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1:1-11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다. // 하박국이 누구인지 어느 왕 때인지 언급이 없다. 하박국서는 하박국이란 이름이 뜻하는대로 하나님께 매달리어 받아낸 하나님의 뜻을 풀어간다.

2-4 하박국은 주께 부르짖는다. ‘어느 때까지 듣지 않으실 겁니까?’ 라며 주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린다. 하박국은 강포함을 당하고 있다. 하박국이 둘러보니 죄악투성이다. 겁탈과 강포가 변론과 분쟁이 곳곳에 있다. 분명히 율법의 가르침이 있건만,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한다고 고발한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서 정의가 굽게 행하여 진다고 부르짖는다.

5-11 주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답하신다. 주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세상 나라들을 보고 놀라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 (바벨론)을 일으켜 온 땅을 점령하는 것을 보라고 하신다. 바벨론이 여러나라의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들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그땅을 모두 점령할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갈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갈대아 사람들을 자신들에게서 모든 힘이 나온다고 믿고 자신들의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하신다. 자기들의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는 것 역시 범죄행위라고 지적하신다.

// 동문서답이 아닌가? 하박국은 이 땅에 정의가 없다고 한탄하는데 주님은 세상은 어차피  ‘약육강식’이라고 답하시는 것 같다. 하박국이 있는 땅에만 정의가 굽게 행하는 줄 아느냐, 온 세상이 약육강식이 아니더냐 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약육강식의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세상에서는 강한 것도 영원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서 여러 나라를 점령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영원할 것 같은 강대국들도 갈대아 사람들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보면서 (강식하던 자들이 약육이 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을 모르는 갈대아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는 범죄를 행하고 만다. 하나님께 따져 묻는 하박국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겁탈과 강포와 별론과 분쟁이 가득한 곳에 더 강폭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불러오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삼는 갈대아 사람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며, 심지어 사람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단 말인가?

>> 동문서답이 아니라면 // 하박국은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는 것은 악인이 (갈대아 사람들이) 의인을 (이스라엘 백성을, 예루살렘을) 에워쌌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 고발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예루살렘을 치기위해 갈대아 사람을 보내셨다고 답하신 것이다. 갈대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이스라엘이 정의를 굽게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물론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갈대아 사람들도 결국은 지나쳐 범죄할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강식하지만 언젠가는 약육이 될 것임을 암시하신다.

>>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대로 바벨론에게 순순히 항복했으면 겁탈과 강포가 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서를 읽으면 이스라엘에는 (남 유다는) 이미 정의가 굽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기에 정의가 굽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굽어진 정의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이키라고 하신다. 약육강식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강과 약이 함께 먹고 마시는 사회가 되도록 성도들이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성도들이 강식하게 해달라고 부르짖어서는 안된다.

시편 23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 내게 상을 베푸시고 / 기름으로 내머리에 바르셨으니 / 내잔이 넘치나이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 인자하심이 / 정녕 나를 따르리니 / 내가 여호와에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 /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 인도하시는 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나와 함께하심이라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 나를 안위하시는도다.

대학 때 목이 터져라 불러 재꼈던  5절부터 시작하는 시편23편 찬양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곡조를 다시 듣기 어려웠는데, 오늘 본문을 앞두고 유튜브를 검색하니 하나 나온다. 권희철 작곡 심이레 편곡으로 홍콩엘림교회호산나 찬양대의 노래가 뜬다. 편곡으로 첨가된 부분이 있으나 대학때의 곡조가 반갑기 그지없다.

작곡자는 5절부터 노래를 시작한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 시인은 하나님께서 차려주시는 밥상을 받는다. 예수님은 깨어 있는 종이 복되다 하시며, 주인이 와서 종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주인이 종들에게) 수종들리라 라고 말씀하셨다.(눅12:37) 그리고 잡히시기 전,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주인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드는 것을 친히 실천해 보이셨다. 이것이 주님이 차려주시는 밥상이다. 그리고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기름부음을 받는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하셨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소망을 노래한다.

시인은 주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목자라고 노래한다. 선한 목자의 돌봄을 받는 어린양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부족함이 없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한다는 의미다. 부귀영화가 주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풍성하다는 뜻도 아니다. 시인은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에 만족한다. 초가삼간도 만족한다는 찬송그대로다.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된 것만으로 (영혼이 소생한 것만으로), 그래서 선한 목자가  인도하는 의의 길을 따라갈 수 있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시인은 심지어 선한 목자가 인도하는 길이 사망의 음친한 골짜기라도 닥쳐올 어려움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선한 목자가 함께하셔서 자신을 지켜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의의 길에 끝에 하나님나라가 있다. 아니 이미 의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시인의 노래를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라고 적용한다. 이어지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도 바울이 선한 목자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고백이지 수퍼맨이 된다는 적용이 아니다.

>>> 오늘도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며,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하루를 살라고 하신다. 음~~ 모든 성도들이 구해야 할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용서’가 아닐까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oC5Mj7bQzQk

시편 22

>>  시편 22편에는 다윗이 ‘아침의 사슴’ (아얠렛 샤할)에 맞춘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그러나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아침, 사슴이 주는 상쾌함이나 가벼움 보다는 피곤하고 무겁게 시작한다. 시인의 하나님부재의 절박함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환난 날에 시인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응답에서 찾지 못했으나 마침내 감사와 찬양에서 찾는다. 그것도 과거의 간증에서만 찾지 않고 미래에서도 주재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한다. 외톨이가 아니라 의인의 회중에서 찾는다. 의인의 회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그리고 자신도 곤고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원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냄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낸다. 환난이 하나님의 응답을 가로막지 못한다.

>> 숲속 작은집 창가에 우리 주님이 계신다. 사냥꾼을 피해 도망하는 사슴같이 주께 피하라고 하신다. 으르렁 거리는 사자에 맞서지 말고 주께 도망쳐야 한다. 능히 싸워 이길 것 같은 개들도 피해 주께 도망쳐 오라고 하신다. 주님이 편히 쉬라고 하실 것이다. 숲속에 있는 집이 멀리 있던 사슴에게 작은집처럼 보였겠지만, 주께 피한 모든 의인들이 머물 수 있는 큰 집이다. 수많은 의인들이 주께 피한 시인을 환영해 줄 것이다. 서로 간증하고 서로 찬양하고 서로 감사하고. 의인들의 회중에서 원기를 회복한 사슴이 아침에 다시 뜀박질하며 노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나님나라다.

>> 하나님은 침묵으로도 응답하신다. 아니 응답은 이미 주어졌다. 성경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대신 답을 해 준다. 역사속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대신 답을 해 준다. 주위의 많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불신자의 언행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 피할 때 하나님은 침묵을 깨시고 나를 안아주신다. 이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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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같다.)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를 느낀다. 하나님의 도움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주께서 시인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신다고 느낀다. 시인은 주야로 ‘내’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시인은 돌연 필요에 대한 간구 대신 찬송과 감사로 기도한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의 거룩하심을 노래한다. 주께 의뢰한 조상들을 구원하셨던 주님을 기억한다. 조상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조상이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구원하신 주님을 노래한다.

시인은 찬송 중에 계시는 거룩한 주님께 자신의 처지가 사람이 아니요 벌레라고, 사람의 비방거리요 조롱거리라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주하나님께서 시인을 구원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비아냥 거리며 비웃는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시인은 주께서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았느냐고,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주께 의지하였고 주께서 시인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항변한다. 사람들의 말처럼 나를 멀리하지 말아달라고, 환난 날에 주님이 도울자가 되어달라고 매달린다.

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황소같이 힘센 자들이 자신을 포위했다고 한다.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든다고 한다. 자신은 업질러진 물이며, 뼈는 어그러졌으며, 마음도 밀랍같이 녹아버렸다고 한다. 쉽게 부서지는 질그릇처럼 되었고, 입이 바싹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을 정도요, 죽은 자들의 무덤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힘센 황소뿐만 아니라 개들도 악한무리가 되어 시인의 팔다리를 물어띁는다고 한다. 살이 찢겨 뼈가 드러나는 것을 원수들이 본다고 탄식한다. 원수들이 시인의 겉옷을 나누며, 속 옷을 제비뽑는다고 한다.

시인은 주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 되신 주하님, 나를 속히 도와주십시오. 내 생명을 (원수들의) 칼에서 건져주십시오. 홀로 남은 나를 악한 개들의 세력에서 구해 주십시오. 사자의 입에서 구해주십시오.

시인은 다시한번 주께서 시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음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면서도 시인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가운데서 주를 찬송한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주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의 회중에서 함께 찬송하자고노래한다. 하나님께 영광돌리자고 외친다. 자손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자고 노래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에 마냥 기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고자 한다. 곤고한 자의 곤고를 싫어하시고 곤고한 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큰 회중가운데서 하나님께 찬송하며 서원을 갚겠다고 약속한다. 시인의 서원은 곤고한 자들을 돕겠다는 것이었나보다. 시인은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주하나님을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하며 영생을 누린다고 노래한다. 온 땅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나라 모든 족속이 주 앞에 예배할 날이 올것이라고 노래한다. 모든 나라와 모든 족속의 주인이 주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빈부귀천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주를 경배하고 주께 절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자자손손 주를 섬기고 주를 전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를 태어날  자손들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주하나님의 통치를 자손들에게 상속하라고 하신다.

 

시편 21

오늘 시는 시편 20편 9절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를 어어받는다. 20편 9절의 간구에 대한 응답에 감사기도하는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시인은  ‘우리’ 왕이 주께서 주신 힘을 기뻐하고 주께서 구원해 주심을 크게 즐거워한다고 노래한다. 주께서 우리 왕의 소원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셨다고 찬양한다. 주께서 왕을 무릎꿇리시고 관을 씌워주셨다고 (왕으로 세우주셨다고) 노래한다. 왕이 주께 구한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장수로 삼아주신다. 그뿐 아니라 왕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존귀와 위험있게 하신다. 영원토록 왕으로 세움을 입는 복을 받게하시고 주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신다. 왕은 오직 주하나님만 의지한다. 왕은 지존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왕위가 흔들리지 않을 것을 안다.

왕은 주님의 원수를,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어 주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긴다. 왕은 원수들의 후손도 땅에서 멸절시킨다. 원수들이 왕을 해하려고 계책을 세우나 이루지 못한다. 왕이 원수들로 도망가지도 못하게 할 것이며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길 것이다. 왕은 주님의 대적들을 무찌름으로 주의 능력이 높음을 찬양한다. 시인은 다시 우리가 되어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한다.

>> 어제부터 ‘우리’라는 단어에 마음이 꽂힌다. 성도라면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된 지체인 다른 성도 한명 한명을 왕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베드로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라고 편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어느지체도 다른 지체보다 더 높지도 더 낮지도 않다. 베드로는 철저하게 ‘너’가 아닌 ‘너희’라는 복수를 사용한다. 여기에 묘미가 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나아갈 때도 자신의 (개인의) 하나님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공동체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골리앗을 무찌른 승리의 기쁨도 다윗 자신만의 승리가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승리였다. 이렇듯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신다.

>>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의 근심걱정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정신이 필요하다. 성도라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기도보다, 왕을 위한 (다른 성도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제목이 달라질 것이다.

시편 20

1-4 시인은 ‘너’라는 청자에게 노래한다. ‘너’는 누구일까? 화자인 시인은 환난 날에 주하나님께서 청자인 너에게 응답하시길, 주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길 노래한다. 주하나님께서 (성소와 시온에서) 너를 도우시고 너를 붙드시길 노래한다. 주하나님께서 너의 제사를 받아주시길 원한다. 너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너의 모든 계획을 이뤄주시기를 원한다.

 5시인은 화자를 ‘우리’라고 부른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개선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며, 우리가 주하나님께서 ‘너’의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원한다고 노래한다.

6 시인은 화자를 ‘내가’, 곧 ‘나’로 바꾼다. 나는 주하나님이 그리스도께 구원하는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안다고 노래한다.

7 시인은 화자를 다시 ‘우리’로 바꾼다.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어떤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주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쓰러지나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선다고 노래한다. 주하나님께 (우리) 왕을 구원해 달라고, 우리가 부를 때 응답해 달라고 노래한다.

//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다윗이 화자이면서 동시에 청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너’를 ‘나’로 바꿔 불러도 된다. 마찬가지로 ‘너’ 대신 독자인 우리 자신의 이름을 넣고 읽어도 된다. 시인이 화자를 ‘우리’로 바꾸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나누는 자가 시인 한명이 아니라 무리라는 것을 반증한다. 믿음의 공동체, 곧 의인의 회중이라는 것이다. 물론 구원은 회중적 떼창이 아니라 ‘내가’ 불러야 할 (알아야 할) 노래다. 그러나 성도는 개인적 신앙고백으로 구원을 받으나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는 것도 잊어버리면 안된다.

>> 오늘 시는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나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러자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삼상 17:45)]  다윗이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이 주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노래하듯, 독자인 ‘내’가 의지해야 할 분도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 ‘나’의 주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주 하나님이시다.

>> 기도할 때, 개인을 위해 기도할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