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3:19-39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시인은 진멸되지 않을 소망을 노래한다. 주의 인자와 긍휼에 모든 것을 건다. 시인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주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있으면 된다. 근심 고난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다. (고후7: 10)

잘못에 대한 벌을 달게 받되 진멸되지 아니하는 구원을 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주님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애3:19-39)

예레미야애가 3:1-18

시인은 지체로서의 정체성을 느낀다. 자신도 주님의 진노하심하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노래한다. (교회의 지체로서 내가 가져야할 태도다. 성도라면 아무도 한국교회의 현실이나, 사역 현장에서 도피할 수 없다. 어둠속에서 함께 걷는다.)

주님은 혹독하게 시인을 치신다. 건강을 잃게 하시며(4) 고생하게 하시며(5) 삶의 의미를 잃고(6) 결박당하고(7) 기도도 안되고 (8)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9) 훼방꾼을 만나고 (10) 배신당하고 아픈 몸으로 혼자버려지며 (11) 뭇매를 맞고 비난의 중심이되고 (12, 13) 결국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14) 굶주림에 쑥으로 배를 채우고 (15) 돌에 맞아 이도 부러지고 쓰레기 더미에 내동댕이 쳐지고(16) 마음의 평강 마져 없게(17) 하셨다.

시인은 자신이 복을 차버렸기 때문이라고 읊조린다. 기력도 없고 소망도 끊어졌다.

시인이 내어버린 복은 건강도 부유함도 성공도 명예도 평강도 아니다. 어느 누가 이런 복을 내다 버리랴. 이런 복을 담고 있는 하나님말씀을 내다버렸다는 의미다. 순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국교회가 어둠속에서 걷는다. 그럼 나도 어둠속에서 걷고 있다는 뜻이다. 교회 지체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주님이 나의 기도를 물리치시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아직은 빛이 남아 있다.

이 땅 캄에서는 복이 아니라 복주머니를 소개해야한다. 복만 추구하게 해서는 안된다. 쉽지 않으니 지혜를 구해야 한다.

예레미야애가 2:11-22

시인이 (화자가 되어) 운다.  얼마나 울었으면 눈물이 눈이 상하며, 애간장이 탔을까.

그리고 울라고 한다.

눈물이 강처럼 흐르도록 쉬지말고 울라고 한다. 다음세대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하라고 한다.

굶주림보다, 민족의 패망보다 주님의 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 종교지도자들이 헛된 묵시, 거짓 경고와 미혹만 본다. 자신들만 보면 좋겠는데 성도들을 헛된 묵시, 거짓 경고, 미혹으로 가르친다. 한국교회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다.

예레미야애가 2:1-10

슬프다.

야단 맞는 딸도 슬프겠지만 책망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쩌랴. 딸에 대한 분노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더 큰 슬픔이다. 그래도 구름으로 덮으셨다. 하나님의 임재다. 딸의 입장에서는 부모에게 내팽개침을 당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 그렇다고 잘못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딸을 혹독하게 야단치신다. 혼낸다. 회초리도 드시고 이웃들에게 창피까지 당하게 하셨다. 금을 단련하듯 완전히 불사르셨다. 정금만 남도록.

그래도 딸을 사랑하신다. 원수에게  다 맡기지 않으시고 친히 원수 같이 되셔셔 딸을 삼키셨다. 여기서도 큰 물고기를 보내 요나를 삼키신 주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하나님은 진노가운데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일까? 딸은 슬프지만 주님은 더 더 더 슬프다. 딸에게 근심과 애통을 더하시는 이유는 정금으로 단련하시는 것이며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헛된 종교적 열심도 버리게 하셨다. 종교행사도, 각종 절기들도, 심지어 주일도 잊어버리게 하셨다. 종교지도자들은 멸시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 예배당의 강대상도 팔아 버리시고 교회건물도 경매에 넘기셨다.  예배당 건물이 장마당이 되게 하셨다. 통곡의 벽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옛 영화를 기억하며 통곡하는 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고 살았던 것을 기억하며 통곡해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이 없어 하나님 말씀이 희귀하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잠히 재를 뒤집어 쓰고 베옷을 입고 주님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

슬프다.

시인은 딸의 슬픔보다 화가 머리까지 치밀어 오른 주님의 슬픔을 노래한다. 딸의 슬픔을 위로하실 주님의 진노는 누가 위로할 것인가? 결국은 순종하는 자리에 나아오는 딸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레미야애가 1:12-22

고통중에 괴롭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황폐합니다.

원수에게 넘겨져 갇혔습니다.

청년들, 처녀들에게도 소망이 없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위로할 자 없으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불결한 자가 두손 들고 기도하나 위로할 자 없습니다.

의로우신 주님께 불순종하는 다음세대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도 배신하고 지도자들도 자기 배만 채우려다 의식을 잃었습니다.

오 주님! 이 모든 내우외환은 나의 반역 불순종이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고통을 기뻐합니다.

주의 날, 모든 악을 가지고 주 앞에 서는 자들을 심판하소서.

 

시인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서 노래한다.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악이 심판 받는 주의 날을 바라본다. 탄식과 병든 마음만 남았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3)”라고 했다. 우리가 시인보다 나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리라 (24)”라는 후반절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하여도 주의 날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덧붙인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1).”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주의 날 확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