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9

1-3하늘에는 주님의 영광이 가득, 창공에는 주님의 작품이 가득하네. 해가 낮에게 달이 밤에게, 말하지 않아도 표현 다 못해도 찬양이 충만하고 말씀이 가득하네

4-6하나님이 해를 하늘에 다시니 해는 새신랑 같이 동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달리네. 해는 의인과 악인에게 따사로운 햇빛을 안기네.

7-10완전하고 확실한 주님의 법은 영혼을 소생시키며, 어리석은 자로 지혜롭게 하네. 정직하고 순결한  주님의 교훈은 마음을 기쁘게 하며, 사람의 눈을 밝혀주네. 정결하고 진실한 주님의 길은 영원하고 의롭네. 순금보다 더 좋고 꿀보다 더 다네.

11-13 깨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큰 상이 주어지네. 자기 허물을 깨닫고 은혜로 허물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네. 고의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상이 없다네. 그러니 죄를 짓지 않도록 기도하네. 정직하게 행하면 큰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네.

14 주님이 반석이시요, 구속자시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네.

>>  시인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주님의 영광을 주님의 작품을 본다. 주님이 지은신 것을 통해 주님의 법을 본다. 주님이 지은신 해가 창조질서에 따라 순종하는 것을 본다. 해, 곧 태양은 순종의 대명사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라는 전도자의 말처럼 챗바퀴 돌듯 반복만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해는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하는 피조물의 대명사다.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태양이 기브온 위에 머물게 하셨고,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십도 뒷걸음질 치게 하셨다. 해는 창조이래 딱 두번 (우리가 아는 한) 주님께 순종하여 자기의 일상을 멈추었다. 시인은 눈을 들어 순종의 피조세계를 본다.

>> 시인이 진정 노래하는 것은 마지막 구절이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고 나의 마음이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바라네.” 다시말하면 시인은 주께 아신 바 됨을 바라는 것이다. 시인이 주를 알아가는 것보다 주님이 시인을 알아주시길 바라는 노래다. 물론 주님을 알지 못한다면 주님이 알아봐 주시길 바라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시인은 일탈을 꿈꾸기보다 일상에서 주님과의 사귐을 꿈꾼다. 일탈보다 주님의 기이한 일, 곧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꿈꾼다.

시편 18:30-52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 하나님의 길은 탄탄대로다. 장애물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원수들이 쳐놓은 올무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결코 무너지지 않는 길이다.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니 // 순수하다는 것은 쓸데없는 말이 없다는 뜻이다. 도가니에서 단련된 금과 은처럼 불순물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버릴 말씀이 없다는 뜻이다.

주하나님에게 피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어주신다. 반석이 되어주신다. 시인과 이인삼각으로 경주해 주신다. 박자에 맞춰 달려 경주에서 등수에 들게 해 주신다. 무거운 놋활도 능히 당길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신다. 무찌를 수있는 힘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막아낼 수 있는 힘도 주신다. 주의 오른손과 주의 온유함이 시인을 크게하신다. 시인이 실족하지 않도록 디딜 곳을 넓게 하신다. 원수를 뒤쫓아가 망하게 하신다. 원수들을 쳐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게 하신다.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다. 원수들이 결국 시인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하게 하신다. 원수들이 부르짖어도 구원할 자가 없게 하신다. 당연히 주님은 원수들의 부르짖음에는 대답하지 않으신다. 원수들은 바람 앞의 티끌이요 쏟아진 진흙에 불과하다. 주께서 시인을 마침내 열국의 으뜸으로 삼으시고 시인이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시인을 섬기게 될 것이다. 시인의 소문만 듣고 이방인들이 시인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방자손들은 쇠잔할 것이다.

시인은 살아계신 주님을, 반석이신 주님을 찬송한다. 구원의 하나님을 높인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노래한다. 구원자, 나를 높이시는 자,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는 자가 바로 주하나님이시라고 감사 찬송한다.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다윗과 다윗의 후손에게 왕으로 기름부으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영원토록 구원하신다고 노래한다.

>> 참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도와주시면, 나는 날쌔게 내달려서 적군도 뒤쫓을 수 있으며, 높은 성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29).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흠도 없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티도 없다. 주님께로 피하여 오는 사람에게 방패가 되어 주신다(30). 오늘은 쉬어가자.

시편 18:16-29

터가 무너진 세상에서 주님은 시인에게 손을 내밀어 시인을 건져내셨다. 시인은 원수들이 강하고 시인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시인이 원수들에 의해 망해갈 때, 시인에게는 의지할 주님이 계셨다. 주님은 시인을 넓은 곳으로 (원수들로 에워싸임을 당하지 않는 곳으로) 인도하시고 시인이 기뻐할 수 있도록 시인을 구원해 주셨다.

시인은 자신이 주께 의지하여 주의 구원을 받은 이유를, 시인이 바른 마음으로 정직한 마음으로 산 것에 대한 주님의 상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이 주님의 도를 지키고 악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여전히 주님의 규례를 지키고 주님의 율례를 따른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주님 앞에서 완전하려고, 죄악에 빠지지 않으려 자신을 지켰다고 노래한다. (시인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시인은 계속해서 주하나님께서 시인의 의를 따라, 곧 시인이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자비로운 자에게 주의 자비로움을, 완전한 자에게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는 주님을 노래한다. 깨끗한 자에게 주의 깨끗하심을, 그러나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는 주님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사람을 두그룹으로 나눈다. 의인과 악인을 곤고한 백성과 교만한 눈으로 나눈다. ‘곤고한 백성’에서 강조되는 것은 ‘백성’이다. 주님의 양이다. 주님의 음성을 아는 양들이다. 의인의 회중에 포함된 자들이다. 교만한 눈은 반대로 사악한 자들이다.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망할 자들이다. 주께서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갈림길에서 시인으로 하여금 어느길이 의인의 길인지 등불을 켜서 보여주신다. 시인은 주를 의지하여 의인의 길을 향해 달린다. 원수들이 적군들이 쌓아놓은 담을 뛰어넘어 의인의 경주를 한다.

>> 터가 무너진 세상에서 시인이 살아가는 방법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 뿐이다. 행한대로 갚으시는 공평하신 주님께 의지하는 것 뿐이다. 주님의 도를 지키고 주님의 규례와 율례를 버리지 말고, 오른쪽에 주님을 좌우명으로 모시고 자비로운 자, 완전한 자, 깨끗한 자가 되라고 하신다.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 사악하고 교만한 눈을 가진 자로 살아가면 망한다.

>> 성도의 삶은 장애물경주다. 터가 무너진 세상에 생긴 각종 장애물을 통과해야 한다. 장애물을 통과하기 싫다고 (사악하고 교만한 눈을 가지고) 피하면 반칙이요 실격이다. 경기규칙을 지키면서 달려야 한다. 그물망도 통과해야 하고 쌀포대에 들어가 뛰어야 한다. 힘든 경주다. 그러나 주님이 등불이 되어주신다. 신호등이 되어주신다. 갈 때와 멈출 때를 알려주신다. 주와 함께 하는 이인삼각의 경주를 달리라고 하신다. (그렇다 시인의 자신감은 주님의 말씀에 한 쪽 다리를 묶고 뛰기 때문이다.)

시편 18:1-15

[시편 18편의 표제는 길다.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시인은 주의 자비를 입었다고 노래한다. 주께서 도우셨다고 노래한다. 주하나님이 시인의 반석, 요새, 구원자, 하나님, 피난처,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구원자 주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시인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한다.

시인은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두려움에 빠졌었다. 그러나 시인이 주하나님께 기도하자 주하나님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으셨다. 주하나님께서는 터가 무너진 세상을 진노로 흔드신다. 시인은 주하나님의 진노를 환상 가운데 본다. 시인은 주께서 진노하심으로 터가 무너졌음을 드러내셨다고 노래한다.

>> 시인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는 능동적인 고백은, 어쩌면 ‘주의 사랑을 (자비를) 내가 받았사오니 주님만이 나의 도움이십니다’라는 피동적 고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 11편에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고 시인은 노래했었다. 시인의 답은 주께 피하는것이 었다. 주께 피해 도움을 청하고 계속해서 바른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노래했었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주님만이 도우심이다. 주께 부르짖을 수 밖에 없다. 주께서는 진노하심으로 세상 질서가, 터가 무너졌음을 발가벗기신다. 시인은 터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15절에서 짤렸다. 내일은 무엇을 노래할까?  터가 무너진 곳에서 마음이 바른자는 어떻게 살며,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에게 어떻게 행하실지 노래하지 않을까?

>> 주님은 시인을 원수에게서 건져내신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을 물에서 건져내어 뭍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광풍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것처럼 원수를 치심으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 이 시대의 조류를 잠잠케 하심으로) 시인을 지켜주신다. 우리 성도들이 세상 조류를 거슬러 헤엄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성도를 향한 주님의 자비하심이다.

 

시편 17

주님 의의 호소를 들어주세요. 시인은 자신의 울부짖음을 주의깊게 들어달라고 기도한다. 시인의 기도는 거짓되지 않으니 제발 귀를 기울여 달라고 주께 호소한다. // 시인을 통해 거짓된 기도가 있다는 것이요, 주께서 거짓된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시인은 자신에 차있다. (시인이 주님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의 심판대에 나아가 공평하신 주님의 심판을 받고자 한다. 시인은 이미 주님의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한 것처럼 앞으로도 거짓증언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시인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세상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따라 포악한 자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주께서 명하신 말씀에서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고 주의 길을 굳게 지켰다고 한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주께 나와 기도하니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한다.

시인의 자신을 치는 원수에게서 건져달라고 호소한다. 주님의 눈동자처럼 지켜달라고 주의 날개 아래 품어달라고 기도한다. 악인들과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시인의 정직함과 달리 악인들과 원수들은 권모술수가 기름처럼 번지르르하다고 고발한다. 주님의 길을 걷는 시인을 넘어뜨리려고 애워싸고 지켜보는 자들이라고 고발한다. 사냥한 먹잇감을 찢으려는 사자요, 먹잇감을 사냥하려고 은밀하게 숨은 사자 같다고 고발한다. 시인은 주하나님께 주의 칼로(심판으로) 시인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이 세상을 따르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재물로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자녀로 만족하고 자기 자녀들에게만 상속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시인은 의로운 중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행하다가) 주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노래한다.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겠다고 다짐한다.

>>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언제든지 찾아가 조를 수 있는 재판장이시다. 16편 시인처럼 하나님나라에서 땅을 분양받은 자들이 부르는 노래다. 호소/기도는 하늘 아버지께 조르는 것이다. 아버지를 신뢰하기 때문에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따른 투정이 아니다. 이세대를 본받지 않고 아버지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망을 담은 기도다.

>>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뵈옵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시인이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노래하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대로 정직하게 살겠다는 다짐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것이 최고의 복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결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