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7 읽기

모두 박수치며 환호성을 올려라! 하나님을 목청껏 찬양하여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땅과 바다 아우르시는 놀랍기 그지없으신 분.
적들을 진압하고 민족들을 우리 발아래 굴복시키신다.
우리를 대열 맨 앞에 세우시니,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자들.
하나님이 산에 오르시니 환호소리 들리고, 산꼭대기에서 숫양의 뿔나팔 소리가 울려퍼진다.
하나님께 노래하자. 크게 노래하자!
우리 왕이신 분께 노래하자! 찬양을 드리자!
우리 왕이신 분께 노래하자! 찬양을 드리자!
그분은 온땅의 주인.
하나님께 최고의 노래를 불러 드리자.
그분은 못 민족의 주인. 산들의 왕. 군주.
온 세상의 제후들도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
땅의 권력자들도 하나님의 것.
주님은 만유 위에 우뚝 솟으신 분.
(메시지 번역 약간 수정)

// 우리 왕이신 분께 노래하자! 찬양을 드리자!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왕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땅을 /하나님 나라를) 받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노래하게 된다. 찬양을 드리게 된다. 찬양의 선순환이다. 노래를 부를 수록, 찬양을 드릴 수록, 최고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 시인은 찬양의 이유를 분명히 밝힌다(2,9절). 하나님은 지존자시다. 하나님은 지존하시다. 하늘 보좌에 오르신 분은 시인의 주님만이 아니라, 나의 주님, 나의 왕, 우리의 왕이시다. 아니 세상 모든 통치자들의 왕이시다. 시인은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시니 지혜의 시로/정성을 다하여/최고의 노래로 찬양하여라 라고 명령한다. 찬양중의 찬양은 순종이 아닐까 한다.

시편 46 읽기

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힘.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 >> 우리는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져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쓰나미가오고 지진이 나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4-7 오, 강이여! (시인이 ‘강’이라고 부르는 화자는 누굴까?) 강 줄기들은 하나님의 성을 즐겁게 한다. 가장 높으신 분이신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를 즐겁게 한다. 강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 안으로 흐른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성 안으로 흐르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강 줄기들은 새벽부터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다. 세상 민족들과 나라들은 하나님이 호령하시면 흔들리지만, 하나님을 피난처, 힘, 구원자로 부르며 하나님과 함께 있는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8-11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주님의 놀라운 능력. 전쟁을 그치게 하시고 땅 끝까지 평화를 주시는 주님, 이 주님이 하나님인 줄 알라고 노래한다. 하나님은 뭇나라로부터, 이 땅에서 높임을 받는다. 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시다.

// 흐르는 강을 역사라고 생각한다면, 시인은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노래한다. 역사를 세상 민족들과 나라들이 이끌어 가는 것 같지만, 세상 민족들과 나라들이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언약과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 나라의 언약과 구원의 사건들에 참여하는 성도가 하나님을 즐겁게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언약과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도록 새벽부터 도우신다. 신실한 성도를 통해 언약과 구원의 역사가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내신다. 임마누엘!

// 너희는 잠깐 손을 멈추고! 시인은 쉬임없이 흐르는 강에게, 지금 어디를 흐르고 있는지 잠시 멈추고 둘러보라고 노래한다. 4-7절에서 노래하듯, 하나님의 동산에서 흐르고 있음을 알라고 하신다. 빨리 빨리 빨리를 외치는 세상 조류에 휩쓸리지 말라고 노래한다. 세상은 나의/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알라고 노래한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힘이요,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시다. 임마누엘!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직은 저 높은 곳이 아니다. 이 땅이요, 여전히 피난처다. 그러나 임마누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곳/것이다. 성도는 혼자가 아니라 ‘우리’다.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질 이유가 없다. 함께 가는 우리/성도가 있다. 때로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

시편 45 읽기

용사여! 딸이여! 새번역은 임금님과 왕후님으로 번역한다.시의 내용은 결혼식 주례사 같기도 하고, 친구들이 신랑신부를 위해 부르는 결혼 축가 같기도 하다. 신랑이 누구인지, 신부가 누구인지,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시인은 용사와 딸의 결혼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억하며 찬양한다. 시인은 자신의 찬양을 듣는 사람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노래한다.

누가복음 17:11-19 읽기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셨다.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다가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나셨다. 그들은 (차마 예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 가서,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한 명 밖에 없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1 당시 나병환자들은 불가촉 천민이었다. 마을 안에 살지 못했다. 이들은 마을로 들어가시는 예수를 멀리서 불러야 했다. 예수께서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들의 호출에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가라고 했던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았다는 믿음으로 제사장(들)에게 출발했다. 가는 도중 정말 자신들이 나았다는 것을 알았다.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적어도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에게 직행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께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 예수께서는 다른 아홉은 어디있느냐 하시며 사라리아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2 열 명의 나병환자들. 불가촉 천민들. 이들에게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구별이 없었을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으로 서로 미워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치였다. 무리를 지어 힘을 키우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날라오는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공동운명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께 하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제사장(들)을 향해 달려가다가 나음을 입었다. 드디어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회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유대인 나병환자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조금 전까지 함께 했던 사마리아 /나/병/환자를 /사/마/리/아/인/으로 보기 시작했다. 더이상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어쩌면 돌아가서 자기 몸을 보여 줄 제사장이 없었을 수도 있다. 유대인 제사장에게 자신은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께 와서 깨끗해진 몸을 보여드릴 수 밖에 없었다. 예수가 영원한 대제사장 되심을 믿을 수 밖에 없었던 사마리아인은 구원을 받았다.

//3 하나님 나라는 어린 양과 사자가 함께 노는 나라다. 어린 양도 살고 사자도 살지만 각각 따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함께 사는 나라다. 더불어 사는 나라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이유는 더불어 살기 때문이다. (아니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이유는 더불어 살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차별이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들은 고침을 받는 순간 자신들의 삶을 살러 갔을 것이다. 함께 /멀/리/서라도 예수를 불러야 했던 간절함이 사라졌다. 나병환자 시절의 동고동락이 깨어졌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 앞에 /가/까/이/ 나와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 나라는 성도가 삼위 하나님 앞에 나와 더불어 사는 나라다.

누가복음 17:1-10 읽기

1-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일으키는 사람은 화가 있다.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믿음의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하오’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라]

5-6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주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7-1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 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종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 작은 사람들을 실족 시키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데 실족과 용서를 연결시킨다. 작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용서를 받으러 나오는데 용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일백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를 돌보지 않은 비유가 떠오른다. 용서는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특별히 작은 자, 사회적 약자, 가난한 자들에게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이 용서라고 하시는데, 심지어 착취까지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ㅠㅠ

// 사도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아마도 일흔번 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주께서는 믿음의 크기, 믿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유무가 중요하다고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믿음이 있다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누구냐고 하시는 것 같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믿음을 빚을 탕감받은 종의 행실로 풀어낸다. 종은 주인이 명령한 대로 행하는 존재다. 종이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행하였다고 주인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은 할지언정) 종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주인의 입장에선 무익한 종이다. ‘무익한/ 쓸데 없는’ 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25장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을 무익한 종이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다. 그러니 10절 하반절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종의 고백은 ‘우리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김을 받아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어야 마땅한 그 무익한 종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빚을 탕감 받았으니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결초보은) 하는 것입니다.’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 용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도 용서다. 성도는 일만 달라트 용서 받은 자다. 그러니 누구라도 용서해야 한다. 성도에게 이미 주신 ‘그’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