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9:1-12

예수님은 발걸음을 갈릴리에서 유대쪽으로 옮기신다. 여전히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질문했다. 이유가 있으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은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라고 대답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옳다구나하면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것은 (신24:1-4) 어찌됨인지 따져 물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했지만 본래의미는 그렇지 않다고 (이혼을 하면 안된다고) 답변하신다. 이혼은 불가하다고 하신다.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한 자라고 하신다. (남자 문제다.)

제자들은 이혼은 본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곱씹으면 아내와는 이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돌연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은 독신은 (비혼이라고 해야 하나) 오직 타고난 자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신다. 태어날 때부터든 사람의 손으로든 아니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든 오직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고 받으라고 하신다. 음… 이유는 간단하다. 혼외성애는 다 간음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라고 권면했을까. 바울은 주님의 명령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하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아햐 한다.

// 우리는 혼외성애의 죄악에 무뎌진 사회에 산다. 성애(섹스)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각종 혼외성애를 미화한다. 카메라에 담기는 성애의 대부분은 혼외성애가 아닌가? 국경도 나이도 인종도 뛰어넘는 사랑이 아니라 혼외성애에 집착한다. 그러나 성애(섹스)는 사랑의 극히 작은 일부분일 수 있어도 완전한 사랑은 아니다. 오히려 탐욕에 가깝다. 어떻게 아내를 버려도 되냐는 질문이 가능했을까? 이혼증서를 아내를 버리는 수단으로 사용할 정도로 예수님 때도 타락했었다. 이혼을 못한다면 차라리 비혼으로 사는게 좋겠다는 제자들의 반응도 그당시에 혼외성애가, 성매매가 비일비재했음을 시사한다. 유대문화에서 이러했으니 다른 문화에서는 더했을 것이다. 인지상정이라고 치부하고 말것인가? 오늘날 교회안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도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혼외성애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지 못한다면 동성애에 대해서도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해봐야 겠지만 동성성애(동성섹스)도 혼외성애의 일부지 더 악하다 덜 악하다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동성애자들을 버려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아라. (사회적) 사형선고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하셨다.  어쩌면 이들(혼외성애자들)이야 말로 천국을 위해서 고자되어야 하는 부류일지도 모르겠다. 미혼이든 비혼이든 이들이야 말로 고자가 되어야 한다. 왜? 혼외성애는 다 간음이기 때문이다.

돈과 섹스가 신이된 사회에 살고 있다. 건강한 가정도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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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이혼은 본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돌연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 예수님은 독신은 (비혼이라고 해야 하나) 오직 타고난 자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신다. 태어날 때부터든 사람의 손으로든 아니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든 오직 타고난 자라야 받을 수 있고 받으라고 하신다. 미혼이든 비혼이든 혼외성애(섹스)는 다 간음이다. 오죽했으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 욕정에 불타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편이 낫습니다” 라고 권면했을까. 바울은 주님의 명령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지지 말아야하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아햐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살면서 적어도 두번, 즉 세례식과 결혼식 때 하나님 앞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약을 한다. 이 서약만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서약을 어기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세상에 화가 있고 서약을 어기는 사람에게도 화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범죄하게 하는 신체 일부는 찍거나 빼어 버리면 되겠지만 음욕을 품는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되어야 않겠는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마저 쉽지 않다. 음욕보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더 많이 간직할 수 밖에.

 

마태복음 18:21-35

베드로가 느닷없이 왜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면 될까 물었을까?  풀고 매는 권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닐까? 베드로는 나름 일곱번정도 하면 될까요? 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일곱번이면 사람의 인내를 한참 더 넘어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숫자인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신다. 잃어버린 어린 양 하나늘 끝까지 찾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교회의 치리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에서도 이방인과 세리를 끝까지 찾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잃은 양 하나를 끝까지 찾으시고 이방인과 세레까지 찾으시는 주님은 천국 임금님의 용서와 심판으로 천국을 설명하신다.) 천국의 주인은 결산할 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을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사람을 만나 빚을 갚도록 요구했다. 그는 빚진 동료가 기다려주면 갚겠다고 하는데도 (자신도 똑같은 말을 주인에게 했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허락하지 않고 옥에 가둬버렸다. 이 사건은 다른 동료들의 고발로 임금(주인)의 귀에들어갔다. 주인은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를 불러다가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고 하시며 그를 옥졸에 넘겼다.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라고 경고하신다. (일만 달란트는 백 데나리온의 약 600,000 배 (60만배) 정도다. 더군다나 일만 달란트는 그 절대적 가치에서도 엄청난 액수다.)

정리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일만 달라트를 빚진 자도 용서하시지만 악한 자는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비유다. 하나님나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만 악한 자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다. 잘 읽어보면 악한 종이 주인의 심판을 받은 것은 다른 동료들이 악한 종을 주인에게 고발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악한 종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은) 다른 동료들의 용서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용서의 나라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일곱 번을 일흔 번씩은 횟수를 의미한다기 보다 용서 못할 잘못이 없다는 의미가 강하다. 용서를 모르는 악한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 꼭 ‘조건’ 같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으니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는 ‘이유’다.

용서야 말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이다. 기도는 은밀하지만 용서의 삶은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 천국문을 여는 열쇠다.

마태복음 18:11-20

예수님은 길을 잃지 아니한 99 마리 양보다 잃은 양 한마리를 찾은 것을 더 기뻐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냐고 말씀하신다. 마찬가지로 성부하나님께서도 작은 자들 중 한명이라도 잃고 싶지 않다고 하신다. 작은 자들은 마치 하나님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자들처럼  언급하신다. 한편으로는 하나님나라에 있는 작은 자라고 하더라도 (양처럼)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신다. 길을 잃어 버리는 것을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풀어가신다.

길을 잃는 작은 자를 (죄를 범한 형제를)  찾는 방법은 1) 죄를 범한 형제와 일대일로 권면하라. 2) 일대일로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과 함께 책망하고 권면하라. 3) 두세사람이 권면해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차원에서 치리하라. 교회의 치리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각 단계에서 권면을 들으면 형제를 찾은 (얻은) 것이다. (이방인과 세리라고 절망적이지 않다. 우리 주님은 이방인과 세리도 찾으신다. 결론은 죄에서 돌이키라는 것이다.)

18절의 말씀은 16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같다. [[ 예수님은 또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천국 열쇠란 무엇인가? 어렵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이듯이 베드로 또한 천국에서 세례요한만큼 작은 자라는 의미다. 천국 열쇠를 가지고 천국 문을 열고 닫는 일을 해야한다는 의미다. 지금까지는 바리새인들이 천국문 앞에서 마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듯이 행세를 했지만 예수님은 저들을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라고 책망을 하신다. (마2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열쇠가 없었다. 천국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천국열쇠를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천국 열쇠를 담당하는 자로 살 것이다. 결국은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삶이다. 그러니 열쇠를 받았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주고 닫는 일이 권세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2019.02.25 묵상일지에서 퍼옴]]

이번에는 베드로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는 두 사람에게도 (여기서 무엇이든지는 가장 좋은 것, 가장 필요로 한 것을 의미한다) 천국열쇠를 주신다고 하신다.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바로 그 곳에 주님이 함께하신다고 선언하신다. 임마누엘이다. 16장 묵상을 확인시켜 주신다. 주님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열쇠다. 내가, 우리가, 교회가 임마누엘임을 보여줄 때 천국문이 열린다.

양의 문이 되어 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양의 문을 풀고 매는 (열고 닫는) 천국열쇠가 (예수님이) 주어졌음을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신다. 오늘도 임마누엘의 신비를 누리게 하소서.

 

마태복음 18:1-10

마태는 특유의 ‘그때’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변화산 사건이 있은지 얼마지나지 않아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큰지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답하셨다.

어린아이의 천진무구한 성품을고려하신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던 어린 아이들의 처지를 가리키신다. 다시 말해 사회적 권리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자니라’ 라고 하셨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겸손해지라는 의미보다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권리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신다. 따라서 어린아이와 같이 낮은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낮은 자들만이 낮은 자들의 고충을 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라고 하셨다. 다시말해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히 작은 자들을 영접하러 작은 자가 되어 이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작은 자 한 명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신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 차라리 자신이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만큼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은 범죄다. 그래서 범죄하게 하는 신체부위가 있다면 찍어 내버리라고 하신다.  범죄하게 하는 손 없이 발없이 눈없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몸으로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성부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 고 덧붙이신다. ‘그들의 천사’는 무슨 뜻일까? 이미 (이땅에서도) 천국백성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아닐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저들의 삶의 곤고함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곤고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뵐 것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큰 자인가?’ 였는데 예수님은 ‘작은 자’가 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미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 다시말해 천국에서는 모두 큰 자다. 더 크고 더 작고는 의미가 없는 곳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느헤미야 13:15-31

느헤미야 13장은 10장  서약문의 (통혼/안식일/성전세와 십일조) 역순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내용을 바로 잡는 느헤미야의 기록이다.

오늘은 두번째인 안식일을 범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 받은 재앙이 바로 조상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서라고 꼬집어 말하고 안식일을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더욱 심하게 임한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안식일 전날 저녁 해지기 전에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성문을 열지 않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한두번 성문이 닫혀 고생한 장사치들은 그후로는 안식일에 다시 오지 않았다고 한다. 느헤미야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성문을 지키는 일도 레위 사람들에게 맡겼다.  그리고 느헤이먀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한 이 적용도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다. 어제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번 적용도 자의적인 적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선한 일이기를 간구한 것이다.

세번째로 유다 사람의 통혼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다.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자녀들이 유다방언은 못하고 아스돗 암몬 모압의 방언을 더 잘한다고 책망하고 저주한다. 심지어 그들 중 몇사람을 때리고 머리끄댕이를 잡아채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10장 서약의 첫번째와 같이 통혼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고 명령했다. 느헤미야는 솔로몬 왕도 통혼으로 범죄하였다고 분명히 지적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이방여인들이 솔로몬을 범죄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이 모든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심지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요야다의 아들 한명이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된 것을 언급하고 느헤미야가 그를 쫓아 내었다고 말한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더럽히고 언약을 어긴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한다. 한편으로는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사람들로서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하도록 지시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한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행한 일이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따라 적용한 것이요, 선한 것, 즉 하나님의 일이 되기를 기도한다. 느헤미야도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 주심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며 이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일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옵소서.

구약은 끊임없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가르쳐 준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순종을 제사제도 준수로  적용할 수 밖에 없었다. 산제사, 영적인 예배에 대해 몰랐던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아예 성문을 잠그는 것도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이었을 수 있다. 주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통혼문제도 솔로몬의 예만 언급했지 라합이나 모압여인 룻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 모든 적용은 느헤미야가 처한 당시 상황에서는 최선의 적용이었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이런 자신의 적용을 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께 감히 자신이 행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으리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헤아리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하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적용이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되기를 구해야 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신다.

느헤미야의 적용은 당시에는 최선의 적용이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실패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물론 그렇다고 하지 말았어야 할 적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듣고 순종해야 한다. 오늘 나의 이해와 적용과 순종도 완전할 수 없다. 그래서 임마누엘을 구하고 또 구하게 된다. 선하신 주님 나를 기억하소서. 느헤미야 서의 에필로그는 주님을 기다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