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14

복음이란 죄로 죽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누리는 영생, 풍성한 생명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즐거워 하는) 것이다. 복음은 죽음과 생명 중에 생명에 있다.

그런즉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다시) 거할 수는 없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은혜는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은혜들은 반복되기도 하고 더해지기도 하겠지만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은혜는 가장 크고 무한한 은혜다. 무한대에 무한대를 더한들 무한대인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죄에 대해 죽은 (이미 생명으로 옮겨진)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으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고, 연합하여 장사되었고 연합하여 부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새 사람이 되어 새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은 것은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몸이 죽은 것이다. 죄에게 종노릇 하던 몸이 죽은 것이다. 죽었으니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했다. 부활은 죄에서 벗어나 새 사람,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한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생명에 대해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사망, 죽음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고 명한다. 의롭게 행하고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우리 삶을 내주기 말라고 명한다. 대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한다. 은혜안에 거하면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복음이란 은혜로 말미암은 생명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다.

 

 

로마서 5:12-21

복음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지를 먼저 설명한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3:23). 그러니 사망,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연합 (교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온 죄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있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담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인생의 왕노릇을 하였다.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과 구원과 즐거움의 은사는 범죄처럼 사망을 가져오지 않는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다. 이 은혜는 사망대신 선물을 많은 사람에게 넘치게 한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요10:10b) 이 선물은 한 사람이 범죄하여 심판을 (유죄 선고를) 받은 것과 달리, 범죄한 많은 사람들을 의롭다고 (무죄라고) 선고한다.

한사람 아담을 통하여 사망이 왕노릇 하였으나 은혜와 은사 (의의 선물)은 한 분 예수 스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이 왕노릇하게 한다. 한 사람의 잘 못이 유죄를 가져왔는데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의롭다고 무죄선고를 받아 생명을 누리게 된다. 한 사람의 잘못은 불순종이요 많은 사람을 유죄판결을 받아 죄인되게 하나, 한 분의 의로운 행위는 순종하심이요 많은 사람을 무죄판결을 받게하여 의인이 되게 한다.

이렇듯 율법이 더해져 무엇이 죄인지 낱낱이 밝혀져서 은혜가 넘치게 필요하게 되었다. 죄는 사망이라는 왕의 종이 되게 한다.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그러나 은혜는 의가 왕이 되게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한다. 영생 풍성한 생명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교제, 영생,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 (18절)가 나의 주목을 끈다. 행위! 결국 순종이다.

로마서 5:1-11

(어제 ‘믿음=하나님’ 이라고 이해하며 본문을 읽었다. 요즘들어 헬라어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부쩍든다. 35년전 쥬영흠 교수님이 특강때 대학생이면 헬라어로 신약을 읽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셨건만…ㅠㅠ)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우리는 ‘하나님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라는 뜻이다.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는 죄인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의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화평)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믿음의) 은혜를 누린다. 이 미쁘신 하나님과의 연합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 께서 미쁘시니 즐거울 수 밖에 없다.

이 즐거움은 환란이 빼앗아 갈 수 없다. 환난 중에도 미쁘신 하나님과 인내로 연합하게 한다. 인내는 불의와 경건치 않음을 태워 없애는 연단의 과정이다. 연단을 마치면 소망을 이룬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이룬다.

소망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복음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음을 성령으로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로 죽어야 마땅한 자들을 위해 성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 의인을 위하여,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것도 우리가 죄인되었을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9절은 참말로 어렵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1절과 비교하면 결국 ‘믿음’은 ‘예수의 피’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의롭다는 새로운 신분에 합당하게 불의와 경건치 않음의 결과인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한다. 음. 개인적으로는 예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즉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화목하게되었다. 다른 말로 구원을 받는다.

이게 다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 (믿음)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한다.

// 구원은 주님과의 연합이요, 믿음과 하나님은 같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 화목이다. 환난도 이 즐거움을 빼앗을 수 없다.

로마서 4:13-25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주 천하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는다. (구원이란 우주 천하, 즉 창조주의 상속자가 되는 믿음이다.) 바울은 앞에서 율법 대신 하나님의 의라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믿음의 의라고 적는다.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의가 동격이니 하나님이 곧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믿는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이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아브라함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지기 반천년전 사람이다) 믿음은 헛것이되고 약속은 파기된다. 믿음=하나님, 약속=언약. 따라서 율법을 통해서만 상속자가 된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된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율법은 (믿음없음에 대한) 진노로 주어졌다. 율법은 무엇이 범법인지 (죄를 짓는 것인지) 알려준다.

(우주 천하를 지으신 창조주의) 상속자가 되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상속자가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에 속하기 위한 믿음으로 된다. (여기서도 믿음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미쁘심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믿음의 은혜는 (믿음의 언약은) 율법에 속한자들 (유대인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속한 자들 모두에게 유효하다. 아브라함은 우리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성경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세우셨다고 증거한다 (창17:5).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뜻이 열국의 아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임을 믿었다. 강조점은 아브라함이 믿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이다. 우리는 미쁘지 않은 것들을 믿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 마을 사람들은 미쁘지 않은 양치기 소년의 말을 믿지 않게되었다. 결국 믿음이란 대상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고 이것이 믿음의 행위를 유발한다. 우리 주님은 미쁘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은 하나님의 미쁘심에 근거한다. 유대인의 아비도 되고 열국의 아비도 되는 것을 믿었다. 늙은 부부가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었다. ‘믿음=하나님’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미쁘심’은 곧 ‘하나님’ 이다. 늙은 부부는 믿음은 약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 (하나님께 대한 신뢰) 이 견고해졌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했다. 자신의 믿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이 드러나게 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다. (오직 주님께 연합할 때 가능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믿음의 의,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곧 우리 주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미쁘신) 성부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

복음이란 믿음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미쁘심이고 곧 하나님이시다. 나에게는 미쁘신 주님과의 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