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1-14

서른째 해 넷째 달 초 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자신에게 보인 때와 장소를 분명하게 기억한다. 혹시 ‘때’를 잊을까 하여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사로잡힌 지 오년 그달 초닷새라고 환상을 본 ‘때’를 이중적으로 기록한다. 장소도 갈대아 땅, 곧 바벨론의 그발 강가라고 명확히 한다.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제사장이라고 직분을 소개한다.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를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고 스스로 주석을 단다. 그리고 자신이 본 환상을 기록한다.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온다 – 노아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떠오른다.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인다 –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 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떠오른다. 에스겔은 하나님을 심판의 때에 자신을 부르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을 바로 보는 것은 아니다. 에스겔이 보는 것은 사람과 비슷한 네생물의 형상이다. 사람과 비슷하나 네 생물은 얼굴이 네개, 날개도 넷씩 있으며 곧은 다리를 가지고 있다.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같이 빛난다. 네개의 날개 밑으로는 사람의 손이 있다. 에스겔은 날개는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날개짓을 하지 않고 네 날게 모두 가는 방향으로 곧게 행한다고 묘사하는데 아마도 날개짓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글라이더 처럼 바람을 타듯이 움직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리라. (뒤에 보면 날개짓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네 얼굴은 앞은 사람의 얼굴, 오른쪽은 사자, 왼족은 소, 뒤는 독수리의 얼굴을 가졌다고 묘사한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두 날개를 펴서 서로 서로 맞잡고 두 날개로는 몸을 가렸다고 묘사한다. 네 생물은 ‘영’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한다고 묘사한다. 에스겔은 네 생물을 (사람의 형상이라고 앞에서 말했는데) 숯불과 횃불 모양 같다고 덧붙인다. 네 생물사이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모습, 영광의 광채가 충만한 모습을 묘사한다. 번쩍이는 번개로 하나님의 위엄을 묘사한다. 네 생물은 영이신 하나님의 움직임에 (뜻에) 따라 번개같이 즉각적으로 순종한다.

나이 서른에 제사장직을 맡은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보여 주셨다. 태평시절이 아닌 포로시절에, 자기 나라가 아닌 감옥과 같은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셨다. 그러나 얼마나 희미한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네 생물(천사?) 가운데 임재하시는 광풍과 번개로 밖에 묘사될 수 없으셨다.

그러나 에스겔 후 이천사백여년 후 주님이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사람들 사이에 나타내셨다. 물론 이때도 평안의 때가 아니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다. 지체없이 순종하라고 하신다. 지체없이 순종할 때 주님은 순종하는 자들 가운데 임재하신다. #임마누엘.

세상은 지체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볼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다. 자기 잘났다고 자기 의만 드러내는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가 필요한 때다. 선교지에서도 마찬가지다. …

 

 

데살로니가후서 3: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들아~~’ 하고 부를 수 있는 지체가 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위로만이 아니라 훈계하고 명령을 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형제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런데 분위기 썰렁하게 바울은 형제들에게 게으른 자와 바울이 가르친 전통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떠나라고 명한다. 형제에도 두 부류가 있다니. 우리는 아직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형제라고 불러도 다른 길을 가는 형제에게서 떠나야 한다. 떠나라는 의미는 조심해서 똥을 밟지 말고 피하라는 뜻이다.

불순종의 형제를 떠나는/피하는 방법은 바울의 가르침을 본받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자신들이 어떻게 순종의 본이 되었는지 떠올리게 한다. 먼저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말해 일관성 있게 일했다.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폐를 끼지치 않았다. 복음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공짜 밥을 요구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먹고 살았다. 바울 일행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말씀을 배우는 자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받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권리를 누리는 것보다 스스로 자족하는 것이 더 나은 본이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수고해서 먹을 것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바울일행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으면서 이미 본을 보였다. 심지어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데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게으르게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스스로 일해서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다시 명한다. 게으르지 않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선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선한 일은 착한 일이다. 주로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돌아보는 일을 가리킬 때가 많다.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를 돌봄으로 불순종하는 자들을 창피하게/부끄럽게 만들라고 명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때까지 그들을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고 한다. (원수들에게도 그들이 얼굴이 벌게 지도록 부끄럽게 하기까지 선을 행하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시다. 때마다 일마다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다. 임마누엘의 주님이시다. 모두가 형제가 되어 이 평강과 임마누엘을 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바울은 친필로 이 편지를 쓴다. 싸인까지 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명령할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한 대로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의미심장안 표현이 아닐까? 형제에 대한 권면은 형제를 세우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로 세워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함께 지어져 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임마누엘은 은혜로만 누릴 수 있다. 아멘

 

데살로니가후서 2:13-3:5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라고 부른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항상 감사한다고 편지한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영성과 지성, 즉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고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지고 계셨던 계획이라고 밝힌다.

바울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를 복음으로 부르신 이유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도록, 즉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로 부르셨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믿음위에) 굳건하게 서서 말로 편지로 가르친 전통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전통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의 전통이지 유대인들의 꼰대 전통이 아니다. 그래서 말로 편지로 가르친, 곧 신약시대의 전통을 지키라고 한다. 그러나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뜻과 (모든 선한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성부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고난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로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리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부탁을 한다.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의 말씀을 잘 가르쳐,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잘 퍼져나가 영광스럽게 되었듯이 바울 일행이 부당한 사람들에게서 건짐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를 바라는 기도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자를 적은 무리라고 하셨다. (눅12:32) 미쁘신 주님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은 무리에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을 통하여 전해 받은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했고 순종하고 순종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순종을 주안에서 확신했다. (확신의 근거는 바울의 감사제목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다.) 무엇보다도 순종하시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온전해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온전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온전해야 데살로니가 교회가 속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온전하기 때문이다. 경쟁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야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12

형제들아! 감사로 편지를 시작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구하는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형제의 입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여져 가는 지체의 입장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재림 때 성도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에 관하여, 곧 주의 날에 대하여 귀가 얇아져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심지어 영으로든 말로든 혹은 바울이 직접 써서 보낸 편지를 통한 가르침에 의해서도 흔들리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영으로나 말로나 편지로 받은 가르침이 잘못되어서라기 보다는 본질이 아닌 때와 시기에 대한 논란을, 주의 날의 징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염려한다.) 공동번역에서는 ‘지성을 잃고 쉽사리 흔들리거나 당황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번역한다. 지성을 잃지 말아라.

그래서 바울은 누가 주의 날이 언제라고 말해도 미혹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주의 날이 오기 전에 배교하는 일이 먼저 있을 것이고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먼저 나타나기 전에는 주의 날이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멸망의 아들, 곧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자신을 신들의 신의 자리에 올려 놓을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적그리스도는 교회를 대적하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 둥지를 틀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을 때에 이미 이것을 가르쳤으니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적그리스도는 지금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벌써 은연중에 악을 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악한 자들이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 ‘때’도 실은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적그리스도의 때를 막는 자가 있다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악을 억제하고 계신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불법자/악한자, 곧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완연히 드러낼 것이다. 그러면 주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말씀만으로도 (입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폐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악한자/불법자의 나타나서 하는 일은 사탄의 일이다. 그들도 능력과 표적을 행하지만 거짓 기적이요 불의요 속임수로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 멸망하는 자들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악한자의 속임수에 빠져 악한자들의 거짓을 믿도록 내버려 주신다. 그들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해서 심판을 자초한다.

// 주의 날에 주님의 입기운으로 악한자/불법자는 사망할 것이다. 주님의 입기운은 ‘말씀과 성령’을 상징한다. 이 땅에서 우리도 말씀과 그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악과 불의를 이길 수 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도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때와 시기, 징조로 흔들리거나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주신 말씀을 따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말씀에 문자적으로 집착하거나 보혜사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감동을 오해하여 말씀을 무시해서도 안된다. 공동번역은 2절에서 ‘지성을 잃고 쉽사리 흔들리거나 당황해서는 안된다’라고 경고한다. 지성과 영성! 진리를 알라고 진리를 사랑하라고 진리를 믿으라고 하신다

데살로니가후서 1 (1-12)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또다시 편지한다. 첫 편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에 관한 설명은 없고 수신자들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라고 밝힌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자신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함께 지어져 가는 지체임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강조한다. (전서와 비교하여 ‘우리’라는 단어가 추가 되었다.) 사도적 권위로 편지 하는 것이 아니라 지체로 편지하는 것이다. 바울 특유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기를 축원하며 문안한다. (전서와 달리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두번째 편지에서도 먼저, 믿음의 성장과 사랑의 풍성함과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소망의 인내를 경주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바울이 하나님의 여러교회에서 친히 자랑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인내와 믿음은 굳건했던 모양이다.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편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한 고난은 바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기) 위한 것이라고 편지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환난을 받지만 환난을 주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환난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환난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는 하나님께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격려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미 영벌가운데 있다)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과 함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결코 주님의 힘과 주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 대신 영원한 멸망의 형별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은 주님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경외함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가르침을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었다고 적는다. 바울은 자신이 이미 데살로니가 교회에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해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께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로 여겨달라고 기도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모든 선을) 기뻐함으로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믿음의 역사를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일 때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높임을 받는다.

바울이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 친히 자랑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가운데 성장하는 교회였다.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더욱 더 든든히 세워달라고 우리 하나님께 기도한다. 믿음의 경주는 아무리 힘들어도 결승점까지 인내로 완주해 내야 한다. ‘지금이 좋사오니,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안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길이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받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