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34-4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6)

갈렙을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한’ 자라고 소개한다. 히브리어 사전을 보면 순종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충만하다, 가득채우다의 의미를 갖는 단어다.

다니엘서의 손가락이 나와 벽에 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떠오른다. 다니엘은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라고 해석한다. 그러니 부족함이란 불순종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낮추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이 불순종이다.

그러니 순종이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갈렙의 용기가 이해되지 않는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충만했다. 순종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43)

악한 세대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이 뭔지 몰랐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야한다. 어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순간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어렵다. 일 자체에 집중하다보면 지금 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이기 어렵다. 일을 하다보면 내 생각대로 흘러가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매순간 귀기울여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통곡이다. 더 큰 문제는 통곡을 해도 주님이 우리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갈렙의 순종. 갈렙은 주님의 뜻으로 자신을 온전히 채웠다.

말씀과 보혜사 성령님이 깨닫게 하신 것을 힘써 따르는 것이 순종이다.

신명기 1:19-33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0)

이 짧은 한 절에 ‘너희’ 라는 대명사를 다섯번 썼다. 새번역에서는 ‘당신들’이라고 여섯번 썼다.

“당신들 앞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시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들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하신 것과 같이, 이제도 당신들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오.”

거듭해서, 명백하게 율법의 뜻풀이를 해서 설명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자녀를 (아들을) 안아주시듯 주님이 안아서 이곳까지 오셨는데 (31)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

모세는 백성들에게 “그런데도 당신들은 아직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32)라고 말해야 했다. 이런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하나님과 계약, 언약 관계를 법으로 확인시킨다.

광야에서 주님의 법은 간단했다. 이끄시는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낮엔 구름, 밤엔 불을 따르는 순종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면 정착이다.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를 물어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 요구되는 삶이다. 드리는 삶보다 듣는 삶.

주님의 품에 안겨서 무엇을 할꼬. 자장가도 듣고 옛날 얘기도 듣고…

신명기 1:1-18

모세는 요단 강 동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5 새번역 )

모세는 요르단 강 건너편 모압 땅에서 비로소 이 법의 뜻을 풀어 들려주었다.(공동번역)

신명기의 신 (申) 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5절의 번역처럼 설명하다 (명백히 하다, 거듭 되풀이하다, 알리다 진술하다) 풀어 들려주다라는 중의적으로 사용되었다. 영어 Deuteronomy (두번째 율법)의 ‘두번째’라는 번역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를 전달한다. 한글세대에게 자칫 ‘매울신’ 이나 ‘새신’으로 읽히면 곤란하겠다.

열하룻 길이었으면 굳이 다시 법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사십년 세월이 흘렀으니 법을 다시한번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모세가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는 ‘설명하기 기뻐했다 (기쁘게 설명했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모세는 ‘이 법의 뜻을 풀어 들려주었다.’

쉽게 말하면 (율)법에 대한 강해 설교요 주석을 달아 설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처럼,)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오경’ 이라는 하나님의 법 해설서가 필요했다. 법조문만이 아닌 역사와 해석이 곁들인, 법의 정신이 포함된 설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통하여, 지혜와 지식이 있어 인정받는 자들을 세워 나라(민족을)를 다스리는 것에 대한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법은 주어졌으나 사람은 외모로, 빈부귀천으로 체면치레로 판단한다. 여전히 손은 안으로 굽는다. 그러나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모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모세가 헌법재판소가 될 수 있었으나, 가나안을 앞두고 모세 자신은 요단강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법전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도 기쁜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일은 분명 기뻐서 할 일이다. 법을 집행하는 것은 마음 아프겠지만)

신명기. 거듭 가르쳐야하고 명백히 설명해야하고 기쁘게 시작해야 할 주님의 백성이 따라야 할 법. 이 시대에 맞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시편 108:8,9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8,9)

주님은 나를 뭐라 부르실까? 그냥 내 것이라, 내 소유라고만 하셔도 감사하다. 투구요 규가 되지는 않더라도 버려지지는 않아야 한다.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시편기자를 따라 마음을 정해 노래하고 마음을 다해 찬양하리라.

시편 107:23-

주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아라.

시편기자는 항해를 통해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한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광풍도 큰 파도도 주님이 일으키신다. 광풍과 큰 파도 속에서 뱃사람들은 영혼이 녹고 배멀미에 지각이 혼미해지고 고통속에 빠진다. 이때 유일한 희망은 주께 부르짖는 것이다. 주께서 간구를 들으시고 광풍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며 평온하게 목적지 항구로 인도하신다.

어렸을 때 경포 앞바다에서 가슴 깊이까지 들어가 파도에 맞춰 점프를 하는 파도타기를 했다. 박자를 못맞추면 파도가 얼굴을 때렸고 짭짤한 바닷물이 콧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매워 혼났다. 그런데 튜브를 가슴에 끼고 나가면 그냥 몸을 튜브에 맡기면 그만이었다. 마냥 즐거웠다.

그러나 대양에서는 다를 것이다. 오래된 뱃사람들도 아무리 큰 배라도 파도산에 올라서거나, 파도 골짜기에 파묻히면 죽음이 엄습하는 공포에 휩싸인다고 한다. 이런 풍랑을 겪고 항구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이라고 시편기자는 노래한다. 이런 주님을 찬양하라고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