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9 (1-14)

주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위해 애가를 지으라고 하신다.

지도자들의 어머니는 암사자라는 표현은 무엇일까? 위정자들에게는 나라가 있다. 나라가 어머니가 되는 셈이다. 어머니가 암사자라는 뜻은 나라가 위정자들에게 권세를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암사자가 사자들 가운데서 젊은 사자중에서 새끼 하나를 키워 젊은 사자로 키우는 것은 나라가 위정자를 세워 왕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자가, 왕이 사람을, 곧 백성을 먹이처럼 물어 뜯고 삼켰다고 애가를 부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방 나라도 유다 왕의 폭정을 기회로 유다 왕을 사로잡아 애굽땅으로 끌고 갔다. (하나님께서 이방을 심판의 도구로 삼은 것이다.) 암사자, 곧 유다 나라는 애굽 땅으로 끌려간 왕을 기다렸지만 소망이 끊어진 줄 알고 다른 새끼를 젊은 사자로 (왕으로) 키웠는데, 왕이 된 이 사자도 백성들을 물어 뜯고 삼키는 폭정을 일삼았다. 선왕보다 심했다. 나라가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다는 황폐해졌다. 이방나라의 밥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번에는 바벨론 왕에게 사로잡혀갔다. (이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다.)  오호통재라!

애가는 이어진다. 유다 어머니, 곧 유다 나라는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라고 한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처럼 포도나무도 물가에 심겨져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했다. 한마디로 번성한 나라였다. 그런데 굵은 가지가 (지도자가) 뽑혀 땅에 던짐을 당하고 그 열매는 (백성) 동풍에 마른다고 애가를 지어부르라고 한다. 그 강한 가지들은 꺾이고 말라 불에 탔다. 포도나무는 더이상 물가가 심기운 것이 아니라, 이제는 광야, 곧 가물이 든 땅에 심어진 바 되었다. 불이 (하나님의 심판이) 포도나무의 열매와 권세잡은 가지를 태웠다. 하나님의 시냇가에서 옮겨 광야에 심겨진 유다의 최후다. 오호 통재라!

// 성도도 하나님의 시냇가에서 주야로 말씀의 물을 빨아 먹지 않으면 말라 버려져 결국 태워질 포도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성도가 열매맺는 가지인 이유는 하나님의 시냇가에 심기운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말씀의 수액을 공급받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농부가 잘라 버려져 땔깜으로 쓸 가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도 이 애가를 기억하며 삼가 조심해야 한다.

예수는 참 포도나무요 하나님은 농부시다.

에스겔 18:19-32

주하나님은 다시한번 명확히 말씀하신다. 조상탓을 하지 말아라. 아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반드시 산다. 대신 범죄하는 영혼은 반드시 죽는다. 연좌제는 없다.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간다.

주님은 다시한번 돌이키라고 하신다. 그래서 만일 악인이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악인이 범죄한 것을 하나도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그는 지금 행하는 공의로 살리라 라고 하신다. 결국은 지금 이순간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키며 사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주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주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악인이 돌이켜 악한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반대로 의인이 돌이켜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면 그도 죽는다.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않는다. 그가 범한 허물과 지은 죄로 죽는다고 하신다. 다시한번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주님은 이것이 바로 공평한 잣대라고 하신다. 의인이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면 그 행한 죄악으로 죽고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이 산다. 처음부터 끝까지 의인은 살고 악인은 죽는다. 우리가 온전히 의로우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살면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기 정말 어려운 시대에 임마누엘을 구해햐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공평한 잣대로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다. 오직 의인만 산다. 그런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이 믿음이 에스겔 시대에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에게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서 예수 안에 사는 것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바로 ‘예수 안에서 사는 것’, 곧 임마누엘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 예수 안에 사는 길이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알고 정의와 공의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이든 악인이든 하나님을 몰라 죽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한다.

회개하고 모든 죄악에서 떠나라고 하신다.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하신다.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너희는 스스로 돌이켜 살지니라. 예수 안에 거하는 수 밖에 없다.

에스겔 18:1-18

주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아버지도 아들도 주인되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죽으리라고 하신다. 안되면 조상탓으로 돌릴 수 없다고 하신다. 조상탓 내탓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이다. 핑계 댈 곳이 없다. 우리는 (우리 영혼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한다면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고 하신다.

주님은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먹지 않는다. 우상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는다. 생리중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사람을 학대하지 않는다.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않는다.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힌다. 변리를 위하여 꾸어주지 않는다. 이자를 받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한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한다.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는 의로운 삶은 종교적이기 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다.

의인은 반드시 산다. 그러나 의인의 아들이라도 정의와 공의 삶에서 /하/나/라도 벗어나면 결코 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 돌아간다고 하신다. 주님은 노아 욥 다니엘이라도 자녀들을 구할 수 없다고 하셨다.

범죄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아비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면 이 사람은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산다고 하신다. 물론 의로운 아들이 포악한 아비를 구할 수 없다. 포악한 아비는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않아 죽을 것이다.

주하나님께서는 각자의 행위대로 갚으신다.

// 주하나님 앞에 설 때 ‘–때문에’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덕분에’라면 모를까.

에스겔 17:11-24

하나님의 말씀이 또 에스겔에게 임한다. 이번에는 수수께끼처럼 말씀하신 두 독수리 비유를 해설해 주신다.

첫번째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는 바벨론이고 두번째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는 애굽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통치를 통해 세상에서도 언약을 지켜야 나라가 유지 될 수 있음을 교훈하려 하셨다. 그런데 유다는 바벨론과의 언약을 무시하고 애굽의 도움을 구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배반하고도 형통하겠느냐고 반문하신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 족속이랴)

주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의 도움을 요청한 시드기야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를 세워주었는데 그 맹세를 저버린 결과는 바벨론으로 잡혀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애굽이 결코 도와주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한 결과하고 하신다. 주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맹세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죄 값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감을 하나님을 반역한 죄에 대한 심판이라고 하신다. 바벨론에 피해 군대에서 도망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 이심을 알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의 흥만성쇠도 세상의 흥망성쇠도 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신다. 높은 나무늘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신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주님이 이루신다.

에스겔 17:1-10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로 이스라엘족속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가 레바논에 이르러 백향목 높은 가지를 꺾고 그 연한 가지 끝을 꺾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큰 독수리는 바벨론을 상징하고, 그 연한 가지 끝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 같다. 결국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나무는 독수리 바벨론을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처지요 독수리 아래서 통치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상징이다. (3-6)

그런데 날개가 크고 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더 있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가 이 독수리에게 물을 받으려고 이 독수리를 향했다고 한다. 두주인을 섬기는 비유다. 이 포도나무는 두번째 독수리의 땅에 옮겨 심기우면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포도나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두번째 독수리를 의지해서도 번성할 수 없다고 하신다. 독수리가 뿌리를 빼고 열매를 따서 포도나무를 시들게 할 것이라고 하신다. 포도나무는 결국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고 하신다. (7-9)

두 주인을 섬겨 정함이 없는 포도나무의 운명은 번성이 아니라 말라버리는 것이다. (10)

// 첫번째 독수리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의 벌이다. 그래서일까, 첫번째 독수리 아래에서는 움이 돋았다고 한다. 소망이 보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니라 두번째 독수리를 쳐다본다. 그러나 그 결국은 말라버리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의 운명이다. 야고보는 이렇게 편지한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비천한 신도는 자기가 높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자기가 낮아지게 된 것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가 떠서 뜨거운 열을 뿜으면,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 골몰하는 동안에 시들어 버립니다.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약 1:8-12)

두 마음을 품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