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14-31 읽기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나서, 예수를 비웃었다. 무슨 말씀.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는 제자들에게 하셨다. 그리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로 시작하는 말씀은 너희에게 하셨다. 너희도 제자들일 것 같은데, 누가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너희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돈 얘기가 들리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귀담아 들었나보다. 뭔가 돈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부동산 정보도, 주식상황도 아니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니… 쯪쯪쯪.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조롱했다.

15-18 예수께서는 스스로 옳다하는 바리새파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꿰뚫어 보신다고 선언한다. 사람들 중에 높임이르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요한 다음부터는, 예수부터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다스림, 곧 하나님 나라 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선언하신다. 그렇다고 율법이 쉽게 폐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천지가 없어지기까지 율법은 존재하지만 율법의 적용은 문자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에따라 적용된다고 말씀하신다. 간음으로 예를 든다. 간음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다.

그리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하신다.

19-31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 한 헌데 투성이인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있었다.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고 기다렸다. 각설이 타령을 부르기도 전에, 오히려 개들이 와서 나사로의 헌데를 핧았다. 나사로는 그렇게 (부자의 대문 앞에서) 죽었다. 나사로의 죽음을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서술한다. 부자도 죽었다. 부자는 음부로 떨어져 고통가운데 있었다. 부자가 고통중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부자는 지옥불의 고통속에서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신을 긍휼히 여겨,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마른 입을 적셔 달라고 간청했다.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너는 살았을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부사와 나사로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있어 왕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자기 집에 보내어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자신이 고통받는 이곳에 오지 않도록 자신의 처지를 증언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부자에게 말했다. 부자는 다시 한번 죽은 자가 (나사로가) 부활하여 형제들에게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겁니다 라고 거듭 부탁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부활해서 권하여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앞과 뒤의 메세지는 분명하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 부자들은 지옥간다. 다시 말해 돈(재물)을 섬기면 아버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곳이 결국 지옥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고 하나님의 통치다. 성경에서 가장 확실하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예수의 가르침이다. 성경에 써 있다.

// 사실 돈을 사랑하는 사람, 곧 욕심이 많은 사람, 탐욕스러운 사람과 부자(부요한 자)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부요한 자로, 부자 주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 부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부요함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가난한다. 그래서 부자들을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겨우 일백 데나리온 채권자 종이 채무자에게 한 짓을 보면 그렇다. 부자와 달리 부요한 자는 빚을 탕감해 주는 사람이다.

누가복음 16:1-13 읽기

1-8a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다. 부자에게는 청지기 한명이 있었다. 부자는 이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부자는 청지기를 불러 놓고 (청지기에게 반론할 기회도 주지 않고) 청지기를 해고 하려니, 일을 정리하라고 말했다. 청지기는 주인이 청지기 자리에서 해고될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땅을 파자지 펜대만 굴려 힘이 없고 낯부끄럽게 빌려먹을 자신도 없었다. 청지기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청지기 직분을 잃은 후에 사람들로부터 영접받을 방법을 찾았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렀다. 첫째 사람에게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만지 물었다. 첫째 사람이 기름 백 말을 빚졌다고 하자, 청지기는 빚문서를 주면서 백 말을 쉰 말로 고쳐 적으라고 말햇다. 다른 채무자들도 불러 빚을 줄여 주었다. (그런데도)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청지기가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이다. ]

8b-13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매매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친구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라고 하신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인들 내주겠느냐? 라고 반문하신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는 청지기가 슬기롭게, 지혜롭게, 현명하게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의한 청지기는 빚문서를 조작해서 퇴직후 사용할 비자금을 만들지 않았다. 자기 주머니를 채우지 않았다. 빚진자, 사정이 어려운 채무자들의 빚을 일정 부분 탕감해 주었다. 빚을 탕감하는 일은, 의로운 주인이 즐겨하는 일이다. 곧 청지기가 주인이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에 주인의 칭찬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을 낚는 일이다.

// 오늘 본문의 비유의 핵심은 은혜와 충성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해서 짤렸다. 그런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더 낭비하고도 칭찬을 받았다. 그렇다면 전자의 낭비는 청지기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는 낭비였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원금보다 더 비싸게 빚문서를 작성했을지도 모른다. 상상의 나래를 편다.) 청지기가 처음부터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주느라고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면, 주인이 청지기를 짜르기보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을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는 해고 날짜를 받아 놓고서야, 자기 주인이 은혜를 베풀어서 채무자들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채무자들이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도 그렇게 했다.

// 누가는 불의한 청지기가 슬기롭게 처신해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관심이 없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슬기롭게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교훈하신다. 불의한 청지기가 해고 통지를 받고 행한 것처럼 은혜를 베푸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성도들에게도 바라시는 것이다. 은혜를 베푸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슬기롭게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재물을 섬겨, 자기를 위해 큰 창고를 지어, 자신만 즐기자고 하는 것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니 주인의 재산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라고 가르치신다.

// 결초보은! 이 세상 자녀들도 결초보은 하는데, 값을 따질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성도라고 하면서도 은혜 받은 대로 은혜를 베풀며 살지 못하니 부끄럽다. 사랑하며 살라고 하신다. 용서하며 살라고 하신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채무자들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하신다. 엉뚱한 데로 점점 빠진다…

누가복음 15:11-32 읽기

11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두 아들’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12-24 작은 아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 가운데서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미리 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살림을 나눠 받은 작 아들은 제것을 다 챙겨 먼 지방으로 갔다. 거기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작은 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그는 아주 궁핍해졌다. 결국 돼지치는 사람을 찾아가 돼지치기가 되었다. 그는 돼지가 먹는 꿀꿀이 죽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작은 아들은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 집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굻어죽게 되었다고 혼자 읊조렸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고 시인하고 아들의 자격은 이미 상실했으니 품꾼의 하나로라도 삼아 달라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 집으로 갔다. 그가 고향 입구에 도착했을 때, 집과는 아직 먼 거리였지만,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어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에게 품꾼의 하나로라도 삼아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작은 아들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명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잔치를 벌여 마땅하다고 말했다.]

25-32 큰 아들 [큰 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 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잔치소리가 들렸다. 큰 아들은 종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 종은 큰 아들에게 동생이 돌아왔고, 건강하게 돌아온 작은 아들을 위해 주인 어른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다고 대답했다. 큰 아들은 화가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마리 주신 일이 있었느냐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동생이 오니깐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구요 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것이다. 그런데 너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라고 말했다.]

//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 누구에게 촛점을 맞춰야 할까? 잃었다 찾은 양과 드라크마 이야기의 연장선이라고 우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아버지는 선한 목자요, 드라크마 주인이다. 작은 아들은 잃었다 찾은 양이고 드라크마다. 큰 아들은 들에 그냥 둔 아흔아홉마리 양일 수도,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일 수도 있겠다.

// 예수께서는 잃었다 되찾았다는 것을 죽었다가 살아났다로 풀어낸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은 산 것이요, 아버지를 떠난 것은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 곧 임마누엘은 물리적으로 함께 있는 것이 아님을 교훈한다. 큰 아들은 늘 아버지와 물리적으로 함께 있었지만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누리지 못했다. 잃은 것을 찾고 찾으시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작은 아들에게 임마누엘은, 작은 아들이 굶주림 속에서 아버지 집을 떠올릴 때부터 시작된다. 아버지 품에 다시 안기기까지는 물리적으로 아버지와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시편 84편 시인의 노래를 이미 불렀기 때문이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문지기라도, 아니 품꾼의 하나로 만족한다고 노래했지만, 아버지는 아들로 반겨주신다.

누가복음 15:1-10 읽기

1-2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거렸다.

2-7 예수께서 투덜거리는 그들에게 다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마리를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 한마리를 잃어버리면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닐 것이다.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잃어던 ‘내 양’을 찾았다고,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명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8-10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다.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어버렸다. 그는 등불을 켜고 온집안을 쓰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질 것이다.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사람을 불러 모으고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 잔치에 초청 받지는 못했지만 잔치소식을 들은 각설이들은 잔치하는 동네에 모여들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없다고 하자, 화가 나 잔치 주인은 종에게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각설이들을 데려오라고 명했다. 이 각설이들이 바로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리와 죄인들은 (마음이, 혹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요, (율법에 대하여) 눈먼 사람들이요, (율법을 지키는 것에) 다리 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의 (예수의) 초청에 응했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초대받은 사람들이었으나 잔치를 맛보지 못헸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초대만 받고) 행하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명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예수의 관심은 의인이냐 죄인이냐, 아흔아홉이냐 하나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은 없다. 우리끼리 크니 작니 아웅다웅 거려봐야 거기서 거기다. 4-6절에서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찾아낸즉 > 찾아내었노라.” 라고 찾는다 라는 동사가 반복된다. 길을 잃은 양이 목자를 찾고 찾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 찾는다. 결국은 선한 목자의 소유된 양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목자의 음성을 아는 양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주인이 벗과 이웃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

>> 예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셨다. 예수를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맞아 들이라. 우리 주님은 (지금도)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

누가복음 14:25-35 읽기

25-33 (여전히)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서 집을 지으려고 하면 집질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 먼저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셈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전쟁에 나가려면 적군과 싸워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당해 낼 수 없겠으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34-35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찐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이 아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은 거름으로도 쓸 데가 없어서 밖에 내버린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 예수를 따라 다닌다고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1) 가족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그런데 이 제자는 자격증을 따듯 일회성이 아니다.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한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이 쓸 데가 없어서 밖에 내버려지듯이, 제자의 자격을 잃으면 하나님 나라 밖으로 내버려진다. 밟힌다.


// 사람들은 망대를 세우기 전 그 비용을 먼저 셈한다. 셈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이 그를 비웃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세상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 물론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온다. 그래도 비웃음을 사는 이유는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함으로’ 예수의 제자인 것을 보여주지 못하니. 그러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00년이 넘도록 완성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도 비웃지 않는다. 진척이 있기 때문이다.

// 싸움의 결과를 헤아려 보는 것과 같이 자기 소유을 다 버리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바벨론과 싸워 결국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던가. 설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성전을 망하게 하실까?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의 거짓 예언에 사로잡혀 망하고 말았다. 하나님보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더 우상시 한 결과였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무조건 교회가 이기도록 하시지 않는다. ‘교회다움’을 위해서라면 이스라엘이 최후의 보루라고 여겼던 예루살렘과 성전까지도 망하게 하셨듯이, 하나님은 교회도 철저히 망하게 하실 분이시다. 한국교회는 3세기 이전의 로마교회로부터 ‘약자의 신학’을 배워야 한다. 지금은 망할 때다.


// 소금은 좋은 것이다. 좋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 좋았더라와 같은 뜻이리라. 따라서 제자의 소금됨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삶이다. 그러나 제자의 삶을 보여주기 못하면 더이상 제자가 아니다. 제자의 삶을 잃은 제자는 쓸 데가 없어서 하나님 나라 밖에 내버려진다. 성전, 거룩한 성, 곧 하나님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성도라면 이것을 두려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