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33-48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특별히 하늘로도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천지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위에 올라 앉으려는 것이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맞으면 예하면 되고 틀리면 아니오하면 된다. 그 이상의 말은 악인의 꾀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계명도 사랑으로 완성하신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앙갚음하지 말라고 하신다. 지나치게 보복하는 것을 금지한 계명이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신다.

오른편을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는 것은 또치려면 쳐보라는 것도, 때리면 그냥 더 맞겠다는 자세도 아닐 것이다. 보복하지 말라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예다. 고발을 당해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시고, 억지를 당해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신다. 한마디로 예수의 제자들에게 손해보고 살라고 하신다. 사랑이다. 손해보더라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할뿐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저주의 기도가 아니라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자연재해는 어쩌면 성도들이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신다. 화평케 하는 자의 복 그대로다. 성도가 원수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이 사랑은 세상의 사랑과 다르다. 이방인들의 사랑과도 다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원수까지 사랑하셨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원수 같은 광야의 백성들을 놋뱀을 달아 살리셨듯이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원수같은 우리들을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살리셨다. 원수를 위해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사랑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면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임마누엘을누려야 할 이유다. 나는 할 수 없으니깐 나는 죽고 내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성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가 온전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마태복음 5:21-32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해 가시신다.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랑으로 완성하신다. 살인은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고 하신다.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도, 형제에게 바보라고 미련하다고 하는 자도 심판을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형제에게 화를 냈거나 형제를 바보라고 놀렸거나 어떤 이유로든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가가나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우선하여 형제에게 가서 먼저 화목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잘못해서) 고소를 당했을 때에도 사과하고 화목해야 한다. 사랑없이 법대로 하자고 하면 안된다. 법대로 하면 결국은 죄값을 치러야 한다. 미움대신 죄값이상으로 사과하고 화목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 사이의 미움을 살인과 동일시 하셨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육체적 간음뿐만 아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도 간음한 자라고 가르치신다. 나아가서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눈이 실족하게 하든, 손이 실족하게 하든, 실족하게 하는 신체의 일부분이 있다면 빼어 버리고 찍어 버리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음행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거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한 자라고 심판하신다. (간음은 사랑이 아니라 성애, 즉 섹스문제다.)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이해는 문자적이지 않다.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계명을 사랑으로 완성하신다. 그리고 우리도 사랑으로 완성된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이란 결국 이웃사랑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루에도 몇번씩 살인하며 지낸다. 특별히 운전하면서 나보다 늦게가면 멍청이라하고, 나보다 빨리가면 미친놈이라고 한다는 얘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로의 운전자는 형제가 아닌가?) 간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대신 눈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많고 손으로 갖고 싶은 것도 없지 않다.

오늘도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예수 안에서 사랑하라고 하신다.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이들에게서 돌이키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고 피차 용서를 구하는 것이요, 실족하게 하는 것을 예수 안에서 끊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마태복음 5:13-20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빛이 착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비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다.

착한행실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법의 바탕이 되는 율법을 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을 버리고 또 버려도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되고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마귀의 속삭임에 혹해서는 안된다.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된다는 것은 천국 백성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천국에만 들어가면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된들 어떠리라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마귀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혹시나해서 예수님은 덧붙이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래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란 바로 사랑이다.

바울도 로마서 13:10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말한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롬 13:8 공동번역)

공동번역은 세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이다. 우리가 따라 살아내야 할 삶이다. 난 할 수 없어요라고 핑계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소금과 빛은 성도의 착한 행실이다. 사랑이다.

 

마태복음 5:1-12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예수님 곁으로 모여든 사람은 제자들이었다. 많은 무리는 아마도 멀찍이서 관망하지 않았을까? 말씀보다 이적과 기사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예수님은 가까이 다가온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천국에 대해 가르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한) 제자들에게 천국이 무엇인지 가르치셨듯이 나에게도 동일하게 누가 천국백성이 될 것인지 가르쳐 주신다.

천국의 복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을 받은 자가 누린다.

천국에서의 삶은 이 땅의 행복과 다르다. 예수님을 위하여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악한 말로 비난을 받을 때 복이 있다고 하신다. 이런 복이 있다는 것은 곧 천국 삶을 산다는 것이다. 오늘도 여기서 막힌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 욕을 먹고 박해를 받고 악한 말로 비난을 받고 있는가? 이런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는가? 천국에서의 복을 나의 탐욕으로 바꿔버리지는 않았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천국 백성의 삶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신다. 이 땅에서 예수를 위하여 박해받음은 하늘, 곧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천국 백성의 삶을 사는 것을 박해 받은 선지자의 삶에 비유하신다. 결국 천국의 삶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선지자들처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천국백성이 누리는 복이다.

임마누엘의 삶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마태복음 4:12-2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새물결은 세례자 요한의 투옥으로 위기를 맞았다. 예수님도 갈릴리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였다. 이방땅과 마찬가지인 갈릴리에도 빛이 비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러나 유대 땅에 나셨지만 유대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흑암과 사망과 그늘인 갈릴리 지역에 빛이 비쳤다. 예수님의 첫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그리고 갈릴리 해변에서 영접하는 자,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를 부르셨다.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와 야고보와 요한 형제였다.

그들은 모두 어부였다. 예수님이 저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시자 그들은 모두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희생을 요구한다. 내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보화가 뭍힌 밭을 산 농부나, 값진 진주를 사는 진주 장사처럼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야  천국 시민권을 살 수 있다. 예수님이 천국은 이와 같다고 비유로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빛을 비추셨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자를 고치셨다.

예수님의 소문은 수리아까지 퍼졌다. 그곳사람들도 고통당하는 자 병든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소문은 퍼지고 퍼져 갈릴리뿐만 아니라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예루살렘부터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순서가 아니라 지역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의 경계 갈릴리에서 시작되었다. 천국복음은 그 시작부터 유대 (이스라엘)만이 아닌 이방을 포함하는 복음이다. 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였지만 제자로 남을 수 있는 자는 적다.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