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6:53-63

주하나님께서는 뜬금없는 회복을 말씀하신다. 소돔과 사마리아와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벌을 받아 소돔과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다시 잘 살게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은혜가 아니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잘못된 행실이 부끄러운 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굳이 은혜의 이유를 찾는다면 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모든 행실이 부끄러워질 것이라고 하신다. 자신들의 행실이 부끄러워질 때, 소돔도 사마리아도 예루살렘도 옛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렇다 은혜다. 예루살렘은 교만하여 소돔을 비웃었다. 그러나 범죄한 예루살렘은 아람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음란과 가증한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주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에게 그 행한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 영원한 언약을 세우신다. 61절은 정말 어려운 구절이다. 소돔과 사마리아를 예루살렘의 딸로 주시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예루살렘을 회복시켜주시듯이 소돔과 사마리아도 회복 시켜 주신다는 의미같은데. 복음이 예루살렘만 아니라 이방에도 차별이 없음을 선언하시는 것 같다. 결국 예루살렘도 소돔과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된다. 이런 주하나님을 알라고 하신다. 용서의 하나님의 알라고 하신다. 용서받을 때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도 입도 열지도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은혜다.

// 회복의 때에 지난 날의 잘못들이 부끄러운 것인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시니 회복은(용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수반한다. 지난 일들이 수치스러워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입이 열어 핑게를 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이든 소돔이나 사마리아든 차별이 없다.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 하나님을 아는 곳에 회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다. (벌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뜬금없는 것이 아니다. 옛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앞에 나아오라고 하신다.

에스겔 16:35-52

그러므로 너 음녀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음녀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음녀에 대한 판결문을 말씀하신다.

음녀 이스라엘이 행음하고 우상을 위하여 자녀의 피를 우상에게 드렸기 때문에, 음녀 이스라엘의 행위를 사방에 알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수치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간음하고 살인한 자가 받는 심판을 받게 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람들의 손에 넘겨 주면, 그들이 너의 높아진 것을 허물어 버리고 네 옷을 벗겨 버리고 네 몸의 모든 장식품을 빼앗아 알몸으로 만들고 군중을 앞에서 돌로 치고 창으로 찔러 죽일 것이라고 하신다. 심판의 판결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음행을 한 집들을 불태워 음행을 그치게 하신다. 더이상 성매매의 음행이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 그제서야 하나님의 분노가 그치며 하나님의 질투가 떠가고 마음이 평안해져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심판은 예루살렘이 어렸을 때를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 행위대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신다고 하신다. 심판의 목적은 벌이 아니라 다시는 음란과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어머니에 그 딸!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는 속담으로 풀어가신다. 예루살렘은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어머니의 딸이요,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한 형의 동생이라고 하신다. 네 어머니는 헷사람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며. 피투성이로 버려졌던 근본이 없는 갓난아이가 자라서 왕후의 지위를 얻자 양자 삼아 주시고 아내 삼아 주신 하나님대신 하나님의 족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파버리고 이방의 족보를 사서 이방인의 풍습을 좇았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마리아와 소돔을 따랐다고 하신다. 아니 사마리아와 소돔의 가증한 행위대로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것을 적게 여겨서 더욱 더 부패하였다고 책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소돔의 가증한 행위와 죄악이 무엇인지 알려주신다. 풍족한 중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 우상숭배가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자신의 탐욕에 따라 교만해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은 것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은 것) 이라고 꼬집어 주신다. 이런 탐욕에 지금 예루살렘을 휩쓸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죄는 예루살렘의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예루살렘의 죄가, 가증한 일이 훨씬 심하다고 하신다. 사마리아와 소돔이 상대적으로 의로와 보일 정도라고 하신다. 사마리아와 소돔이 심판을 받았다면 예루살렘에게 임할 수치와 심판은 당연한 것이다.

// 교회가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므로 세상이 교회보다 더 의롭게 되어버렸나니, 교회가 세상을 더 의롭게 하였은 즉 교회는 놀라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너 음녀야’라고 부르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지어져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분명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다.

에스겔 16:15-34

하나님께서는 피투성이를 데려다가 키워주고 아내로 삼아 왕후가 되게 해 주었는데, 왕후가 된 예루살렘은 족보를 파는 가증한 행위를 했다. 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영화롭게 화려하게 온전하게 해 주셨는데, 예루살렘은 이 화려함을 믿고 자기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하신다. 호가호위한 것이다. 그것도 음란을 많이 행하고, 결국 그 몸이 주 하나님의 소요가 아닌 그들의 것이 되었다고 한탄하신다.

주 하나님은 이런 행음은 전무후무하다고 하신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주 하나님께서 주신 것(복)으로 우상을 만들고 주 하나님게 주신 것을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며 주 하나님께서 주신 먹거리로 우상에게 베풀었다. 심지어 낳은 자녀까지 이방신들에게 제물로 불살라 드렸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도 우상에게 넘겨 불살라 드렸다고 노하신다.

주하나님은 다시한번 예루살렘이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을 되돌리신다. 주 하나님께서 버려진 피투성이 갓난아이를 살려주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다고 책망하신다. 책망정도가 아니라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라고 진노를 쏟아 놓으신다.

주하나님의 ‘화’의 말씀이 이어진다. 예루살렘이 온 이스라엘에서만 모든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신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안샐 수 없으리라. 애굽사람들과도 음행했다고 하신다. 블레셋, 앗수르 그리고 포로로 잡혀와 있는 갈대아에까지 심히 행음했으면서도 아직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하신다. 탐심/탐욕은 끝이 없다.

왕후로 세워주셨는데 방자한 음녀의 행위를 했다고 하신다.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악한지”라고 하신다. 이제는 대놓고 행음을 한다고 하신다. 창기처럼 돈을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면서, 즉 성매매를 한다고 하신다. 생계를 위해서 창기밖에 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의 아픔이 아니라 본인의 쾌락과 정욕을 따라 행음을 한다고 노를 발하신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약 1:15) 오늘 본문 예루살렘이 야고보의 가르침에 딱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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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16:1-14

8월도 에스겔과 함께. 주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한다. 예루살렘으로 자신들의 가증함을 알게 하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 이라고 전하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족보를 바꾼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히브리족, 유다민족의 족보를 팔아버리고 이방족속의 족보를 샀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사람들을 따르는 가증한 일을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주 하나님은 족보를 팔아버린 예루살렘 사람들을 출산 후 피투성이로 버려진 아이와 같다고 하신다. 탯줄도 제대로 자르지 않았고 씻김을 받지도 않았고 소금으로 소독도 해 주지 않았고 강보로 감싸주지도 않은채 들에 버려진 아이라고 하신다. 그때 주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너는 피두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시며 살려 주셨다. 어떻게든 갓난아기 스스로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인큐베이터에 넣으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피투성이야 걱정말아라 내가 너를 살리리라. 내가 너를 살리리라. 그래서 들풀 같은 이 아이를 심히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시켜 주셨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몸 하나를 가릴 수 없는 처지였다. 주 하나님은 또 지나치시며 주 하나님의 옷으로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셨고 그녀를 아내로 삼아 언약을 맺어 주셨다. (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셨다.) 주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 하나님께서 (피투성이를) 물로 씻어주시고 기름을 바르고 수놓은 옷을 입히고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옷과 모시로 입혀주시고 패물로 단장해 주시고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씌워주셨다. 치장만 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게 해 주셨다. 왕후가 되어 왕의 밥상에서 먹게 해 주셨다. 피투성이로 하여금 이방중에 명성을 얻게해 주셨다. 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영화롭고 화려하고 온전하게 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이다. 무엇하나 버려진 피투성이가 스스로 한 것은 전혀 없다.

// 예루살렘이 바로 왕후가 된 버려졌던 피투성이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족보를 팔아버리고 가나안, 아모리, 헷족속의 가짜 족보를 사서 이방인들처럼 살아간다. 주 하나님은 이것을 가증하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족보를 회복해야 한다. 그런데 성도들의 진짜 족보는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이는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요 1:12,13 새번역)

주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근본도 없는 피투성이로 버려진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다. 하나님의 족보에 우리의 이름을 올려 주셨다. 품안의 자식이라고 했다. 다시말하면 주 하나님의 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다. 머리가 컸다고 양자삼아 주신 하나님을 버리고 호적에서 자신의 이름을 파는 것이야 말로 가증한 일이다. 호적에서 파지 않았다고 해도 아버지께 불순종하면 무엇이 다를까?  세상에서도 부모와 자식 관계는 한 번 법률적으로 맺어진 이상, 당사자의 결정으로 바꿀 수 없는 천륜이다. 부모와 가족관계를 끊고 호적에서 판다라는 말은 우리 법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는데… (법하는 사람들의 확인이 필요하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다른 것은 없다. 효뿐이다. 순종이다. #임마누엘

에스겔 15 (1-8)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요즘 정말 반복되는 이 표현이 나를 설레게 한다. 심판의 말씀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포도나무는 목재로 쓸 수 없다고 하신다. 불쏘시개나 땔감이 될 뿐이라고 하신다. 목재로 쓸 수 없고 불쏘시개나 땔감 밖에 안되는 포도나무가 만약 불살라진다면 그때는 아무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 주민들을 바로 불쏘시개와 땔감으로 타버릴 포도나무가 되게 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포도나무처럼 불사르실 때에야 심판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줄 알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포도나무를 불쏘시개와 땔감으로 불사르시듯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시는 이유를, 포도나무가 목재로서의 가치가 없듯이 예루살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범법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지적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주변 가지들을) 손질하신다.” 포도나무의 나은 점은 무엇인가? 당연히 목재가 아니다. 포도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임마누엘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 버려져 불쏘시개나 땔감이 된다. 열매 맺는 가지를 방해하는 옆가지도 잘라 버려져 불쏘시개나 땔감이 된다. 나무에 붙어있어도 수액을 빨아들이지 않는 가지는 말라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와 함께 있어도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가지라면  손질을 받을 것이다. 수액을 빨아들이지 않는 것도 다른 가지가 열매 맺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처럼 마:23:13) 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쓸모없는 가지다. 잘라 버리신다.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리신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던 시기 예루살렘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요, 열매 맺는 다른 가지를 방해하는 가지였다. “그들이 범법함이니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예수님께서 친히 포도나무가 되어주신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에스겔에게 주신 말씀을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재해석하신다. 내가 친히 너희를 위해 목재로써는 쓸모없는 그 포도나무가 되어주겠다. 너희는 내게 붙어서 (열매 맺는) 가지가 되어라. 은혜다.  열매는 결과물이 아니라 ‘전과정’이다. 임마누엘의 삶이다. 불쏘시개나 땔감으로 사라질 인생을 다른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포도열매를 맺는 영원한 삶으로 바꿔주신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의 포도나무시고 나는 그분의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