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0

하나님께 대한 순종 서약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명단이 나온다.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서명했다. 총독이라고 직함도 적었을까? 이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서명했다. 서명을 하지는 않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맹세로 서약식에 참여했다.

// 예수님께서 모친마리아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 하시 말씀이 기억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3:35)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고 하셨다. 서약식에 참여하 사람들을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이라고 한다.

서약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않는다.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 위해 팔고사지 않고 희년을 지키켜 땅도 쉬게 하고 모든 빚도 탕감한다.
  • 매년 1/3세겔씩 걷어 하나님의 전을 위해 사용한다. 해마다 첫소산물도 하나님의 전에 드린다. 첫 아들과 가축의 첫음 난 것도 율법대로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에 구별하여 준다. 그리고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레위사람들에게 준다. 레위 사람들도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전 곳간 방에 두어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성전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한다.

서약의 첫번째 두번째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것이고 세번째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데 성전예배가 필수라는 것을 반영한다. 어찌보면 장한 결정이고 어찌보면 죄에서 돌이키는데서 더이상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결정이다. (돌이킨 자리에서 멈추게 하기 때문에 언제 다시 정체성을 잃을지 몰른다.) 예레미야를 묵상할 때 주님은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렘 9:25) 라고 하셨다. 할례받은 자로서의 외적 정체성 회복이 부흥의 궁극적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방 민족은 할례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고 그 이유를 설명하셨다. 오늘의 서명식은 과연 몸의 할례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인지 마음의 할례를 받은 결과인지 궁금하다. 느헤미야의 개혁으로 천지가 개벽되지 않았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이유다. (많은 경우 나의 적용은 성령의 깨닫게 하심보다 기존의 가르침에 그냥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외형적 성도로서의 적용은 어렵지 않다. 세례받고 주일성수 십일조 금주금연 주일봉사. 마음의 할례를 받으면 말씀 적용이 어디로 어디로 튈까?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참 유대인이라고 바울은 가르쳤는데 참성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일 매일 보혜사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과 깨달은 것을 적용할 힘주심을 구해야 한다.

지식과 총명있는 자들이 서약을 했다. 다시한번 주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느헤미야 9:23-38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약속대로 하늘의 별같이 많게 번성하게 하셨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 한 것을 하나님께서 가나안 주민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게 하셨다고 표현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으로하여금 가나안 본토 여러 족속들을 맘대로(임의로) 부릴 수 있게 해 주셨다는 표현이다. 그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순종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심지어 주께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서 곤고를 당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환란을 당하여 다시 주께 부르짖었고 주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셔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다. 이과정이 여러번 반복되었다. 결국은 교만이 문제다.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삶을 (생명을) 얻는 주의 계명에 불순종 하였던 것이다. 주님은 참으시다 못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셨다. 그러나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는 않으셨고 버리지도 않으셨다.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믿고 언약회복을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들을 열방의 손에 넘겨 받게하신 환난을 작게 여기지 말아달라고 감히 기도한다. 충분히 뉘우쳤다는 고백일까? 그렇다고 해도 뉘우침에 (자신들의 회개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의로우신 사랑에 기대어 기도한다. 자신들은 악하나 주님은 미쁘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다시한번 (조상들이) 주의 명령과 경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않고 악행을 한 것, 그래서 마땅히 복을 누려야 할 약속의 땅에서 종이 되었음을 (포로로 잡혔음을) 시인한다.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이방의 왕들을 세워 자신들을 맘대로 (임의로) 통치하게 하셔서 자신들이 곤란에 빠졌음을 시인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단단히 약속을 하겠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관리들과 제사장들이 모두 서명했다.

주님께 순종하겠다는 일종의 서약식을 한 것이다. 왕국시대를 지나 포로후까지 이어진 ‘사사기의 악순환’을 끊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이다. 그러나 사람의 결단으로는 사사기의 악순환을 결코 끊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마침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악순환을 끊으셨다. 그렇다고 우리 스스로 예수님처럼 악순환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 가능하다.  임마누엘!

// 성도들은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땅에서 임의로 행할 수 있는 자유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주의 법대신 탐욕을 따라 살면 주님은 세상이 성도들에게 임의로 행하도록 하실 것이다. 임의로 행할 수 있는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고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권면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갈 5:14) 이웃사랑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오늘도 순종해야 할 법이다.

느헤미야 9:9-22

창조주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 레위인들은 이 민족적이며 역사적인 하나님을 계속해서 송축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셔서 출애굽 시켜주셨다.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 따라오던 바로와 애굽군은 수장시키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계명과 율례를 백성들에게 주셨다. 특별히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광야 길 동안 양식을 주셨고 물을 주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차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이 굳어 주의 명령을 들지 않고 거역한 흑역사를  기억한다. 조상들의 거역을 통하여서 용서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조상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자기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신이라고 하나님을 모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신 긍휼로 조상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신 주님을 송축한다. 주의 선한 영으로 조상들을 가르치시고 만나로 먹여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신 주님을 찬양한다. 사십년 광야생활동안 부족함 없이 옷도 해어지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리고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한 승리도 기억한다.

부흥의 핵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자복할 수 밖에 없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더디 노하시는 하나님!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 어찌 이런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심지어 금송아지로 하나님을 크게 모독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버리지 않으셨다. 큰 모독을 받으셨음에도 더 큰 긍휼로 용서하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었으나 (5:20)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6:1)> 라고강조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씀을 듣고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을 송축하는이유다. 그렇다.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오 주님 제가 주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제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합니다. 저를 길러 주시고 부족함 없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느헤미야 9:1-8

칠월 이십사일. 초막절이 7월  15-22일이고 여덟째날 (23일) 성회로 모인 다음 날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모였다. 그냥 모든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언약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을 지칭하는 뉘앙스를 받는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했다. 이방과의 절교와 죄를 자복한 순서가 새롭게 다가온다.

하여간 이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낮 사분의 일은 (세시간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시간 정도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께 경배했다. ‘말씀 선포’와 ‘죄 고백’은 전형적인 부흥의 모습이다.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를 하나님께 부르짖는 레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무리 중에 다니며 회중들에게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외치는 레위사람들도 있었다.

송축한 내용을 새번역으로 읽으면…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은 찬양을 받아 마땅합니다. 어떠한 찬양이나 송축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다 기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홀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과, 거기에 딸린 별들을 지으셨습니다. 땅과 그 위에 있는 온갖 것, 바다와 그 안에 있는 온갖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늘의 별들이 주님께 경배합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시어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진실함을 아시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의 땅을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그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우셔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 사람들과 절교했다는 것은 이방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는 의미지 더이상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용서받기 전에 이방 사람들과 절교했다. 잘못에서 돌이켰다. 용서받고 못받고를 떠나 잘못에서 돌이키는 것은 (회개는) 중요하다. 송축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요 생명의 주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이 의로우신 주님은 바로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잘못에서 돌이켰다는 것은 곧 용서받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그냥 백성들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 자손,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다.

창조주요 생명의 주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사귐을 회복하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의 시작은 회개다. 주님은 우리 마음이 아브라함처럼 진실하길 원하신다. 충성하길 원하신다. 이것이 신앙(믿음)이다.

 

느헤미야 8

느헤미야 8
 
(주민등록이 끝나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했다. 일곱째 달은 언제지? (성벽재건이 엘룰월에 마쳤는데 그냥 일곱째 달이라고 하면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름하기 어렵다.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하여간 느헤미야의 빨리빨리 밀어붙이기식 일처리를 생각하면 주민등록을 마치자마자 곧바로라고 생각된다.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소집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와 달라고 요청했다. (다시한번 일곱째 달 초하루라고 적는 것으로 보아 날짜가 중요한가 보다.)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수문광장에 모인 회중 앞에 서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을 읽어주었고 회중들은 귀기울여 들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하는 강단 좌우로 맛디댜 스마 아나야 우리야 힐기야 마아세야 (이상 6명이 에스라 오른쪽에) 브다야 미사엘 말기야 하숨 하스밧다나 스가랴 므술람 (이상 7명이 에스라 왼쪽에) 총 열세명이 섰다. ( 아마도 에스라와 번갈아가며 율법책을 봉독했을 것이다.)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율법책을 읽어주기 위해 책을 폈을 때 모든 백성은 일어났다. 에스라가 먼저 야웨 하나님을 송축하자 백성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몸을 굽혀 얼굴이 땅에 닿도록 야웨께 경배했다. 또 열세 명의 이름들이 나온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서 있는 백성들 사이를 오가며 율법을 설명해 주었다.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이랄까? 귀환자들의 후손이라 히브리어를 잘하지 못해 통역의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왜 열둘 열둘이 아니고 열셋 열셋일까?)
 
백성이 율법을 듣고 깨닫자 울기 시작했다. 말씀을 깨닫고 우는 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역할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에는 울 수 밖에 없다.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들 사이를 오가며 말씀을 깨우쳐주던 레위사람들이 백성들에게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였다. (느헤미야가 어디 갔나 했다. 그도 겸손히 백성들 가운데서 함께 말씀을 들었나 보다.)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 학사 에스라가 아닌 말씀을 듣고 깨달은 느헤미야에게서 나왔다. ) 느혜미야는 백성들에게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고 말하면서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나눠주라고 적용한다. “이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라고 위로하였다. 백성중을 다니던 레위 사람들도 백성들에게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이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고만 말하였다. (다들 근심하지 말라고 말만 할 때 느헤미야가 먹고 마시며 나누며 기뻐하라고 적용했다면 너무 편협한 생각일까?) 모든 백성이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큰 즐거움의 이유를 느헤미야는 먹고 마시고 배불러서가 아니라 들은 율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것과 마시는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임을 알았을까?)
 
율법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 되었는지 (하나님나라를 맛본) 백성들은 그 다음날에도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의 말씀을 보았다. 그리고 율법에서 초막절에 관한 명령을 보고 적용하기로 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회중이 모두 초막을 짓고 그안에 거했다고 기록한다. 역사적으로 여호수아 때부터 처음있는 대대적인 (규모적으로 가장 컸다는 뜻이 아닐까) 초막절 행사였다고 기록한다. 초막절 일주일 기간 내내 하나님의 율법책은 낭독되었다.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깨달음으로 기뻐하고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덟째 날에 규례대로 거룩한 모임을 가졌다.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는 (성벽재건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적용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물리적 성벽재건으로도 하나될 수 없었던 귀환자들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먹을 것을 나눠 먹으면서 (사회적으로 하나되고), 초막절 절기를 지키면서 (종교적으로도) 하나되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같은 음식을 먹었을 것이며 부자나 가난한 자나 비슷비슷한 초막을 짓고 일주일을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들었다. 말씀 앞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겸손하게 한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기 위해서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요즘에는 에스라처럼 성경을 읽어주는 앱도 있고 백성들 사이로 다니며 말씀을 깨닫게 설명해 주는 레위인들 같은 앱도 있지만) 오늘도 살아계서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구하면서 말씀을 읽는다. 그러고 보니 혼자 읽기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읽기다. 적용도 개인적이지 않고 공동체적인 깨달음으로 나갈 수 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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