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40-56 읽기

40-42 예수께서 (거라사로부터) 돌아오시니, 예수를 기다리던 무리는 예수를 환영했다. 그때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간청했다. 야이로의 열두 살쯤 된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데, 무리가 예수를 밀어댔다.

43-48 예수를 밀어대는 무리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다. (열두해 동안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고치지 못했다.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곧 출혈이 그쳤다. 예수께서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라고 물으셨다. 아무도 시인하지 않자, 베드로가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누군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떨면서 예수께 엎드려서, 예수께 손을 댄 이유와 자신이 낫게 된 경위를 모든 사람 앞에 고백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라고 말씀하셨다.

49-56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으니 더이상 예수를 괴롭히지 말라고 전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회당장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딸이 나을 것이다.’ 야이로의 집에 이르러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아이에게로 들어가니, 집안 사람들은 모두 울며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울지 말아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음을 알았기에 예수를 비웃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아이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이의 영이 돌아와서, 아이가 곧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을 아이에게 주라고 지시하셨다. 아이의 부모는 놀랐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다.

//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은 이방인 백부장이나 유대 회당장이나 차이가 없다. 다만 이방인 백부장과 달리 회당장은 직접 예수께 나아왔다. 백부장은 예수와의 물리적 동행은 없었지만 예수의 권위에 순종하는 큰 믿음을 보여주었다면 회당장은 끝까지 예수와 물리적 동행을 하는 믿음을 보여준다. 믿음은 크고 작냐보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예수의 치유집회 소식을 듣고 나왔는데, 회당장이 나타나 예수를 데리고 가니 그 마음이 어땠을까?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그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서라도 낫고자 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른다. 그 여자는 믿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곧 믿음대로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다.

// 집으로 가는 길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회당장은 죽은 딸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딸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와 끝까지 동행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딸의 죽음을 확인한 집안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아직 딸의 죽음을 직접보지 못한 야이로와 달리 그들은 확실하게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예수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죽을 병이나 죽음이나 무슨 차이가 있으랴!

// 12년전, 야이로의 집에는 딸이 태어나는 기쁨이 있었다. 그러나 한 여자에게는 혈루증이 시작되는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기쁨과 아픔은 부침이 있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것은 예수와의 동행이다. ‘예수 믿음’이 있어도 인생에서는 희노애락의 부침을 겪는다. 그러나 ‘예수 믿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한다.        

누가복음 8:26-39 읽기

26-31 예수 일행이 탄 배는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도착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오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을 떠나,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예수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말했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 나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이었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로 묶어서 감시했으나, 그는 쇠사슬을 끊고 귀신에게 이끌려 광야로 뛰쳐나가곤 했다.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물으셨다. 그가 “군대”라고 대답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했다.

32-39 마침 산기슭에 큰 돼지 떼가 방목 중이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했다. 예수께서 허락하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목격한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에 가서 알렸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예수께로 왔다. 사람들은 귀신들이 나가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도 두려워하였다.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지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거라사 주위의 주민들은 모두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되돌아 가시기로 하셨다. 귀신이 나간 그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 하라고 명하셨다. 그 사람이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에 알렸다.

// 예수!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바람과 물이 예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는 것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도착한 거라사 지방. 이곳에서 예수는 불순종이, 곧 믿음없음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보여준다.

// 귀신들! 귀신들린 한 사람을 묘사하면서, 누가는 ‘귀신’을 ‘악한 귀신’ 곧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귀신, 곧 ‘더러운 영’이 불순종의 영이다.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귀신들은 사람에게 들어가 사람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도하신 것이다. 귀신들은 어쩔 수 없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해야 했다. 악한 귀신들이 모른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연세계는 (바람과 물은) 예수께 즉시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돼지들도 (동물의 세계도) 창조주께 즉시 순종했을 것이다. 돼지들은 악한 귀신에 사로잡히기 보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을 택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작은 사람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큰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가르치신다. 실족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것들을 빼어버리고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하신다. 더러운 영들은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했지만, 자신들이 이미 지옥에 살고 있다는 것을, 곧 무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런 악한 귀신들이 들어온 돼지 떼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물에 빠져 죽는 것 외에는 달리 없었을 것이다. 어찌 더러운 영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그냥 둘 수 있으랴.

// 악한 귀신에 시달리지 않았던 거라사 지방 주민들!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동안 귀신들린 사람이 자신들 대신 모든 악한 귀신들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쩌면 마을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신사’였던 셈이다.) 돼지 떼의 죽음은 경제적으로 큰 손실인 것은 분명하나, 더러운 영들을 대신 담당해 줄 사람이 (귀신들을 모신 ‘신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마을을 떠나가시길 간청했다. 그렇다고 베드로처럼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한 것도 아니었다. 베드로와 달리 예수를 주인으로 (주님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서와 같이 환영받지 못한 거라사를 떠나시기로 하셨다.

// 귀신 들렸던 사람! 귀신이 나가자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을 찾은 그는, 거라사 주민들과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라는 바울의 표현이 딱 맞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그가 속한 마을로 (집으로) 파송하셨다. 누가는 그에게 제정신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그는 고향 읍내에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전했다. ‘사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온전한 영을 가져야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된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떠나시는 예수와 물리적으로 동행하지 못했으나, 예수의 영과 동행했다. 성도들도 하늘 보좌 우편의 예수와 물리적으로 동행하지 못하나 예수의 영, 보혜사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

누가복음 8:16-25 읽기

16-18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아래 놓는 사람은 없다. 등경 위에 올려 놓아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 빛은 숨은 것을 드러내고, 감추인 것을 환희 나타낸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로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기기 때문이다.

19-21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로 왔으나 무리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고 전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22-25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배에서 잠이 드셨다. 그런데 사나운 바람이 호수로 불어왔다. 배에 물이 찼을 정도로 배가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고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어나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꾸짖으셨다. 바람과 물결이 곧 그치고 잔잔해졌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제자들은 두려웠고 놀랐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을 호령하니, 바람과 물조차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 등불을 켠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아무도 행할 생각이 없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준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말씀의 숨은 뜻, 감추인 의미을 환희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말씀이 삶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더 경험하게 될 것이요, 말씀을 듣기만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들은 말씀마져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16-18)

//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가족이 갖는 특징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족, 곧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누가가 예수의 족보를 하나님께까지 올린이유다.  (19-21)

// 바람과 물은 통제되지 않고 임의로 (소위 자연법칙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즉시 순종한다.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지만 여전히 말씀을 배우는 자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훈련을 받는 중이다.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라는 질문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물처럼 말씀을 듣고 즉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가 (제자들이 절대 순종해야 할) 창조주 하나님이심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누가복음 8:1-15 읽기

1-4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했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했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여러 고을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께 나아오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5-8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 발에 밟히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기도 하였다. 더러는 돌짝 밭에 떨어져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아 없어서 말라 버렸다.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가시덤불과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 백백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고 외치셨다.

9-10 제자들이 이 비유가 무엇인지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운을 떼시고 제자들에게는 비유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11-15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길가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돌짝밭에 떨어진 것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예수와 동행한 여자들. 누가는 많은 중에 세명은 이름까지 밝힌다. 열두 제자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여자들은 ‘섬기는 자’로 동행했다. 굳이 비교한다면, 사도는 자신의 소유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일하는 자들이라면, ‘섬기는 자’는 자신의 소유를 주님께 드려 일하는 자들이었다. 자신의 소유를 버리든, 자신의 소유를 주님께 드리든 천국을 산 사람들이다. 남녀의 차별이 없다.

// 씨뿌리는 비유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 ‘씨뿌리는 자’를 농부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농부라면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엔는 굳이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다. 좋은 땅을 골라 뿌려야 농부라고 할 수 있다. 이천 년 전 예수 때는 어땠을까? 하여간 촛점은 씨뿌리는 자가 자기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가도 씨는 길가에도 돌짝밭에도 가시덤불에도 좋은 땅에도 떨어진다. 뿌려진다가 아니다. 다시말해 길가든 돌짝밭이든 가시덤불이든 좋은 땅이든 어느 곳도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기 위한 자기 밭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씨는 그런 곳에도 떨어진다. 그리고 씨가 떨어진 곳이 좋은 땅인지 아닌지는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 결국 좋은 땅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예수와 동행하는 제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지만 동행하는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친히 설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길가도 돌짝밭도 가시덤불도 아니다. 좋은 땅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들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하기를 기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열매를 기대하신다. 결국 제자들에게 너희가 좋은 땅이라고 가르치시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길가가, 돌짝밭이, 가시덤불이 스스로 노력한다고 좋은 땅이 되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 동행함이 좋은 땅이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갈고 닦는다고 좋은 땅이 되지 않는다. 임마누엘뿐이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았다면, 지금은 비록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굳게 간직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인내하면, 그 말씀은 나를 통해 열매를 맺을 것이다.

누가복음 7:36-50 읽기

36-40 바리새파 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예수께서 식사하시는 것을 알고,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등 뒤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 털로 예수의 발을 닦고,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바리새파 주인은 이것을 보고 혼자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며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라고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바리새파 사람의 이름이 베드로의 이름과 같다. 흔한 이름이었다는 증거다)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시몬은 예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면 말씀하시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41-48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었다. 돈놀이꾼은 둘의 빚을 모두 없애주었다. 그러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돈놀이꾼을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시몬의 판단이 옳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뒤에 있는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기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여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셨다.

49-50 상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렸다. “이 사람이 누구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라고 말씀하셨다.

//  사랑과 용서. 용서와 사랑.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가르치신다. 사랑하고 용서하라.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런데 우리는 용서 받아야 사랑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사랑 받아야 용서하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분명 향유 옥합을 깨뜨린 죄인인 여자는 주님을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마치 오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받는 사람처럼 많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랑=용서’라고 적용했었다.  사랑은 용서다. 용서는 사랑이다. 예수께 사랑받는 것이 곧 예수께 용서를 받는 것이요, 주님께 용서 받는 것이 곧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은 양방향이다.)

// 이것은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향한 성도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랑해야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사랑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죄인인데!’ 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십 데나리온 빚을 탕감받은 바리새인이 된다. 아니 스스로를 정죄하는 꼴이다. 주님은 오백 데나리온, 오십 데나리온 빚을 진자를 모두 탕감해 주신다. 오십 빚을 졌다고 더 의롭다고, 오백 빚진자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며 오산이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차이도 주님 앞에서는 오십보백보가 아니던가.

// 나의 자리에 주님을 초대했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내 편에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내가 주인(공)이 되려는 것이다. 바리새인처럼 조연의 역할마저 여인에게 빼앗기게 된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초대한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주님 편에 나아가 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