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9:1-13

엘리사는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예후에게 기름부으라고 명한다.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신다. 예후는 여호사밧의 아들로 소개된다. 남유다 왕들이 아합가문의 왕들의 이름을 따, 아합의 사위나라가 되었다면 예후는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름이 같은 아버지를 둔 것이다. 이름의 뜻도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심판’이며, 예후는 ‘그는 여호와’이다. 결국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심판을 통해 주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이리라.

오늘의 삼세번은 ‘기름을 붓다’이다. 엘리사가 제자에게 명령할 때, 엘리사의 제가자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부을 때, 예후가 무리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할 때 ‘기름을 붓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엘리사도, 엘리사의 제자도, 예후도 이 일의 주권이 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관은 이스라엘의 주관자가 엘리사도, 엘리사의 제자도, 예후도 아닌 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예후를 통한 아합집안에 대한 주 하나님의 심판은 구체적이고 철저하시다. 멸절하기까지 심판하신다.

젊은 선지자의 행동은 예후와 함께한 무리에게 보기에는 미친짓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선지자가 군대장관 앞에 나타나서 독대를 요청하고 이래라 저래라 신탁을 전하고기름을 붓고 도망쳤으니 미친 자라고 한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쳤다는 것은 ‘사람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 강하다.  무리들은 젊은 선지자가 예후에게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신탁을 하고 갔음을 알았을 것이다. 예후는 그것을 무리에게 밝혔다. 무리는 신탁의 내용대로 예후를 왕으로 삼았다. 신탁의 내용에 순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자신들을 위해서 새로운 권력에 붙은 것이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 세상은 미친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다. 급히 도망쳐야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전할 말은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열왕기하 8:16-29

우리가 아는 ‘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왕들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여 죽은 뒤 붙여 준다. 열왕기의 왕들의 이름도 그랬을까?

오랜만에 열왕기에 남쪽 유다의 왕이 기록된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왕으로 세워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고 사관을 기록한다(16). 사관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3:1)과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을 구분하기 위해 아합의 아들을 요람이라고 기록한다. (새번역에서는 3:1에서도 요람이라고 번역)

사관은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의 이름을 ‘여호람/요람’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유다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음을 강조하는 것 같다. 아합의 딸을 아내로 삼고 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그래도 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유다를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악에는 벌이 따른다.

에돔이 유다를 배반했다. 배반하고 덤비는 에돔에 대항했으나 더 이상 정복할 힘이 없었다. 오히려 포위 당했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그때 립나도 배반했다. 이렇게 아합을 따른 여호람의 시대는 저물고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아하시야’역시 이스라엘 여호람/요람 왕의 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이름을 따온 것 같다. 하기야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으니 아달랴가  일찍 죽은 자기 오빠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사관은 아하시야가 아합의 길로 행하여 악을 행했다는 것을 ‘아하시야는 아합 집의 사위가 되었다’라고 강조한다. 이스라엘 왕 (외삼촌) 요람을 도와 아람 왕 하사엘과 싸웠고, 요람이 부상을 입자 요람 문병까지 갈 정도로 한통속이 되었다.

유다왕 여호람과 아하시야. 이름뿐만 아니라 통치스타일이 아합 집안의 길을 따랐다.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선왕 여호사밧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힘을 합치면 옛영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맞다. 통일 이스라엘은 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 접근법이다.

한반도의 남과북도 통일을 꿈꾼다. 통일 한반도의 잠재력을 상상한다.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교회들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통일된 한국교회도 주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적 강성함만 꿈꾼다면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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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왕들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여 죽은 뒤 붙여 준다. 열왕기서 왕들의 이름도 그랬을까?

여호람의 선왕 여호사밧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힘을 합치면 옛영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까? 아들 이름마져 북이스라엘 요람왕을 따랐다. 아합의 딸과 결혼까지 시켰다. 여호람도 아들을 아내 아달랴 (아합의 딸)의 오빠이름을 따서 아하시야로 불렀다. 통일 이스라엘은 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 접근법이다. 사관은 아합의 사위국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한반도의 남과북도 통일을 꿈꾼다. 통일 한반도의 국력적, 경제적 잠재력을 상상하면 나도 즐겁다.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교회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적 강성함만 꿈꾼다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들도 ‘바벨론의 사위’라고 불릴지 모른다. 음. 지나친 적용일까?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새벽이 즐겁다.

열왕기하 7:3-20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4)]

오늘날 한국교회는 굶주림이 있는 성읍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은 안다. 교회에 간들 굶주림이 있으니 교회에서 죽을 것이다. 그냥 죽기 싫은 그들은 결국 맘몬에 항복한다. 맘몬이 죽이든 살리든 ‘케세라세라’.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절망적이지 않다. 긍정적이다. 악한 세상도 (교회 밖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맘몬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스릴 수 없다. 그래서 굶주린 교회는 교회밖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세상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닫고 불신앙을 고집하면 결국 죽는다.

세상을 이겼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 갇혀 말씀의 능력을 맛보지 못하는 굶주림의 신앙 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웃사랑이 없으면 성도들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갈 것이다. 그러다 교회 지도자들은 성문에서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9)]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나병환자들은 교회 밖에서도 맘몬 대신 주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기로 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에서랴.

죽으면 죽으리라!

열왕기하 6:1-7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쇠도끼 이야기.

예언자 수련생 (선지자 제자들) 중 하나가 수련원 증축을 위해 요단강 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빌려온 쇠도끼를 요단 물에 빠뜨렸다. 도끼를 빠뜨린 수련생이 함께 일하러 왔던 엘리사를 향해 빌려온 도끼를 물에 빠뜨렸다고 하자 엘리사는 어디에 빠졌는지 묻고, 그 위치를 보고받자 쇠도끼가 떠오르는 이적으로 쇠도끼를 건져주었다.

선지자의 동행이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지 않는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는 생긴다. 그러나 선지자의 동행으로 제자는 문제를 바로 보고할 수 있고 선지자도 문제의 근원을 바로 알 수 있다. 쇠도끼가 떠오르는 이적은 물론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열왕기의 기자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도끼가 빠진 위치를 확인할 때만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리라고 불렀다.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열왕기하 5

나아만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의 주인은 아람 왕이었다. 자신의 나병을 낫기 위해서도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한편 그 자신도 여럿을 거느린 주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순종하여 나병이 깨끗이 낫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돌아와 ‘당신의 종’ 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열왕기 기자는 철저하게 엘리사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기록해서 나아만의 주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강조한다.

나아만의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람의 군대장관으로 아람 왕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주인은 주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나병환자에서 평안의 삶을 산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종들에게도 경청한 (온유한) 나아만은 노새 두마리에 실을 흙(땅)만 받았지만 하나님나라를 받은 것이다.

또 한사람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주인도 맘몬으로 바뀌었다. 맘몬을 주인으로 바꾸자 평안 대신 거짓이 게하시를 주장했다. 결국 게하시는 나병환자로 살게된다.

평안하냐? 고 물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