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1-15

1-15 //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 넘겼다. 빌라도가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고 예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 라고 신분조사를 마치셨다.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고발하는 내용은 (아마도 사형을 이끌어내기 위해)  많았다. 빌라도는 예수께 대제사장들의 고발에 대해 예수께 물었으나 예수께서는 침묵하셨다. 예수의 침묵에 빌라도는 놀랐다. (증인도 없는 말도 안되는 고소장이라 예수께서 변론하실 것을 기대했었나 보다) 빌라도는 명절의 전례에 따라 예수를 (빌라도는 고소인들을 놀리는 양,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다) 놓아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지만 무리들은 민란을 꾸미고 민란 중에 살인까지 한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요구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시기심에 예수를 고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대제사장들이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무리를 부추겼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예수를 어떻게 할까라고 물었다. 무리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혔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지만 무리는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다.

// 대제사장이나 빌라도나 재판장으로서의 권위를 팽계치고 만다. 대제사장들이 재판관에서 예수에 대한 고발자가 되었듯이, 빌라도도 재판관에서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무리에게 재판권을 넘긴 자가 되고 말았다. 명절 새벽. 이교도 빌라도는 유대 명절이면 휴일일 것인데 새벽부터 재판을 맡았다. 물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절 특별사면을 어차피 시행할 계획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하여간 재판은 예수의 묵비권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재판관 빌라도의 판단은 증인심문도 필요없는 무죄방면이었지만 고발인과 방청객들의 생각은 달랐다. 무리들의 판결은 십자가형이었다. 재판관이 었던 빌라도는 유대 명절분위기에 휩쓸려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만다.

>> 유대인의 왕. 빌라도는 심문에 앞서 피의자의 신분을 확인한다. 그런데 이름을 묻지 않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고발장에 예수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던 것일까?  어쩌면 빌라도는 ‘예수’를 ‘예수’ 곧 구원자 해방자라고 부르길 꺼려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대인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으로 쉽게 불려졌겠지만 ‘구원자, 해방자’ 라는 이름은 이방인인 빌라도가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빌라도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게 하셨다. 다만 만유의 주이신 예수께서는 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신을 한정짓는 지위에 그렇다고 답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적어도 자기 백성에게 왕으로, 곧  자신이 유대인의 왕으로 이땅에 오셨음을 알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들으라고 시인하셨을 것이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부른다. (빌라도에게는 예수를 구원자 해방자로 부르기보다, 로마 속국의 왕으로 대하는 게 편했을 것이다.)

>> 예수의 십자가 형은 일사천리로 확정되었다. 빌라도가 나름 늦춰볼려고, 아니 무죄 방면하려고 애를 써봤으나 (다른 복음서 저자는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왕에게 보냈다 다시 받은 이야기도 포함한다), 하루도 안돼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확정되었다. 과연 물리적 시간을 고려할 때 이 모든 일이 무박이일,  시간적으로는 24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도 생긴다. 그러나 계획은 사람이 세우나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너무 상투적인 답일까?)

>> 예수께서는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이 때, 이 잔을 받으신다. 불의에 대적하지 않으신다. 불의를 못본척하기 위해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갚기 위해 침묵하신다. 십자가의 길도 불의를 대적하는 방법이다. 선으로 악을 갚으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를  바라본다.

마가복음 14:53-72

53-54/66-72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있는 대제사장 잡으로 끌려갔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쳤던 베드로는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 집으로 들어가 그집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었다. 아랫뜰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베드로를 주목하여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게 있었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아랫뜰에서 앞뜰로 피했다.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이사람도 예수당 사람이라고  다시 말했다. 베드로는 또 부인했다. 잠시 후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예수 당 사람이 맞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라며 저주하며 맹세했다. 닭이 곧 두번째 울었다. (삼경의 종소리가 울렸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삼경의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

// 대제사장 마당까지 따라간 베드로.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 목자였던 예수께서 잡히셔서 목자를 잃은 양이 되었으니 예수가 팔리는 현장에서 도망치는 것은 십분 이해될 수 있다. 그래도 멀찍이나마 예수를 따랐다. 그런 베드로가 공회에서도 아니고 대제사장, 장로들, 서기관들 앞에서가 아니라 종들, 그것도 여종의 고발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한번도 아니고 세번째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다. 어느덧 삼경이 (닭우는 시간이) 되었고, 삼경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베드로는 그제서야 예수께서 자신이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울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른 것이다. 베드로는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제서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55-65 대제사장들과 온공회원들은 예수를 죽일 증거를 조사했으나 찾지 못했다. 예수를 치기위해 거짓 증언하는 자들을 세웠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증인은 예수께서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동안 짓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이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는 고소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예수께 직접 물었다.  예수께서는 침묵하셨다. 대제사장이 이번에는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 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대제사장은 더이상의 증인이 필요없다고 했다. 예수를 신성모독으로 사형판결을 내렸다. 제사장의 이 판결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 침을 뱉으며, 얼굴을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며 조롱했다. 심지어 하인들도 예수의 뺨을 때렸다.

// 어둠이 짙은 때.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심문을 받았다. 저 아랫뜰에서는 자기 발로 들어온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했는데, 윗뜰 (임시) 공회에 끌려온 예수께서는 거짓증언에는 침묵하시고 진리/진실, 곧 ‘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라는 질문에는 ‘내가 그니라’ 라고 시인하셨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말해 예수께서 자신이 구원자로 이땅에 오셨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 최후의 심판자이심을 선언하신 것이다. 지금은 예수께서 불법적으로 재판을 받고 있지만 마지막 때 심판장으로 다시 오셔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분이시라고 밝히시는 것이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예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한다. 그러나 어둠에 사로잡혀 재판장이 되어야 할 대제사장이 오히려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하고 재판을 지켜보던 청중이었던 무리가 예수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죄한다.  당연히 정상적인 법집행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무리가 그저 예수를 조롱할 뿐이었다. (그러나 조롱당해 마땅한 것은 이 불법적인 재판이어야 했다.)

>> 오늘 사건은 모두 한밤중에 일어났다. 예수의 잡힘, 베드로의 부인, 예수께 신성모독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까지 모두 어둠 중에 일어났다. 빛이라고는 예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라고 시인하신 단 한구절에서만 빛난다. 마가가 말하려고 하는 복음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이 한 줄기 빛이 복음의 정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요3:16절을 말씀하신 후에, 불신은 곧 심판을 이미 받았음을 뜻한다고 하셨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그리고 이들 편에 선 무리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한 사람들이다.

>>>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고 보내셨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그 아들 예수께서 심판자로 오심을 기억하자. 각자 그 행위대로 판결받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와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가 대조된다.  즉 믿음은 순종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산다. 순종으로만 산다. (오늘 묵상은 마가복음이 아니라 요한복음  3장으로 끝났다.)

마가복음 14:43-52

43-52 // 예수께서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실 때 가룟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받은 무장한 무리와 함께 왔다. 마가는 더이상 가룟유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예수를 파는 자라고 한다. 예수를 파는 자가 무장한 무리에게 자신이 입맞추는 자가 예수라고 암구호를 정했다. 예수를 파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 입을 맞추자 무장한 무리가 예수를 잡았다. 예수 옆에 서있는 자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다. 예수께서는 무장한 무리에게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무장하여 나를 잡으로 온것도,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칠 때 너희가 나를 잡지 않은 것도 다 성경을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잡히시자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 한 청년은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예수께서 잡히시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했다.

>> 가룟유다는 예수를 파는 자가 되었다. 더이상 열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예수를 파는 자다. 그는 무장한 무리들에게 예수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고 하였다. 갈리리 광풍과 바다도 잠잠케 하는 능력을, 그 누구도 제어하지 못한 이천귀신이 들렸던 사람을 제어할 능력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천만의 말씀. 아니다.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았다면 예수를 잡아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룟 유다는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를 팔 수 있었다.

>> 예수 옆에 서 있는 자 중 하나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다. (요한은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었다고 누군지 밝힌다. 종의 이름도 ‘말고’라고 기록한다.) 요한의 기록대로라면, 열두제자 중의 하나인 베드로가 칼을 지니고 다녔다는 뜻이 된다.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에도 칼을 차고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 말고도 예수 주위의 사람들이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고 한다. 예수를 팔지 않은 제자들도 여전히 예수를 몰랐다. 기도하는 자리에 함께 갔지만 십자가에 팔리는 자리까지 예수와 함께 있지만 이때와 이잔에 순종하신 예수를 몰랐다. 가룟 유다와 다를게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마지막 순간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 예수를 몰랐으니 칼을 의지하고 예수를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

>>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이 성경을 이루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도 예수를 몰랐다. 알았다면 정녕 십자가에 예수를 못박았을까? 아닐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밖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영생, 곧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살 수 없다. 한 청년처럼 벌거벗고서라도 도망칠 수 밖에 없다. 예수를 부인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를 모르니.

>> 그리스도 예수로 옷입어야 한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아들이) 된 사람이라면, 곧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이라고 갈라디아서 성도들을 가르친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면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말라고 로마성도들에게 편지한다. 성부 하나님을 힘써 알자. 그리스도 예수를 힘써 알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다. 임마누엘이요 영생이다.

>>>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가기 위해서는 성경을 전통과 관습대신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내야 한다. 검과 몽둥이 대신 사랑으로 적용해야 한다.

마가복음 14:32-42

32-42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예수게서 기도할 동안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좀 더 가셨다. 기도의 자리에 나가시는 예수께서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더 가셔서 죽음의 고민에 대해 무거운 마음으로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빠 아버지에게 이 때가 지나가기를 간구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돌아오시니 베드로를 비롯한 야고보와 요한이 자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신후 (마음에는 아버지 뜻대로 하고 싶지만 육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 예수께서 다시 돌아와서 보니 제자들이 피곤해 자고 있었다 예수께서 깨우셔도 비몽사몽 정신이 없었다. 세번째 기도하신후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는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릴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다. 자고 쉬는 제자들을 깨우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면서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하셨다.

//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 기도하러 나가시는 예수의 마음은 심히 놀랍고 슬펐다. 아들의 생명을 내놓으시는 아버지의 결정에 아들이 심히 놀라고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차마 모든 제자들을 다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셋만 데리고 나가셨다. 그러나 이들 셋에게도 죽음에 대한 고민이 가득한 기도 제목을 온전히 나누지 못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세 제자들에게 나누지 못하신 채 기도부탁을 (아마도 기도 내용과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을 잘 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곤, 혼자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셨다. 예수께서는 이때와 이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돌아오셨을 때 세 제자는 피곤해서 자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지 않아야 할 분은 예수셨다. 그래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자신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있을 수 있도록 기도부탁을 하시는 것 처럼 들린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도 결국은 예수께서 스스로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린다. 예수께서는 다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다. 이때와 이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예수께서 다시 세 제자에게 돌아왔을 때, 셋은 여전히 피곤해서 자고 있었다. 예수께서 깨워도 그들은 비몽사몽간에 정신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세번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제자들에게 돌아왔다. 아버지의 원대로 이때와 이잔을 받으시기로 하셨다. 제자들에게 때가 왔도다라고 하셨다. 자신이 팔릴 것이라고 두번이나 강조하신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다.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제자들을 십자가의 길에 초청하신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다. 하나님나라는 이렇게 예수의 팔림으로 가까이 왔다. 이때와 이잔을 받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순종하시는 예수와 달리 제자들은 눈이 충혈될 정도도, 비몽사몽간에 예수의 기도에 동참했지만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했다. 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아예 잠을 잤다. 깨어 기도하는 것은 맑은 정신에 기도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치 종이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깨어 기다리는 것 처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깨닫도록 기도하는 것이라고 적용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다리는 것이 기도의 핵심이다.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도는 하나님 뜻이 나를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이 곧 기도다. 예수께서 자신이 팔릴 것을 아시면서도 순종하시는 그 길이 하나님나라의 길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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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22-31

 22-26a 유월절 식사가 시작되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제자들에게 마시게 하셨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유월절 식사는 찬미로 끝났다.

// 식탁의 교제는 하나님의 축복과 감사 기도의 자리다. (요한복음에서는 가룟유다가 떡 한조각 받고 나간 것으로 묘사되나) 가룟유다가 여전히 참여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식탁에 그냥 손님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곧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식구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식탁의 전식은 배신이었지만  메인코스는 축복과 감사기도였고 후식은 찬미였다. 바울은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하나님나라는 식탁의 주인되신 예수께 가족으로 (식구로) 참여하는 나라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에서 만날가족들과 다시 식탁에 마주 앉을 때까지 다른 식탁의 교제는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26b-31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감람산으로 가셨다. 마가는 유월절 식사를 가룟유다의 배신 이야기로 시작하더니 감람산에서는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를 버릴 것이라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것은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라는 말씀의 성취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살아난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하신다. 십자가와 부활의 일정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께 다른 사람은 예수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러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늘 밤에 닭이 두번 울기전에 베드로가 세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힘주어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 다른 모든 제자도 베드로와 같이 말했다.

// 식탁에서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던 제자들. 예수님은 제자들도 배신은 아닐지라도 예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오늘 밤에 닭이 두번 울기 전에는 전현철 님이 올려주신 이진경 교수님의 ‘닭은두번 울지 않았다’에 나오는 ‘오늘 밤 채 삼경이 끝나기 전에’, 즉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끝나기 전에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을 목자 잃은 양들이 흩어지는 것에 대한 말씀의 성취라고 하신다. 가룟유다의 배신처럼 적극적으로 예수를 팔아 넘기는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으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을 목자을 잃은 양떼에 비유하셨으니, 목자를 배신하는 양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더이상 듣지 못하는 처지가 될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양떼는 각기 제길로 간다. 각기 제길로 간 제자들을, 곧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를 부인하는 자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도 어리석다 하셨다. 하물며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랴.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지혜롭다고 하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라고 바울을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했다. 우리에게 목자를 잃은 양 같이 살지 말라고 하신다. 선한 목자되신 예수의 음성을 분별하라고 하신다. 보혜사 성령께 도우심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될 날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