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3

느헤미야 성벽재건은 정말 한국적이다. 빨리빨리다. 적어도 시작은 일사천리였다.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의 첫삽을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제사장들과 함께 양문을 건축하고 성벽을 함메아 망대부터 하나넬 망대가지 건축하여 성별하였다>라고 적는다. 그리고 성벽을 둘러가며 건축자들을 적어나간다.

문들과 망대들의 이름을 따라가면 양문 – 함메아 망대 – 하나엘 망대 – 어문 – 옛문 – 화덕망대 – 골짜기문 – 분문 – 샘문 – (수문) – 마문 – 동문 – 힘입갓문 순서다. 차례대로 건축되었다기보다 구역을 정해 동시다발적으로 성벽재건 공사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제사장이 건축한 양문과 성벽은 성별되었다고, 즉 하나님께 봉헌되었다고 특별히 구분해서 적었다. (제사장들과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달랐던 모양이다.) 반대로 보면 다른부분들도 성별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느헤미야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을 제사장, 금장색, 상인,  등등 직업이나 지위, 여리고 사람들, 드고아 사람들 등등 지역, 누구 누구의 자손과 같은 가문으로 다양하게 기록한다.

느헤미야는 비고란에 일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특이사항도 기록한다. 예를 들면 드고아 사람들 중에는 귀족의 말을 듣고 공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적었다. 그렇다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귀족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세상질서보다 더 중요한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알았나보다. 예루살렘 반쪽을 책임지고 있던 할로헷의 아들 살룸은 자기 딸들과 함께 공사에 참여했다. 성벽재건에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는 뜻이리라. 물론 빈부귀천 지위고하의 구분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집 앞을 또 다른 사람은 자기 집 옆을 보수 했다.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일 할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 내가 좋아하는 느디님 사람들도 성벽재건에 참여했다. 왜 한글 개역개정에서는 이 구절을 괄호로 가뒀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성전막일꾼들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어서 어떤 사본에서는 일부러 누락시킨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느니딤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신약적인 성도들의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성전막일꾼이어서 성전 가장 가까이에 산다. 이들은 신약적으로 말한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래서 포로기간에도 자유자가 되기보다 느디님사람들로 모여 살았다. 그리고 에스라 귀환 때 흔쾌히 성전 막일꾼으로 동참했었다. 이들은 시편 84편 10절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서 호의호식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라는 시인의 노래를 허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느헤미야 2장에서 느헤미야의 성벽재건 계획을 말하자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듣고 일어나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자>라고 반응했다고 느헤미야는 기록한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일이다. (오직 한분 하나님만 선하시다.) 성벽재건은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지도자들, 즉 관리들만의 일이 아니었음을 느헤미야는 3장에서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다. 남녀노소 빈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선한 일에 참여했다. 그래서 1절이 귀하다.

“대사재 앨랴삽은 동료 사제들을 거느리고 양 다니는 문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문틀을 짜고 문을 만들어 달았다. 그런 다음 메아 망대까지, 또 하나넬 망대까지 수축하여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1절 공동번역)

성전에서도 힘든 일은 성전막일꾼을 부렸던? 제사장들이 직접 육체노동에 참여했다. 느헤미야는 28절에서 제사장들이 마문 위로부터 자기 집과 마중한 부분을 중수했다고 기록한다. 제사장들은 성벽재건에 중복해서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제사장들뿐 아니라 중복되는 이름이 하나 둘 더 보인다.

주일 새벽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곳이다.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는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뿐 아니라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아야 한다.

느헤미야 2

정리 1

느헤미야가 유다에서 온 형제 하나니 일행의 소식을 들은지 서너달이 지났다. 시간의 흐름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빨리 빨리와는 다르다. 물론 고대의 시간개념으로 서너달이면 오늘의 사나흘쯤 될지도 모르겠지만. 서너달 동안 하는 금식기도를 숨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세수를 한다고 해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왕 면전에서 일하는 느헤미야는 나름 표정관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왕에게 걸렸다.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있는 것을 깨닫고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묻자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했다. 왕에게 황송했을 수도 있고 왕을 움직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놀랐을 수도 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솔직히 말했다. 예의를 갖춰 임금님 만수무강을 먼저 말한 후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세상에 이런 왕이 또 있으랴? 왕은 느헤미야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물었고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신)께 기도하고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유다 땅에 가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느헤미야는 이 일이 굉장히 사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기 위해 왕과 왕후가 함께 있었다고 기록한다. 느헤미야는 기한을 정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왕에게 유다까지 가는 통행증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성벽 공사에 필요한 목재도 사용권도 왕에게 받아냈다. 느헤미야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주셔서 된 것이라고 기록한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느헤미야는 즉시 통행증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강 서쪽에 이르자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는 소식에 근심하며 느헤미야 일행을 못마땅하게 주시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마자, 아마도 장거리 여행의 여독이 채 풀리기 전에, 사흘만에 그것도 한 밤에 일어나 측근들과 예루살렘을 돌아보았다. 느헤미야는 이때까지 예루살렘 방문목적을 숨기고 있었다. 하나니의 소식과 같이 예루살렘 성벽은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타버렸다. 느헤미야가 탄 짐승이 (아마도 나귀나 나귀가 끄는 수레) 다닐 길도 제대로 없었다. 성에 있는 지도자들은 왜 왕의 측근이 예루살렘에 왔는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정황을 파악한 후에 성 지도자들에게 예루살렘 성벽건축을 제안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제국의 왕의 허락을 받은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성벽재건을 위한 공사 준비를 하기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에게도 이 소식이 들어갔다. 이들은 너희가 제국의 왕께 반역을 하려느냐 하고 빈정거렸다. 느헤미야는 드디어 제국의 왕위에 하나님이 있음을 선언한다. 하늘의 하나님 (신)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드디어 제국의 왕과 하늘의 신, 두 주인을 섬기던 느헤미야는 하늘의 신(하나님)을 제국의 왕 위에 올려놓는다. 제국의 왕의 최 측근의 자리에서 하늘의 신의 종, 즉 작은 자의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당당히 말한다. 대신 예루살렘에는 저들에게 돌아갈 몫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정리 2

느헤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울며 금식 기도한지 서너달이 지났다. 제국의 왕 측근에서 일하는 느헤미야가 서너달 동안 계속 금식을 해 오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나 제국의 교육과 제도에 맞춰져 있던 어쩌면 일중독의 생활 습관은 분명히 바뀌었을 것이다. 아마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금식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느헤미야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리 없겠지만) 금식중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세수하는 등 표정관리를 했어도 사람의 마음은 얼굴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제국의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고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했다고 적었다. 왕의 관심에 황송했을 수도 있고 왕을 움직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놀랐을 수도 있다. (에스더가 왕에게 나갔을 때 왕이 홀을 내밀고 또 잔치상에서 제국의 절반이라도 줄테니 소원을 말하라는말을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 아닐까?)
느헤미야는 예를 갖춰 왕의 만수무강을 먼저 말한 후 조국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탄채 있다는 소식에마음이 아프다고 대답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속마음을 물었고 느헤미야는 하나님 (신)의 뜻을 따라 (기도때 주신 마음에 따라) 조상들이 묻혀 있는 유다 땅에 가서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이 사건은 매우 사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왕과 왕후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였던 것 같다. 느헤미야는 기한을 정해 왕의 허락을 받았다. 내친김에 유다까지 가는 통행증, 성벽재건에 필요한 목재 사용권도 왕에게 받아냈다. 느헤미야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주셔서 된 것이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신)께 은혜를 입은 자가 제국의 왕에게도은혜를 입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가 된 느헤미야가 제국의 왕 앞에서는 높임을 받았다.
제국의 수도 수산성에서 왕과 왕후를 모시면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신)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수산성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막말을 하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하나님께 묵도하고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에 두신 일에 순종한다. 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가 제국의 왕에게도 도움을 받게 하셨다. 히브리어로 성경을 읽지 못하니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느헤이먀에게 하나님은 아직은 하늘의 신이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느헤미야 통행증을 가지고 강 서쪽에 도착했다. 강 서쪽을 담당하고 있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는 왕의 측근이 이스라엘 자손을 흥황하게 하려고 왔다는 소식에 근심하며 느헤미야의 일행을 못마땅하게 주시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서둘렀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장거리 여행의 여독이 풀리기 전에, 사흘째 밤에 몰래 일어나 (느헤미야는 성 관리들에게 방문목적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일행과 예루살렘을 둘러보았다. 느헤미야가 탔을 나귀 혹은 짐승이 끄는 수레가 다닐만한 길이 없을 정도로 성벽은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탄채였다. 예루살렘에 대한 파악이 끝난 느헤미야는 성 관리들을 모아놓고 성벽재건을 제안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신)의 도우심과 제국의 왕의 허락을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들은 적극적으로 성벽재건을 위한 공사준비에 착수했다. (이스라엘을 흥왕하게 하려고 왔다는 소식은 결국 예루살렘 성벽재건이었다. 강 서쪽 관리들이 자세히 몰랐다는 것은 느헤미야가 제국의 왕에게 받은 친서가 그만큼 사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소식은 호론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에게도 들어갔다. 이들은 너희가 제국의 왕께 반역을 하려고 하느냐면 빈정거렸다. 저들은 반역에 대한 보고를 일종의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역으로 몰릴 위험 속에서도 느헤미야는 제국의 왕위에 하나님(신)이 계심을 선언한다. 하늘의 하나님(신)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제국의 왕과 하늘의 신, 즉 두 주인을 섬기는 느헤미야는 하늘의 신(하나님)을 제국의 왕 위에 올려 놓는다. 제국의 왕 최측근의 자리에서 하늘 신의 종의 자리로 내려온다. 더 이상 두 주인사이에서 저울질 하지 않는다. 느헤미야는 담대하게 예루살렘에는 저들에게 돌아갈 몫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도 제국의 한 복판에서 산다. 제국의 교육과 제도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가장 위에 올려 놓기 얼마나 어려운가? 제국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왜?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다. 큰 자로 살기 위해서다. 제국(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큰 자, 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끊임없이 작은 자로 살라고 하신다.

느헤미야 1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기도일지를 적었다.

느헤미야가 형제라고 부르는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유다의 형편을 ‘큰 환난과 능욕을 받는다’로 예루살렘의 상황은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고 말해준다. (포로 1차귀환 이후 성전이 재건된지 또다시 70년 이상이 흘렀다. 그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기도문을 남겼다.

당연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 하나님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마땅히 경외할 하나님이시다.) 느헤미야는 이 하나님이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임을 알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약속에 미쁘신 분이심을 알고 기도한다. 한편으로는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언약을 파기당할 존재임을 알고 기도한다.)

느헤미야는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한다.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 조상들이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한 것, 즉 모세의 율법들을 지키지 않을 것을 시인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여러나라에 흩어진 것이 하나님의 벌이라는 것을 안다고 기도한다. 한편으로는 주님께 돌아와 주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한다. 기도할 자격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으로부터) 구속하신 주님의 종이요 주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느헤미야는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기도한다. (아마도 혼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유다를 방문하고 돌아온 하나니와 친구들, 혹은 느헤미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간구를 한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느헤미야는 왕의 술 관원이었다.

출애굽후 가나안 입성까지 광야 40년이 있었고 그후 가나안 정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완전정복?은 없었다.) 바벨론 포로부터 1차귀환까지 약속대로 70년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완전 귀환은 없었다. 느헤미야는 1차귀환이후 78년이 지난 에스라의 2차귀환 후 다시 14년정도 지난 사건이다. 다시말하면 귀환 1세대는 거의 살아남아 있지 않은 때다.

그러니까 첫 20년 성전 재건 기간을 포함하여 근 한 세기 동안 변한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하나님나라의 재건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성전을 재건하고도 말씀을 회복하기 위해서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에스라가 백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14년이 지나서야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성벽재건이라는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한 개인의 신앙과 교회의 성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론 현대 사회의 일년은 느헤미야 당시의 백년에 해당할 만큼 빠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시간 싸움이다. 성전되신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신다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도 말씀을 먹고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리고 삶이 온전히 그리스도로 옷입었음을 드러내는 것은 평생의 일이다.

느헤미야는 기도한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우리도 세상 앞에서 은혜를 입어야 한다. 나는 오늘 누구 앞에서 은혜를 입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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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그에게 남아 있는 유대인의 뿌리는 부림절 축제를 즐기면서 생겼을 것이다. 아마 다니엘과 세친구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심장 수산성에서 자란 그는 분명 종교적으로 소수자였다. 한두세대 앞선 에스더서에 나오는 모르드개 이야기만 읽어도 분명해 진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제국의 종교가 될 수 없었다. 느헤미야의 부모는 (조상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1차귀환 당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것을 포기하고 제국의 수도에 남았다. 느헤미야 역시 십여년전 에스라의 2차 귀환 때 함께 하지 않았다. 포로귀환은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된 사건이었었는데 신실한? 느헤미야가 함께하지 않은 것은 이상할 정도다. 그러니 느헤미야는 성경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지 몰라도 신앙인이라기 보다 철저하게 제국의 교육과 제도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느헤미야를 바꿔놓은 사람들이 유다를 방문하고 돌아 온 형제 하나니 일행이었다. 1차 귀환후 성전이 20년이나 걸려 재건되었다. 그리고 그 후 58년이 지나서야 ‘말씀 재건’을 위해 에스라가 적은 무리를 이끌고 2차 귀환을 했다. 그리고 14년 정도가 흘렀다. 1차귀환때부터 따지면 근 한세기가 지난 셈이다. 그런데 유다와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온 형제 일행은 유다는 여전히 큰 환란과 능욕을 받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성벽은 무너진 채요 성문도 불탄 채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바뀐게 거의 없었다. 성전이 재건 되었어도 말씀을 가르쳤어도!

느헤미야는 울고 또 울었다. 신앙심에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멸망당한 고국, 모국의 모습에 울고 또 울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 인지상정이 느헤미야를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서게 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한 것도 신앙심에서라고 굳이 볼 필요가 없다. 모르드개가 금식한 것도 굳이 신앙심에서라고 말할 수 없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도 기도라는 단어도 나오지 않는다. 요나 때 니느웨 사람들 처럼 고대 근동 사람들이 회개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신앙심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한 것이라기 보다 인지상정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했다. 느헤미야가 울고 또 울 때 소수 민족의 하나님 야웨가 드디어 언약을 지키시고 긍휼를 베푸시는 주님으로 찾아주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들은 성경이야기와 부림절 역사 속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느헤미야를 만나주신 것이다.

느헤미야는 혼자 기도한 것이 아니다. 종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1장을 맺는다. 함께 기도한 사람들이 하나니 일행이었는지 가족인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구체적으로 기도한다.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드러나는 삶을 살게 해 달라는 헌신의 기도다.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다. 대제국의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느헤미야의 기도다. 한없이 높아졌던 느헤미야가 드디어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느헤미야가 주님 앞에 은혜를 입자 사람의 (느헤미야의) 말과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족: 신앙심이 된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지상정이 바른 신앙인의 첫걸음이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 인문학 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제국의 한복판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속에서 살면서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돈과 섹스가 주류인 문화속에서 살면서 한없이 높아지려고만 하면서 느헤미야 같은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제국의 수도에 살면서 하가랴는 아들 느헤미야를 신앙으로 잘 키웠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제국의 치열한 교육제도하에서도 적어도 바른 인지상정을 가르쳤던 것 같다. 사람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이 신앙보다 먼저다. 그러면 주님이 꼰대신앙이 되지 않도록 그 마음을 만져주실 것이다. 신앙교육 신앙교육하는데 신앙은 교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국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눈물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첫장이라 이래저래 잡생각이 많이 떠오른다.

 

 

 

마태복음 17:14-27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무리에게 돌아오셨을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한다. 덧붙이기를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후 아이를 데려오게 하시고 축귀하심으로 치유하셨다. 예수님은 책망하시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함께 하시건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세상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마태는 10장을 시작했었다. 제자들에게 축귀의 권능이 주어졌었다. 그런데 남아 있던 제자들이 이번에는 실패했다. 그들은 조용히 예수님께 자신들의 실패이유를 물어보았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하셨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라고 앞에서도 묵상했다. 믿음이 없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칠십인 추수꾼 제자들이 돌아와서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 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남아 있던 제자들이 주의 이름에 의지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능을 의지 했다고 할 수 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답을 포함시킨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발휘된다. 임마누엘이다.

예수님은 다시한번 죽으심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나 제자들에게는 죽음만 들리지 부활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근심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이르셨을 때 성전세를 걷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왜 예수님은 성전세 반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내실 것이라고 답하고 예수님께 가니, 예수님께서 먼저 베드로에게 세상 임금들이 세금을 아들에게서 받느냐 타인에게서 받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타인에게서 받습니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그렇다 아들은 세금을 면제 받는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이 (세리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물고기를 잡아 물고기 입에서 얻은 한 세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세를 내라고 하셨다.

진정한 임마누엘은 주님의 권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아버지와 사귀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신용카드를 사용한다면 거부된다. 신용카드에 문제 있어서가 아니라 카드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이름으로 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이것은 적절한 예는 아니겠지만 믿음이란 기도란 내 뜻대로가 아니라 부모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종교세 논란도 잠잠케 한다.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종교세를 내야한다. 마지 못해서라도 내야 한다. 핵심은 면제를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어도 내야한다는 것이다.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모든 사람들의 의무에 동참하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항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신다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들이랴.

마태복음 17:1-13

엿새 후.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후 엿새 후다. 그러니 아직 지난 주 설교의 잔상이 남아 있을 때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다.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가셨을까? 역발상으로 한다면 이들이 가장 배운 것이 없는 (구약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어부들이었기 때문에 말씀보다는 현장학습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도 같은 어부 출신이지만 세례요한의 제자였고 빌립도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할 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을 우리가 만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같은 마을 어부출신인 것 같지만 말씀에 대하여 아는 것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하여간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세 제자 앞에서 변화되어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도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보였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지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예수님이 미쳐 답하시기 전에 하늘에서 소리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세 제자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심히 두려워 땅에 엎드렸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한 행동이 연상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셨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모세와 엘리야는 간 곳 없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 내려 오는 길에 예수님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제자들은 서기관들에게서 주워 들은 것이 있어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말이 맞다고 하시며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함부로 대우했다고 답하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고난 받으실 것이라고 하셨다. 이때 제자들은 성경에서 미리 오리라 한 엘리야가 세례요한인 줄 깨달았다.

// 텔레포트일까?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을 만났다. 어떻게?는 궁금하지만 답이 없다. 그러나 왜?는 생각할 수 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뜻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이다. 거기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셨다. 어부였던 세 제자에게는 이야기로만 들었던 구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이해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천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변화산상에는) 황금 집은 고사하고 초막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베드로가 초막을 지을까요 하고 물었을까? 베드로가 한 유일한 반응이다. 거할 곳이 많지만 좋은 집이 있는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다. 해 같이 빛나며 빛같이 흰 곳이다. 순결한 곳이다. 죄가 없는 곳이다.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만 있는 곳이다.

산에서 내려 오면서 제자들은 서기관들이 한 말을 기억하고 질문했다. 드디어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묵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설명해 주신다. 하늘 음성의 마지막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였다. 예수님이 없으면 구약의 말씀이 완성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는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참 뜻을 깨달을 수 없다. 이렇듯 변화산 사건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까? 율법이 사랑으로 완성된 하나님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