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1-24

주와 합하는 자는 (주와) 한 영이니 음행을 피하라고 교훈한 바울은 구체적으로 남녀관계에 대하여 적용한다. 첫번째가 결혼이라는 관계가 남여간에 음행을 피하는 가장 좋은 제도라고 가르친다. 부부가 서로에게 의무를 다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분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떨어져 있으면 절제하지 못하고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기 쉽다고 한다. 바울은 이것을 음행을 피하기 위한 부부관계에 대한 적용이지 명령은 아니라고 편지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사람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르다고 적용한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현재 남편이 없으면 독신으로 (비혼으로) 지내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한다. 다만 앞서 말한대로 절제하지 못한다면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교훈한다.

이미 결혼했다면 이혼하지 말고, 이혼했다면 원래 남편과 (혹은 아내와) 화합하든지 이혼한 상태로 지내라고 권면한다. 심지어 불신 아내나 불신 남편도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불신 남편과 불신 아내가 성도인 아내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만약 불신 남편과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을 허락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화평중에 부부관계를 맺게 하셨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불신의 남편과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느냐고 한다.

바울은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모든 교회에 명령한다. 육신적 할례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명령한다. 신분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종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자유인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적용한다. 더이상 세상가치를 따르는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명령한다.

>>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것보다 더 상위법은 없다.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요구하는 계명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 곧 임마누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다양하다. 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잣대에 나를 순종시키고 하나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라고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인정한다. 다만 하나님 안에서의 통일성, 곧 부르심에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듭 명령한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 곧 임마누엘이다. 음행을 피하는 삶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정결한 삶이다.

고린도전서 6:12-20

바울은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죄에서 씻음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했다. 불의한 자였지만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이렇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다고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또 모든 것이 가하다고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오직 주를 위하여 있고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뜻한다. 성도들의 공동체를 뜻한다. 머리되신 주께서도 몸된 교회를 위해 계신다. 개인적이기보다 공동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편지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도 고린도교회 성도공동체를 뜻한다. 성도 각자 각자도 그리스도의 지체지만 각각의 교회공동체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 성도 각자각자가 범죄하면 안되듯이 지교회 공동체도 범죄하면 안된다. 교회를 창녀처럼 만들어서는 안된다. 바울은 교회공동체가 정결하고 거룩해야 한다고 이미 말했다. 창녀와 합하면 창녀와 한 몸이 된다. 당연히 주와 합하면 주와 한 몸이 된다. 물리적으로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지만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라고 표현한다. 주님과 합하기 위해서 바울은

음행을 피하라고 명령한다. 음행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하여금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인 줄 알라고 말한다. 주와 합하였으면 우리는우리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주께서 값을 치르고 성도들을 사셨다고 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곧 교회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한다.

>>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와 합하는 것을 맛볼 수 있는 곳이 결국은 교회공동체다.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듯이 같은 말/마음/뜻으로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각자를 위하여 분쟁과 음행을 버리고 공동체를 위하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성도는 배만 부르면 된다는  우리의 낮은 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지체로 사는 사람들이다. 오직 주의 몸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6:1-11

바울은 분쟁/분파, 음행에서 재판소송 문제로 넘어간다. 바울은 다툼이 있을 때 왜 성도 앞에서, 곧 교회의 판결을 구하지 않고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느냐고 묻는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종말에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심판할 성도라면 이세상에서의 작은 일 정도는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가르친다. 성도는 천사도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현실은 일상의 작은 문제들에 대한 송사가 있을 때 세상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울은 형제간의 일들을 판단할 지혜가 없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형제간의 문제를 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가져가느냐고 따진다. 형제간에 피차 고발하는 것 자체가 허물이라고 지적한다. 형제간에 서로 소송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에 실패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불의를 당하지 않으려고 또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 도리어 형제에게 불의를 행하고 형제에게 피해를 주고 형제를 속이게 된다고 꼬집는다.

바울은 불의를 당하지 않기위해 불의를 행한다면 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불의, 의롭지 못한 행동을 나열한다. 음란, 우상숭배, 간음, 동성 연애, 도둑질, 탐욕, 술취함,  모욕, 사기를 일삼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한다. 바울은 고리도교회 성도들도 이런 자들이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죄에서 씻음을 받고 거룩하게 되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자들임을 알라고 한다.

>> 바울은 (어제) 음행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교회 밖 사람들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교회내에 있는 악행을 내쫓으라고, 곧 교회 내의 정결이 우선이라고 교훈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불의, 곧 의롭지 못한 음란 우상숭배 간음 동성애 도둑질 탐욕 술취함 모욕 사기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교회내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세상 일을 판단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런 자들이었지만 죄씻음을 받았듯이 (교회내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나는 깨끗하니 너를 심판한다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았으니 너도 용서 받을 수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 어떻게? 형제들이 서로 송사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길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5:1-13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 교회공동체를 해치는 분쟁을 지적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두번째? 문제를 제기한다.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말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음행을 교회공동체가 통한히 여기지 않고 음행한 자를 쫓아내지 않은 교만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단순히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우주적 교회의 문제라고,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떠나 있지만 영적으로는 한 몸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짓을 한 사람을 정죄한다. 영적인 공동체가 이런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주어 육적인 죄성을 멸망시켜 주의 날에 그의 영혼은 구원받도록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받는다. 음. 영적인 교회공동체라면 이런 자는 사탄에게 내어주어 교회공동체내에 있는 육적인 성품을 멸절시켜야 영적인 교회공동체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는다로 이해하면  될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적용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람을 실족케 하느니 연자맺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고, 손이나 발이나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범죄하게 하는 손/발/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범죄하게 하는 손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구절의 적용일까?)

바울은 영적이어야 할 교회공동체에 있는 이런 자는 경계해야 할 누룩이라고 지적한다. 고린도교회가 영적인 공동체라고 자랑한다고 해도 이런 자들이 있다면 결국 온 교회 공동체가 육적인 공동체가 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에 있는 누룩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묵은 누룩, 악한 누룩을 제거하고 순전함과 진실한 공동체가 되라고 편지한다.

바울은 심지어 음행하는 자들은 사귀지 말라고 (먼저 쓴 편지에) 경고했었다. 교회내 음행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고 교회밖 음행은 사귀지 말아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 탐하는 자들, 거짓된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고 한다. 세상에서 나와 따로 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교회 공동체 내에 있는 형제가 음행, 탐욕, 우상숭배, 모욕, 술취함, 거짓을 하거든 그런 자들과 사귀지도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 내에서는 이런 일을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교회는 교회내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라고 한다. 그러나 교회공동체 내에 있는 악한 사람은 교회공동체가 알아서 내쫓아야 한다.

>>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교회 내에 있는 악행은 침묵하고, 교회 밖의 악행에 대해서는 검뎅이가 묻을까봐 닥달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들의 악한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교회 내에 있는 악행은 내쫓으라고 가르친다. 성도들은 교회 내의 정결을 우선시 해야 한다. 사회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결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4:6-21

>> 한국에서 둘째날 아침. 아니 오후. 온라인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고. 매일성경 본문을 펴다.

바울은 아볼로와 함께 보인 본을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라고 한다. 바울은 아볼로와 나뉘어 분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처럼 서로 대적하거나 서로에 대하여 교만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앞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을 교회내의 분쟁이라고 적용하지 않았던가. 분쟁의 이유를 교만이라고 지적한다.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왕이 되고자 하는 왕노릇하고자 하는 교만이라고 지적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도인, 곧 가르치는 자로 부르신 바울과 아볼로를 낮은 자의 위치에 두셨다고 고백한다.  끄트머리 두셨다고 한다. 끄트머리는 가장 낮은,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사역자들은 결코 큰 자,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하게 되어 성도들을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세워가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아마도 아볼로와) 주리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수고하고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하지만 축복하는 자들이고, 박해를 참는 자들이고, 비방을 받지만 권면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세상 가치 기준으로는 더럽고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한다.

사역자들은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듯 성도들을 사랑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가르치는 스승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아비가 되어야 한다. 아비가 되어 본을 보여야 한다. 바울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디모데를 보낸다. 아비의 심정으로 보낸다. 디모데를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이라고 부르며 보낸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올 일이 없다고 교만스럽게 말을 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바울 자신이 다시 방문하겠다고 편지한다. 바울은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말로 따지지 않고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본을 보이겠다고 편지한다. 야단치러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온유한 마음의 본을 보이겠다고 편지한다.

>> 사역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바울이 말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어도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말이 아닌 능력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역사에도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의 목회자들은 어떤가?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큰 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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