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19-26

요한복음 4:19-26 (공동번역)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를 과연 예언자라고 인정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느님께 예배드릴 곳에 관해 묻는다. 자기 조상들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유다인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 이산 혹은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따지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장소를 따지는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유다인?)는 우리가 예배 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을 다 알려주시겠지요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내가 바로 그 사람(메시아)이라고 말씀하셨다.

요4:19-26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여자였다. 사마리아에도 남은 자가 있었다. 예수를 선지자로 알아 본 사마리아 여자의 갈급함은 육적 목마름에서 영적 목마름인 예배로 바뀌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묻는다. 사마리아지역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장소문제가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장소를 따지는 것은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야 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유대인들은 적어도 이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영적으로 진실(참)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는 못했다. 하나님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영이신 하나님께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기 위해서는 메시아를 통해야 한다. 놀랍게도 사마리아 여인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메시아라고 밝히셨다. ////우리도 영으로 참 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반복하지만 (요8:31, 15:7)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하는 방법은 예수의 말씀에 거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는 방법도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은 결국 말씀을 마음에 두고, 말씀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한다.

요한복음 4:9-18

요한복음 4:9-18 (공동번역)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 유다인이면서 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지 물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그 여자가 자신에게 먼저 요청을 했을 것이며, 그러면 그 여자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것이라고 대답하셨다. 그 여자는 우물은 깊고 두레박도 없는 예수께서 어디서 샘솟는 물을 주시겠다는 말씀인지 반문했다. 그리고 이 우물은 조상 야곱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운 우물인데 예수께서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사르겠지만 자신이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주시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소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그 여자는 예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그 물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그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남편이 없다는 말은 숨김없는 말이기는 하나, 그 여자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그 여자의 남편이 아니니 그 여자가 바른 대로 말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요4:9-18
//누구에게나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는 없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없어야 한다. 물론 쉽진 않다. 아니 억수로 어렵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어야 가능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말씀에 거하는 것이요 (요8:31), 예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 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요15:7) 것이다. 결국 우리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려면, 예수가 누군지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가 누군지 모르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우상신에게 비는 것과 다를게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대신 아버지 하나님께 구해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약한 존재다. //예수께서는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필요한 것이 육신의 갈급함을 해결하는 물이 아니라 영혼의 해갈에 필요한 생수임을 아셨다. 예수께서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어도 한 사마리아 여인은 여전히 육신의 생수를 구한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남편 이야기를 꺼낸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다. 예수께서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첫 남편이 죽자 동생들을 차례로 남편으로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음욕을 채우기 위해 다섯 남자를 만난 것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다섯 형제에게 차례로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남은 시동생이 성장하기까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있듯이 사마리아 인이 어쩌면 율법을 더 문자적으로 실천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정죄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신다. … 사마리아 여인은 이랬든 저랬든 사회적 약자인 과부였을 것이다.

요한복음 4:1-9

요한복음 4:1-9 (공동번역)

이제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 더 많아졌다는 소식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 (사실 예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베풀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충돌을 의식해?)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기로 했다. 갈릴래아로 가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거쳐야만 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라는 동네에 이르셨다. 옛날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으로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먼 길에 지친 예수께서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왔다. (앞에서 한 번 언급했지만 요한복음의 시간은 헬라어 원어시간으로 읽는게 더 맞을 수도 있다. 그러면 저녁 6시 해질녘이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로 나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가고 없었다.

요4:1-8
//요한복음의 시간은 헬라식으로 일관되게 읽는게 맞다고 본다. 그렇다면 한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 나온 시간은 해질녘 저녁 6시경이다. 예수께서 아침 일찍(6시)부터 걸어서 한나절(6시간)만에 (정오에) 먼 길에 지쳤다기 보다는, 하루 종일 (12시간) 걸어서 저녁 6시에 지쳤다고 읽는 게 더 맞다고 본다. 때마침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시내에 들어갔다는 것도 저녁 때라는 것을 방증한다. (점심식사가 생긴 것은 역사적으로 산업혁명 때라고 알려졌다.) 그렇다면 한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 특별한 시간에 우물가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일상을 따라 우물가에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먹을 시간이라 우물가에 안 나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일상에서 주님은 우리들을 만나주신다. 주일예배나 기도시간이나 금식이나 절기나 특별한 시간에도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겠지만, 주님은 일상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따라서 우리도 일상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한다. 일상이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의 자리다. 우리를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함께하신다. 주님은 모든 일상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3:22-36

요한복음 3:22-36 (공동번역)

예수께서 유다지방으로 가셔서 그곳에 머무시며 세례를 베푸셨다. 한편 요한은 살림에서 가까운 에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이 요한을 찾아와 세계를 받았다. 아직 요한이 감옥에 갖히기 전이었다. 요한의 제자들이 어떤 유다인들과 정결예식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어떤 유다인들은 요한을 찾아가 요한이 증언하던 그 분이 (예수가)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예수에게 몰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입을 열었다.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앞서 사명을 띠고 온 사람이며, 너희들(자신의 제자들)이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했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며, 신랑의 친구도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며 기쁨에 넘치듯, 요한 자신도 예수께서 세례를 베푼다는 소식에 이런 기쁨으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요한은 예수는 더욱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어느 요한의 말인지 확실하지 않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시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 하시는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맡기셨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 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요3:22-36
//36절을 개역개정에서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고 번역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대조하지 않고 믿는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로 대조한다. 앞의 ‘믿는 자’의 믿음도 신뢰/의탁이라는 동적 믿음이다. 뒤의 ‘순종하지 아니하는’은 의지적으로 불신한다는 뜻이다. 곧 의지적으로 거스린다는 동적 불신이다. 우리는 믿음을 지적 정신적 영역으로 미뤄둬서는 안 된다. 일상으로 끌고 나와야 한다. 믿음과 순종은 동의어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예수와 경쟁하지 않았다. 둘이 경쟁했다면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께서 모든 것을 얻어야 하고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예수님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세워져 간다. 내가 흥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흥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가 썩어져야 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3:9-21

요한복음 3:9-21 (공동번역)

니고데모는 어떻게 성령으로 새로 날 수 있는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고 반문하신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고 반문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고 하셨다. 구리뱀을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래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증거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요3:9-21
//축구나 야구를 좋아하는 나는 가끔 외국경기를 볼 때 관중석에서 John316 을 들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 (우리동네에는 John316 이라는 헤어숍도 있다.) 나름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려는 신도의 열정을 표현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고려한다면 요3:16은 성령으로 새로 나야만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경기장 관중석에서 요316 팻말을 들고 있는다고 전할 수 있는 단순한 메세지가 아니다. 물론 나처럼 저게 무슨뜻이지 하고 찾아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야 이해할 수 있는 구절임에 틀림없다. //요3:16절이 복음인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모두 죄인으로 판결 받기 때문이다. 요한은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최종심판은 마지막날에 이루어지겠지만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다면 이미 죄인으로 판결받은 것이다. 요한은 여기서도 믿음을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라고 규정한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한 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에 예수께서 믿음으로 대해주셔야 나의 믿음이 맹신이 아닌 의미있는 믿음이 된다. 내가 진리를 따라 살아갈 때 주님은 나에게 믿음으로 대해주시리라. 서로에게 신실함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죽어 마땅한 (아니 죽어있는) 우리들을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할 때다. 하나님의 믿음에 우리도 믿음으로 반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