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3

예루사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각자의 성읍에 살았다. (2:70) 일곱째 달이 되었다. 일곱째 달은 유월절을 첫달로 하는 율법을 받기 전에는 한해를 시작하는 달이다. 요즘의 9월 10월쯤 시작하니 서양에서의 학사력도 여기에 뿌리는 두나 궁금해 진다. 일곱째 달에는 속죄일이 있고 초막절이 있는 달이다.

귀환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각자의 성읍에 (어느정도) 정착하자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착하기 위해 율법의 절기를 따르기로 한 것 같다. 예수아를 비롯한 제사장들뿐 아니라 총독의 지위였던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까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율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행했을 것이다.

귀환한 무리들은 그 땅을 차지 했었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두렵기는 했지만 성전터에 제단을 세우가 번제를 드리며 율법에 기록된대로 초막절을 지켰다. 에스라서의 기자는 일곱째 달 첫날부터 번제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성전 재건을 시작하기도 전에 임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석수 목수를 사서, 또 시돈과 두로 사람을 사서 성전 재건을 위한 건축자재를 운반해 왔다. 이렇게해서 귀환한 다음해 둘째달이 되어서야 성전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성전 공사는 이십세 이상의 레위사람들이 감독하였다. 제사장 예수아가 아마도 총감독,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감독이 되었다.

건축자들이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주를 찬양하며 기공식을 하였다. 찬양으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모든 백성이 기초가 놓임만 보고도 주를 찬송하며 크게 즐거워 하였다. 첫 성전을 보았던 나이 많은 족장들은  대성 통곡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기쁨의 외침과 통곡이 어우러져 멀리서도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 나이 많은 사람들은 왜 대성통곡을 했을까? 이전 영광에 비해 초라한 성전의 모습을 보고 통곡했을까? 이것만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불순종으로 성전을 지키지 못했던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통곡이었을 것이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해 주신 은혜에 감격하는 통곡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큰 기쁨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나의 삶을 돌아본다. 대성통곡할 노릇이 얼마나 많은지. 대성통곡은 하나님 앞에 서면 터져나오는 당연한 반응이다. 회개의 눈물이든 은혜의 눈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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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많은 사람들은 왜 대성통곡을 했을까? 이전 영광에 비해 초라한 성전의 기초만을 보고 통곡했을까?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불순종으로 성전을 무너지게 했던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통곡이었을 것이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해 주신 은혜에 감격하는 통곡이었을 것이다. 성전 재건보다 고향에서 자리잡기 바빴던 자신들의 모습을 회개하는 통곡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큰 기쁨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나의 삶을 돌아본다. 대성통곡할 노릇이 얼마나 많은지. 한국교회와 캄보디아를 봐도 대성통곡할 일이 많다. 대성통곡은 하나님 앞에 서면 터져나오는 당연한 반응이다. 회개의 눈물이든 은혜의 눈물이든. (스3)

나의 눈물이 말랐다면 그만큼 성전이 무너진 것이다. 울지 않는다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듯) 우는 자와 함께 울어야 한다.

에스라 2

바벨론 왕 느누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 중 바사 왕 고레스 칙령으로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을 집계한다. 길다.

귀환한 사람들의 지도자급 11명. 스룹바벨, 예수아, 느혜미야, 스라야, 르엘라야, 모르드개, 빌산, 미스발, 비그왜, 르훔, 바아나.

눈에 띄는 이름은 모르드개. 동명이인이 많겠지만 귀환했다가 다시 바사로 갔을 가능성도 있겠다 싶다. 비그왜는 동행한 자손이 이천 오십 육 명이나 되어 지도자 그룹에 한자리 차지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귀한자 명단 혹은 인구조사는 자손별로만 집계되지 않았다. 베들레헴, 여리고 등등 동향별로도 구분해서 집계되었고, 또 제사장들 자손의 경우 집안에 따라, 직무에 따라 집계되었다.

족보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되었는데 육백 오십 명이나 되었다. 제사장 자손들 중에서도 족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했고, 제사장 지위가 확실해 질 때까지 (대제사장이 세워질 때까지?) 제사장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도 제한했다.

이렇게 귀환자의 총 수는 42360 명으로 집계되었다.

//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감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이방 땅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일이라고 더 쉽지 않다. 이 역시 하나님께 감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은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동해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 수 있다.  모교회에서나 선교지에서나 하나님께 감동하지 않으면,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랴. 하나님께서는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감동된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대학으로 집떠날 아이들이 앞으로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 감동된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을 보여줬나 반성하게 된다.

에스라 1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주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바사왕 고레스를 당대 최고의 왕으로 만들어 쓰셨다. 바사왕 고레스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자신에게주셨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명령하사 유대인은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셨다고 조서를 내렸다. 그렇다고 고레스 왕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라고 했지만,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했다.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은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의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고레스는 소수민족의 신마저도 자신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스릴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겠금 하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왕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고레스를 하나님 말씀 성취에 사용하신 것이다. 고레스는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금과 은으로 도와 주라는 내용을 조서에 포함시켰으며, 바벨론이 가져온 성전 그릇도 돌려주었다.

고레스의 조서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자는 귀환을 준비했으며, 주변 사람들은 금과 은과 여러 예물로 지원했다. 성전에서 약탈 당했던 오천사백개의 그릇도 고레스로부터 돌려받았다. 포로지에서 유다민촉을 총괄한 세스바살 (스룹바벨) 총독이 인도했다.

// 당대 세상 중심의 바사왕 고레스는 우주 중심의 하나님을 변방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처럼 남은 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바사에도 계셨다.) 남은 자들은 어디에서 살든지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바사왕 고레스와 남은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신다. 나를 통하여 성취하실 말씀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8:1-10

안식후 첫날, 주일 새벽 미명에 두 마리아가 무덤을 찾았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누가 열어줄까 걱정했는데 큰 지진이 나며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러 치우고 그위에 앉아 두 마리아를 맞았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무서워 떨었다. 시체마냥 얼어붙었다.)

천사는 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있는 줄 알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 나셨다고 알려주고 빈무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두 여자에게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살아 나셨고,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전하게 했다.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을 향해 달음질 쳤다.)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여자를 만나 평안하냐고 물어주셨다. 두 여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했고 예수님은 (여전히 무서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는) 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천사가 명한대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 부활의 주님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과 천사의 광채에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말씀이 없는 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두 마리아도 무서웠다. 그러나 ‘말씀에 대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에 무서움과 큰 기쁨이 교차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처음으로 만나주셨다. 무서움 대신 평안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천사를 통해 들려 주신 말씀, 구약의 성경 말씀. 말씀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한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히브리서 9:11-22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먹고 마시는 (육체의 예법을 따르는) 세상 나라의 대제사장으로 매년 드려야 할 속죄제를 드리신 것이 아니다. 대신

의와 희락과 화평인 하나님나라의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신 사람이 지은 장막(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제물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성소 하늘 보좌로 단번에 들어가는 완전한 피흘림이었다.

제물의 피로도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다 하니,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이것이 새언약이다. 매년 갱신해야 하는 옛언약 대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은 것이다. 새언약도 옛언약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피로 확증했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유언으로.

구원이란 죽은 행실에서 (먹고 마시고 씻는 육체의 예법을 따지는 세상나라에서) 돌이켜 (개혁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의와 희락과 화평인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