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2:1-12

1-4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규례다. 이웃이 잃어버린 것, 누가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라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가축만 아니라 의복도, 아니 그 어떤 것이라도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얻었다면 못 본 체하지 말고 돌려주어야 한다. 네 이웃을 탐내지 말라는 명령을 더 적극적으로 적용한다면 형제의 어려움을 못 본 체하지 않고 그 형제를 도와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한다.)

5 정체성을 확립하라. 여자가 남자인 체하거나 혹은 남자가 여자인 체하는 것은 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이다.

6 -7 자연 소산물을 아껴라. 탐욕스러운 어부들과 달리 지혜로운 어부는 치어들을 잡지 않는다. 새의 경우 어미새는 놓아주고 새끼는 취해도 된다고 한다. 동식물 멸절을 막는 지혜다. 이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주 하나님의 섭리를 배울 수 있고, 그 섭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다.

8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생각하라. 집을 지을 때도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 안전사고가 나면 그 책임은 집 주인에게 있다. 음. 다른 사람의 안전을 무시해가며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9 -11 섞지 말아라. 두 종자을 함께 뿌리면 이도 저도 아닌 (상품가치가 없는) 소산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힘쎈 소와 약한 나귀에게 한 멍에를 매어 밭을 갈면 소와 나귀도 나름대로 힘들도 밭을 가는 농부도 힘들게 뻔하다. 양털고 베실로 섞어 짠 옷은 쉽게 뒤틀어질 것이다. 주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과 같다.

12 기억하라. 옷에 술을 달아서 주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나는 무엇을 달고 있는가?

 

신명기 21

약속에 땅에서 지켜야 할 법을 주신 이유는 잘못을 하면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없애기 위해서다.  “너희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한 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9) 누구의 잘못인지도 모르는 살인죄, 그 죄값도 치르게 하시면서 까지 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죄를 없애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리품으로 얻은 아리따운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경우에는 그 여자를 더이상 종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여자이자 이방인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아리따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여자를 성적 노리개로 아내를 취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장자의 권리는 외모로 취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장자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기 때문이다. 출산의 순서는 주 하나님게서 정하시기 때문이다. 굳이 장자권을 바꿔야 한다면 그때는 주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같이 친히 간섭하신다. 사람이 차별해서는 안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자녀는 부모의 징계를 받아야 하고, 부모의 징계를 달게 받지 않는 경우 공동체가 투석하여 죽여야 한다. 이것이 악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모세는 굳이 부모에 대한 불순종을 방탕하여 술에 잠긴 자라고 예를 들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계명을 어기는 것은 주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요, 성령 충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세상 술에 (세상 가치관에) 빠졌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곧 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십자가형을 당한 시체도 밤새도록 나무에 두어 약속의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다. 시체가 널려 있는 죽음의 땅으로 내버려 두지 말라고 하신다. 그날에 장사하여 약속의 땅, 생명의 땅으로 살라고 하신다.

신명기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는 일벌백계(一罰百戒)의 ‘벌’이 아니라 ‘계’를 중시한다.

 

 

신명기 20

전쟁은 병거나 병사의 숫자놀음이 아니라고 한다. 누가 대장인지가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대장은 출애굽의 주 하나님, 홍해에서 애굽군대를 수장시키신 주 하나님, 아모리 두왕 시혼과 옥을 물리치신 주 하나님 이시다. 이 대장 주 하나님이 지금도 함께 하신다고 가르친다.

전장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주 하나님께서 함게 하시고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용기를 붇돋아 주는 것으로 전쟁을 준비한다. 대장 주님은 싸움에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면제해 주신다. 집을 지었는데 집들이를 하지 못한자. 포도원을 지었는데 수확을 못한자, 약혼을 하였는데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자. 심지어 마음이 허약한자.

// 전쟁은 잔치가 아니다. 주님의 잔치에는 집들이와, 농사일과, 결혼으로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핑계거리가 될 수 없지만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전리품을 나누는데는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우리는 주님의 승전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일도 핑계거리가 될 수 없다.

전쟁의 목적은 상대방을 진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진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악의 만렙이 아닌 가나안 주변 민족에 대해서는 우선 화평을 선언하라고 하신다. 상대방이 화평으로 회답하면 그 주민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고 이스라엘을 섬기게 하며, 만약 화평을 거부하면 싸워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여야 한다. 그래도 여자와 유아와 가축과 탈취물은 전리품으로 취할 수 있었다.

// 화평으로 회답한 족속의 댓가는 생명이다. 대신 세금(조공)을 내야하고 소작농(종)이 되어 일해야 한다. 과연 이스라엘은 과연 주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좋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주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산다면  조공을 내는 종이 되어도 감사할 것이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자를 베푸는 것에 실패한다면 누구나 독립을 꿈꾸지 않을까?

그러나 헷, (기르가스는 어디로)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히위, 여부스 족속은 호흡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악이 ‘만렙’이기 때문이다. 가증한 일을 행하는 저들을 본받아 주 하나님께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한편 성읍을 공격할 때라도 주변 수목에 대해서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한다. 수목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신다. 과목은 보존해야 하고 과목이 아닌 나무들은 성읍 함락기구를 만드는데 사용해도 된다고 하신다.

신명기 19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사는 것은 그 땅의 여러 민족을 멸절시키고 그 땅을 주 하나님께 받은 결과다. 어떻게 보면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결과다. 이런 가나안정복 전쟁은 자칫 목적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잘못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도피성은 이런 생명경시에 대한 경고다. 무죄하게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명하신다. 심지어 살인에 대해서도 부지중에 살인한 경우에는 보복해서는 안된다는 ‘생명중시’를 명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무죄한 피를 흘린 자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에서 제하라고 명하신다.

죄에 대한 판결은 두명 이상의 증인으로 확정되고, 증인이 없는 경우 (쌍방의 주장이 다른 경우) 주 하나님 앞에 나가 제사장과 재판장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 재판장은 사건을 자세히 조사해야 할 의무가 있고 바르게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형제에게 악을 행하려고 꾀한 자를 벌하여 공동체의 악을 제거해야 한다.

일벌백계로 공동체 중에서 악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그러니 명령과 규례들은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것이다. 법의 정신이다. 악을 제거하는데는 긍휼이 필요없다. ‘악’을 아까와해서는 안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지나친 보복으로 죄를 짓은 것을 막으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다. 때리면 맞고, 고소하면 더 배상하고, 필요이상으로 도와주고, 받을 생각없이 꾸어주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보복성 행위를 하지말고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라고 하셨다.

약속의 땅에서의 삶은 결국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삶이다. 도피성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악한 자들도 있을 것이나 주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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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이란 ‘아까와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르신들은 음식이든 물건이든 잘 버리지 못한다. 아깝기 때문이다. 차를 모는 사람은 범퍼에라도 흠이 갈까 조심한다. 범퍼의 역할이 있음에도 아깝기 때문이다. 도피성은 주 하나님께서 백성의 생명을 아깝게 여기셔서 만드신 제도다. 무죄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구별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깝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악’이다. 우리 눈은 악을 긍휼여겨서는 안된다. 악을 아깝게 여겨서는 안된다. 제거해야 한다.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심정으로 제거해야 한다. 율법의 명령과 규정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계’를 주기 위함이다. 악을 제거하는 일에는 지나침이 있을 순  없겠지만, 악을 제거 한다고 무죄한 자의 생명을 경시해서는 안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3:9)

예수님께 직접 배운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가르친다. 사랑의 법은 율법보다 수준이 높다. 악을 선(복)으로 바꾸라고 하신다.

 

신명기 18:15-22

주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겠다고 하신다. 주 하나님께서는 온 백성중에 불과 흑암과 음성으로 말씀하시기 원하셨으나 호렙산 총회에서 백성들은 말을하지 못하는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 하나님께서 큰 불가운데 말씀하시자 두려워 떨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원하는대로 모세를 선지자로 세워 주 하나님의 말씀을 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로 하셨다.  이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니 주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워서 끊임없이 말씀을 전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선지자를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다. 따라서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주 하나님께 불순종 하는 것이요 그 댓가는 벌이다. 그러나 선지자도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든지, 주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전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신다.

당연히 백성들은 선지자가 하는 말이 주 하나님께서 하신 말인지 아닌지 궁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모세는 선지자가 주 하나님의 이름을 말한 일에 증거나 성취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없다면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한다.

//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 들이다. 그런데 우리를 다 선지자로 부르셨다고는 하지 않는다. 물론 초대 교회 지도자들을 구분할 때 사도, 선지자, 교사로 구분해서 선지자라는 직분?이 있지만 선지자가 하는 일은  주 하나님의 말씀(주로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새로운 계시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다. 따라서 보혜사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을 거스리면 안되는 이유다. 선지자의 역할이 주로 총회, 공동체를 향한 주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는 점에서 우리 역시 공동체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도들이 함께 인도 받으려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개인적인 경험만 내세우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