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16-23

마태복음 10:16-23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라. 슬기와 순진이 만나야 한다. 계산에만 빠르면 순진할 수 없다. 순진하기만 하면 속기 쉽상이다. 어떻게 하면 슬기로운면서도 순진하고, 순진하면서도 슬기로울 수 있을까?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실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 곧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된다. 내가 말하지 않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니 슬기롭고 순전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끝까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박해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한 고을에서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인자가 온다는 뜻은 무엇을 가리킬까? 돌아가시기 전이니 재림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 곧 ‘인자’로 드러나신다는 뜻이 아닐까? 하늘 나라의 핵심은 인자이신 ‘예수’ 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다. (말장난 같지만, 예수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임마누엘이다.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니의 영, 곧 성령의 충만을 받는 삶이다. 이것만이 이 땅에서 끝까지 견디게 해 준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5/

마태복음 10:1-15

마태복음 10:1-15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열두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시게 하셨다. 열두제자의 이름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와 다대오 시몬 유다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내보실 때에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 다니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선포하여라. 앓는 사람을 고쳐주며, 죽은 사람을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쫓아내어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샬롬’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며,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 오게 하여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 하고 지침을 주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4/

//우선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되돌아 오는 평화

마태복음 9:27-38

마태복음 9:27-38

예수께서 가시는데 눈 먼 사람 둘이 (마태는 둘을 정말 좋아한다.)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면서 예수를 뒤따라 왔다.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 가시자, 그들이 따라 들어왔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하고 물으셨고, 그들은 “예, 주님” 하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지역에 퍼뜨렸다.
이번에는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한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말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무리는 “이런 것은 이스라엘세서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놀랐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온갖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께서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후,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라고 말씀하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3/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 믿음대로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생각대로 된다는 뜻은 분명히 아니다. 내가 아는 예수의 능력대로 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예수께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하시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진다.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것, 귀신들린 사람이 귀신에게서 놓임을 받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을 보는 것, 귀신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하늘 나라의 복음이다.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선한 목자로 오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을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기도한다면, 우리 자신이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추수꾼으로 초청하시는 것이다. 기도는 주님의 뜻을 듣는 시간이다.

마태복음 9:14-26

마태복음 9:14-26

요한 예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은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없다고 하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 금식을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또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이 없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대면 새로 댄 조각이 그 옷을 당겨서 더욱더 크 찢어진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부대는 못쓰게 된다. 새포도주는 새가죽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 된다.” 하고 말씀하셨다.
지도자 한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를 따라가셨다. 제자들도 뒤따라갔다. 가는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그 여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말씀하시자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이미 장송곡을 부르며 떠들고 있었다. 예수께서 “모두 물러가거라. 그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무리를 내보내신 다음에 예수께서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이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2/

//지도자는 예수께서 손을 얹어 주시면 죽은 자기 딸이 살아 날 것을 믿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을 믿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죽은 믿음이다. 지도자는 예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간청했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께 나아와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댔다. 믿은대로 행동을 한 것이다. 믿음은 사념이 아니다. 사변적 가르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다. 순종이다. (오늘날) 세상사람들이 우리의 가르침을 크게 비웃은 이유는,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가 떠벌이는 믿음대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ㅠㅠ

마태복음 9:1-13

마태복음 9:1-13

예수께서 배를 타고 다시 자기 마을에 돌아오셨다.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누인 채로 예수께로 날라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기운을 내라, 아이야,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소리를 율법학자들이 듣고,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속으로 말했다.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하는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에 어느쪽이 더 말하기 쉬우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네 침상을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셨다. 그는 일어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무리는 이 일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런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예수께 그곳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는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식사중에 많은 세리와 죄인이 오자, 예수와 그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 음식을 드시오?”하고 따졌다. 이것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고 말씀하셨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2/01/

//’집으로 가거라’ vs ‘나를 따라 오너라’ – 친구들의 믿음으로 죄 용서를 받은 중풍병자에게는 ‘침상을 거두어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리는 세리 마태에게는 ‘나를 따라 오너라’ 부르셨다. 성도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특별한? 일에 부르심을 받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말씀에 대한 순종에는 차이가 없다. ‘가라’ 하시면 가면되고, ‘오라’ 하시면 오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으로 이런 저런 악한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도 율법학자들은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권위’를 보지 못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저들은 예수께서 만나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이런 태도는 살인이나 다름없다고 가르치시지 않았던가?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는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은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 곧 순종의 삶을 살아내는,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글깨나 배운 마태가 이제 세관 장부 대신에 복음서를 쓰게 된것에 주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