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4:15-31

모세는 십계명 두번째 “자기를 위하여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에 대한 강론을 한다.

(15) 주님의 형상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본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1:18)  조심해야 한다.

(16) 주님의 형상을 새겨 만들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남자와 여자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낼 수 없다. 그림자가 본체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것과 같다.

(17~19) 주님의 피조물들, 짐승, 새, 곤충,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하늘에 달아 두신 해와 달과 별들을 경배하며 섬기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부분이 전체를 드러낼 수 없다.

(20~22) 모세는 주님이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노예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으니 (가나안에서 더이상 주님의 대리자로 너희를 지도할 수 없으니 나에게 기대하지 말고, 나의 중보만 믿지말고)

(23) 언약의 주님을 잊지 말고 주님이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만들지 말아라. 형상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24) 주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언약을 어기는 백성을 소멸시키신다.)

(25) 이 계명은 당대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지켜야 한다. 우상을 새기게 된다면 스스로 부패했다는 증거다. 그것이 곧 주님 앞에 악을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26) 우상을 새겨 만들면 가나안에 들어간다 하여도 속히 망할 것이다. 오래지나지 않아 전멸될 것이다.

(27~28) (전멸을 면한다 하여도) 겨우 적은 수만 여러 민족으로 흩어져 살아남을 것이다. 흩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만든 우상, 즉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30~31) 그러나 흩어진 곳에서라도 목석 우상이 아닌 주님을 찾는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찾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환난을 당하겠지만 결국 주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한다면 주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기기 때문에 너희를 버리지 않으시며, 너를 멸하지 않으시며,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라는 계명은 우리가 주님의 피조물임을 다시금 선언한다. 우리가 새기고 만들 수 있는 그 어떤 형상으로도 주님을 가둘 수 없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는데 어떤 형상으로 주님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결국 남는 것은 언약이다. 말씀이다.

신명기 3:1-11

두번째는 바산 왕 옥이다. 옥도 시혼처럼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이스라엘에 대적했다. 여우 이스라엘 뒤에 호랑이 주님이 계시는 걸 아직 못봤다.

바산의 높고 견고한 성읍들을 진멸했다. 아모리 두 왕 시혼과 옥이 다스리던 지경을 빼앗았다. 바산 왕 옥은 롯의 자손들이 차지한 땅의 사람들(르바임 사람)처럼 거구, 거인이었다. 바산 왕 옥의 침대(혹은 관)의 사이즈가 9×4규빗이니 (4×1.8 미터정도) 키와 덩치가 상상이 안된다.

옥을 보고 한순간 당연히 쫄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 전쟁은 수의 많고 적음이나, 덩치의 크고 작음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신명기 2:26-37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24절 말씀대로 헤스본 아모리 왕 시혼부터 진멸한다. 모세는 주께서 시혼을 완강하고 완고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주께서 완강하지도 완고하지도 않은 시혼을 완악하게 바꾸셨다는 뜻이 아닐것이다. 완강하고 완고한 시혼을 그 상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는 뜻이다. 시혼은 이스라엘의 요청을 그날도 평소처럼 성깔을 부리며 거절하지 안았을까. As he is today (NASV).

시혼은 모든 백성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대적했다. 전쟁은 주께 속한 것이다. 에서에게 세일 산지를, 롯의 후손 모압과 암몬에게 르바임을 주신 분이 주님이셨다. 시혼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신 분도 주님이시다.

[진멸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남여노소, 심지어 유아까지 진멸을 명하실 수 있을까? 노아 때처럼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셨을까? 헤스본 아모리 왕 시혼처럼 모든 백성이 악했을까? 시혼이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가 답이 될 수 있을까? 잔혹성이 아니라 정결해야 함에 초첨을 맞추지만 싸움을 대신? 하는 입장에서는 항상 찝찝함이 남아있다.나에게서도 여전히 악함을 본다. 거룩한 전쟁에 군사로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 결국은 나의 옛 본성과의 싸움이다. 주님이 앞장선다. ]

신명기 2:1-25

광야는 푸른 초장도 쉴만한 물가도 아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다윗보다 먼저시편 23편을 노래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7)

주님이 목자시면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광야든, 초원이든 시냇가든. ‘함께 하셨다’ 는 것이 중요하다. 목자와 양, 주인과 종, 부모와 자녀, 왕과 백성. 이 모든 관계는 함께할 때 의미있다.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에서와 롯의 자손들과 화평하라고 하셨다. 심지어 먹을 것도 물도 사서 먹고 마시라고 하셨다. 댓가를 치르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복은 은혜로 주어지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합당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 당연히 죄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주의 백성들이 악함으로 벌을 받았듯이 물론 저들은 자신들의 죗값을 치를 것이다. 그렇다고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안된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모세를 통해 에서와 롯의 후손 모압과 암몬을 언급하신 것은 형제애가 아니라 그들이 그 땅에 있던 덩치 큰 (강한) 원주민을 진멸시키고 그 땅을 차지했다는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헤스본 아모리 왕 시혼부터 한걸음 한걸음 나가면 된다. 호가호위할 수 있다. 아니 호가호위를 알고 하라고 하신다.

오늘부터 내가 천하 만민이 너를 무서워하며 너를 두려워하게 하리니 그들이 네 명성을 듣고 떨며 너로 말미암아 근심하리라 하셨느니라 (25)

그러니 내 힘인줄 착각하면 안된다.

신명기 1:34-4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6)

갈렙을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한’ 자라고 소개한다. 히브리어 사전을 보면 순종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충만하다, 가득채우다의 의미를 갖는 단어다.

다니엘서의 손가락이 나와 벽에 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떠오른다. 다니엘은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라고 해석한다. 그러니 부족함이란 불순종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낮추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이 불순종이다.

그러니 순종이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갈렙의 용기가 이해되지 않는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충만했다. 순종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43)

악한 세대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이 뭔지 몰랐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야한다. 어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순간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어렵다. 일 자체에 집중하다보면 지금 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이기 어렵다. 일을 하다보면 내 생각대로 흘러가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매순간 귀기울여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통곡이다. 더 큰 문제는 통곡을 해도 주님이 우리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갈렙의 순종. 갈렙은 주님의 뜻으로 자신을 온전히 채웠다.

말씀과 보혜사 성령님이 깨닫게 하신 것을 힘써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