 독려해 백성이 악에서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도록 가르쳐야 했다. 왕이라면 자신만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걸으며 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28:1-7] 요담에 이어 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요담은 이십오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다스렸는데, 아하스는 이십세에 왕이 되어 16을 다스렸다. 한 본문으로 읽으니 남유다의 운명이 점점 단축되는 느낌이 든다. 하여간 아하스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지 않았다. 아하스는 그의 조상 다윗이 한 대로 하지 않았다고 사관은 한줄평가를 한다. 드디어 기준이 ‘다윗이 한 대로’로 바뀌었다. 더 이상 선왕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사관이 깨달은 것일까? 하나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했느냐 안했느냐 보다, 하나님 마음에 합했느냐 아니냐로 기준이 바뀐 것이다. 사관은 아하스가 이스라엘 왕들이 걸어간 길을 걸어갔고, 바알 신상을 만들고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이방 민족들의 역겨운 풍속을 본받았다고 기록한다. 요담이 웃시야 처럼 분향하지 않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하스는 아예 산당을 따로 지어 이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분향했다. 그결과는 하나님을 버린 선대의 왕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하스는 시리아에게 침공을 당했고 북이스라엘로부터도 침공을 당해 패했다. 사관은 분명하게 덧붙인다. 아하스 왕 혼자만이 아니라, 유다사람들이 조상의 주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28:8-15]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은) 유다사람들을 무려 이십만명이나 사로 잡아 전리품과 함께 사마리아로 끌고 갔다. 사마리아에 오뎃이라는 주님의 예언자가 있었다. 오뎃은 사마리아로 개선하는 군대를 마중나가 하나님께서 유다에 진노하셔서 북이스라엘이 승전하게 하셨지만 살기가 등등하여 십이만이나 살육하고 이십만이나 노예로 삼을 작정을 하는 것도 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을 알라고 말했다. 그러니 형제자매된 유다 포로들을 풀어주어 돌아가게 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진노하셔서 당장 벌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에브라임 지도자들도 오벳의 말에 순종하여 개선하는 군대를 막아섰다. 에브라임 지도자들도 동족을 살육하고 포로로 잡아 노예삼으려고 한 일로 주님 앞에 죄인이 된 것과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개선하는 군인들에게 말했다. 군인들을 에브라임 지도자들에게 포로와 전리품을 넘겼다. 에브라임 지도자들은 전리품을 풀어 포로들중 헐벗은 이를 입히고 맨발로 걸어 온 이들을 신기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상처입은 이들을 치료해 주고, 환자들은 나귀를 태워 여리고까지 데리고 가서, 친척들에게 넘겨주고 다시 사마리아로 되돌아 왔다.

>> 사관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심판하신다.

역대하 26:1-23 읽기

1-2 아마샤에 이서 웃시야가 왕이 되었다. 사관은 특이하게 유다의 온 백성이 웃시야를 왕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웃시야는 열 여섯에 왕이 되었다. 웃시야는 엘랏을 재건하여 유다에 귀속시켰다.

3-5 웃시야는 예루살렘에서 52년 동안 다스렸다. 웃시야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태생의 여골리아다. 웃시야는 아버지 아마샤가 한 (모든?) 일을 본받아서,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웃시야의 곁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주는 스가랴가 있었는데, 스가랴가 살아있는 동안 웃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 웃시야가 주님의 뜻을 찾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웃시야가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주셨다.

6-8 웃시야는 블레셋과 싸워 블레셋 지역안에 유다 성읍들을 세웠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블레셋, 구르바알에 사는 아라비아 사람, 마온 사람을 쳤다. 암몬 사람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쳤다. 웃시야가 다스리는 남유다는 매우 강하게 되었고 그 명성이 멀리 이집트까지 퍼졌다.

9-15 웃시야는 예루살렘 성 세곳에 망대를 세워 요새화 하였다. 가축을 기르는 자, 농부, 포도원 농부도 두었고, 농사 짓는 곳곳에도 망대를 세우고 우물도 팠다. 웃시야는 언제든지 나가서 싸울 수 있는 큰 규모의 상비군도 운영했다. 여이엘이 병적기록관으로 마아세야가 병무담당 비서관으로 상비군을 관리했고 이들의 총지휘관은 웃시야의 직속신하인 하나냐였다. 상비군에는 이천육백명의 장교가 있었고 군인들은 삼십만 칠천 오백명이었다. 웃시야는 군인들을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무릿매로 무장시켰다. 예루살렘에 무기제조 기술자들을 두어 새로운 무기도 고안해서 만들었다. 웃시야의 명성이 사방으로 퍼졌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웃시야는 매우 강한 왕이 되었다.

16-18 웃시야 왕은 힘이 세어지면서 교만해졌다. 교만한 웃시야는 악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성전 안에 있는 분향단에 분향하러 들어갔다. 제사장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월권이었고 이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었다. 아사랴 제사장이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웃시야 뒤를 따라가서 웃시야 왕을 말렸다. 제사장들은 웃시야에게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일이 아니라, 분향을 수행하도록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거룩한 곳에서 빨리 물러나라고 웃시야에게 말했다. 왕이 범죄했으니 하나님께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9-21분향을 하려던 웃시야는 제사장들의 말을 듣고 화를 냈다. 웃시야가 제사장들에게 화를 낼 때 웃시야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다. 제사장들은 나병이 생긴 웃시야를 성전에서 쫓아냈다. 웃시야는 재앙이 닥치자 (나병이 생긴 것을 깨닫고) 급히 성전에서 나왔다.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나병을 앓았다. 나병이 생긴 웃시야는 성전 출입도 하지 못하고 별궁에 격리되어 여생을 보냈다. 아들 요담이 웃시야 대신 백성을 다스렸다.

22-23 웃시야의 사적은 아모스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했다. 웃시야가 죽었으나 나병환자였기 때문에 왕실묘지에 장사하지 않고 왕가에 속한 변두리 땅에 묻었다. 요담이 웃시야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

>> 웃시야의 삶은 “웃시야는 아버지 아마샤가 한 모든 일을 본받아서,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라고 정리된다. 웃시야의 아버지 아마샤는 어땠나? 사관은 아마샤를 “주님보시기에 올바르게 행했지만,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런 아마샤는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결과로 올바른 행위마져 무너뜨리고 주님을 따르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웃시야는 사관의 한줄평가 그대로 ‘아마샤가 한 모든 일을 본받았다.’ 이어지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는 평가에 혹해서는 안된다. 주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했느냐 안했느냐보다, 지속적으로 주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느냐 안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았듯이, 웃시야도 스가랴의 가르침이 머물러 있지 못했다. 요아스부터 계속해서 독립적 신앙인격체로 바로 서야함의 중요성을 교훈한다.

사족: 사관의 평가를 하나님의 평가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행위대로 평가하신다.

역대하 25:14-28 읽기

14-16 아마샤는 에돔 사람들을 학살하고 돌아올 때, 세일 자손의 신상을 가져와 자기의 신으로 모시고, 그 신상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했다. 주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셔서 예언자 한 사람을 보내 아마샤를 책망하셨다. “세일의 신들은 세일 백성들을 왕(아마샤)의 손에서 건져내지 못했는데, 왕은 어찌 세일의 신들에게 빕니까?” 아마샤는 예언자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예언자의 말을 가로막고 오해려 예언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언제 너를 (예언자를) 왕의 고문으로 추대했느냐? 맞아 죽지 않으려면 닥쳐라!” 예언자는 아마샤에게 “왕이 나의 충고를 받지 않고 이렇게 하시니 하나님께서 왕을 망하게 하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이제 알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고 예언하기를 그쳤다.

17-20 아마샤는 참모들과 북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에게 전령을 보내 힘을 겨루어 보자고 제안했다. 북이스라엘의 여호아스는 아마샤에게 당신이 에돔을 쳐부수었다고 스스로 대견스러워하고 건방지게 우쭐대지 말아라. 그냥 궁전에 머물러 있지, 왜 유다와 함께 멸망당할 화를 스스로 불러들이냐고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여호아스 왕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다사람들이 에돔 신들을 섬기는 것에 대한 벌로, 남 유다를 북이스라엘의 여호아스에게 넘겨주시려고 아마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21-24 북이스라엘 여호아스가  남유다의 아마샤 왕을 맞아 싸웠다. 하나님는 남유다가 북이스라엘에게 패하게 하셨다. 유다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자기들의 집으로 도망갔다. 북이스라엘의 여호아스는 남유다의 아마샤를 사로잡아 예루살렘까지 진격해왔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모퉁이까지 사백자 길이의 성벽을 허물었다. 그리고 성전 안의 모든 금과 은과 그릇들을 약탈하고 왕궁의 보물창고를 약탈하고 사람까지 볼모로 잡아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25-28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여호아스가 죽은 뒤에도 열다섯해나 더 살았다. 아마샤의 사적은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다. 아마샤가 주님을 따르다가 배신한 후,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마샤는 라기스로 도망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라기스까지 사람을 보내 아마샤를 죽였다. 그들은 아마샤의 시체를 말에 싣고 와서 다윗 성에 장사했다.

>>  주님보시기에 올바르게 행했지만,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고 평가받은 아마샤! 그러나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결국은 올바르게 보이는 행위마져 무너뜨리고 만다. 아마샤는 마음을 다하지 않은 빈구석에 세일 신들을 모셔들였고,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교만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마샤를 완악하게 내버려 두셨고, 아마샤는 자신이 선전포고한 북이스라엘 여호아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만다. 사관은 아마샤가  승전한 왕인 북이스라엘의 여호아스보다 열다섯해나 더 살았다고 기록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아마샤에게 뉘우칠 시간을 충분히 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샤는 돌이키지 않았다. 주님을 따르던 아마샤는 결국 주님을 배반한 자로 부왕 요아스와 같이 반란자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주여 주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는 행위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순종의 삶,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그 어느것도 우리 마음에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빈구석이 있다면 말씀으로 채워야 하고 순종으로 마감해야 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평가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역대하 25:1-13 읽기

1-4 아마샤는 스물 다섯에 왕이 되었다. 아마샤는 예루살렘에서 29년동안 다스렸다. 아마샤의 어머니 여호앗단은 예루살렘 사람이다. 아마샤는 주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 아마샤는 왕권을 장악한 뒤, 부왕 요아스를 살해한 신하들을 처형하였으나, 모세 율법에 따라, 곧 주님의 명령에 따라 처형받은 자녀는 죽이지 않았다.

5-8 아마샤는 (국방을 위해)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가문별로 군대 단위로 조직했다. 군대 조직에 편성된 스무살 이상된 남자는 모두 삼십만명이었다. 그리고 은백달란트를 주고 북이스라엘에서 용병 십만명을 고용했다. 이때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북이스라엘 용병을 싸움에 데리고 가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만약 아마샤가 북이스라엘 용병을 데리고 출전하면 하나님께서 아마샤가 대적들 앞에서 엎어지게 하실 것이라고 충고했다. 하나님께서 아마샤를 이기게도 지게도 하실 수 있다고 가르쳤다.

9-10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북이스라엘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 지불은 은 백 달란트는 어떻게 하면 좋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주님께서 은 백 달란트보다 더 많을 것을 주실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용병들은 유다 사람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11-13 아마샤는 용병없이 출병하여 소금계곡에서 세일 자손 만명을 죽였다. 또 만명을 산채로 붙잡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아마샤가 세일 자손과 전쟁을 하는 동안 북이스라엘로 돌려보낸 용병들이 사마리아와 벳호른 사이에 있는 유다의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을 삼천명이나 죽이고 물건도 약탈했다.

>>  “주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 아마샤 왕에 대한 평가다. 아마샤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고,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따라 북이스라엘 용병들을 돌려보낸 것을 사관은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한 것이라고 보았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일의 진행을 보니 아마샤의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마샤는 부왕 요아스를 죽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자로 사용되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을 돌려보내면서 경제적 득실을 따졌다. 결국 북이스라엘 용병들은 승전후 받아야 할 전리품을 포기해야 할 생각에 불쾌한 마음으로 돌아가다가 유다 마을을 약탈하고 유다 사람 삼천명을 죽였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이 유쾌하게 돌아가도록 선처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샤는 용병없이 출병하여 세일 자손 만명을 죽였다. 문제는 산채로 잡은 만명의 포로들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전쟁포로들을 이렇게 대우했다는 것은 이기게도 하시고 지게도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 아마샤! 우리들은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한 것처럼 사람에게 보일 수 있다. 살인하지 않으면 되고, 간음하지 않으면 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말씀대로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놀리는 것만으로도 사형받을 죄를 지은 것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남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면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이요 아버지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는 자들이라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신앙에는 ‘이정도면 됐어’가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