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2:10-19

예레미야 22:10-19

죽은 (요시아) 왕 때문에 울지 말고 잡혀간 왕을 생각하고 슬피 울라고 하신다. 잡혀간 왕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신다. 곧 선산에 묻히지 못한다고 하신다. 요시아의 아들 살룸(여호아하스 왕)에 대한 예언이다.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부려먹음 왕에게 화가 미친다고 하신다. 더 넓은 집, 더 큰 집을 짓고 단장한다고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법과 정의를 실천할 때 형통하였던 요시아 왕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잘 살았다고 하신다. 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불의한 이익을 탐하고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고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였으니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화가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께서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아무도 여호야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끌어다가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멀리 내던지고, 죽은 나귀처럼 묻어버릴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신다. 가나나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 처리해 주는 것이 법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잠언 29장 2절에서 “의인이 많으면 백성이 기뻐하지만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 하고 교훈한다. 그리고 7절에서는 의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한다. ‘의인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잘 알지만, 악인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쯤은 못 본 체한다.” 오늘 본문은 잠언 말씀을 잘 반영한다. 결국 의인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은 당연히 주님에 대한 믿음이요, 이 믿음은 충성/신뢰/의지를 뜻한다. 형통은 더 넓고 더 큰 집을 짓고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아는 것이다. 영생이 형통이다.

예레미야 22:1-9

예레미야 22:1-9

주님은 유다 왕이 정의롭지 못했다고 책망하시며 바벨론의 침공은 그에 대한 벌이라고 선언하셨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 왕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다.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고한 피를 흘리지 말라.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왕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주님은 유다 왕이 이 말씀에 불순종하였기에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으로 만드시고, 파멸할 자를 보내 불에 던져버리시겠다고 하신다. 세상 민족들이 주님이 유다에게 행하신 일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곧 유다가 자기 하나님(신)과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하나님의 나라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임받아 다스리는 왕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백성이 자기 하나님(신)과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유다 왕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는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 탈취 당하는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라.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무고한 피를 흘리지 말아라. 이 말씀에 불순종 한다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같다. 우상 숭배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는 것이다. 교회지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준행해야 할 말씀이다. 한마디로 이웃사랑이다.

예레미야 21:1-14

예레미야 21:1-14

시드기야 왕은 바스훌과 스바냐 제사장을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레미야에게 보내, 제발 유다가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포위하고 있으니, 예전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던 것처럼 느부갓네살이 물러가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에게 주님께서 친히 유다를 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과 성 안에 있는 것을 다 치시겠다고 하신다. 큰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유다 왕 시드기야와 전염병에서 살아 남은 자는 느부갓네살의 칼에 죽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이 생명의 길과 사망을 길을 제시하신다. 성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요, 갈대아 사람에게 나아가서 항복하는 자는 포로로 잡혀가겠지만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께서 얼굴을 예루살렘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왕이 손에 넘어가 불살라질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화를 내리시는 이유는 정의롭지 않아서다. 정의롭지도 않으면서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하신다. 주님이 오히려 그들의 대적이 되신다. 주님은 행위대로 벌하시는 분이시다.

//정의가 없는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나라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주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에는 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도 따른다.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벌을 받지 않겠다고 (물리적) 성 안에 남아 있으면 사망이라고 하신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주님의 자비를 바란다면 세상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정의롭게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신다. 나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에 먼저 순종하라고 하신다.

예레미야 20:7-18

예레미야 20:7-18

예레미야는 주님께 속았다고 말을 한다. 주님과 게임해서 져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하소연 한다.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외치기 때문에 평안의 복음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치욕과 모욕을 받는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입을 다물기로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는 주님의 말씀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전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고발한다. 예레미야에게 보복할 기회를 엿본다. 예레미야는 주님께 의지한다.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실패할 것이고 주님 앞에서 큰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주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아시는 분이심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그래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을 미리 찬양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출생을 저주할 정도로 수모를 받는다. 그래서 주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달라고 간구한다.

//주님께 속는다는 것이 성립될까? 주님과 게임해서 이길 수 있다는 가정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주님을 안다. 다만 사방에 주님을 모르는 사람뿐이니 그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의지할 바는 주님밖에 없다고 말한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존재할 의미가 없다며 자신의 출생까지 저주하면서 주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달라고 간구한다. //주님께 속지 않는 방법은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은 것이다. 주님과 맞짱을 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주님 편에 서서 게임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세상을 인내함으로 이기는 큰 능력이다. 이 큰 능력이 주님께만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다. 어찌 살리요. 어찌살리요. 통곡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몰랐던 항우와 우희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듯, 나도 부끄러움 너머에 있는 면류관을 본다. 사면초가라면 위를 향해 눈을 떠야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7/10/27/

예레미야 19:14-20:6

예레미야 19:14-20:6

마골밋사빕

‘마골밋사빕’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성전총감독이었던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에게 준 이름이다. 바스훌은 도벳에서의 예언을 성전들에서도 외치는 예레미야를 잡아 칼을 채우고 가두었다가 풀어주었다. 예레미야는 갇혔다가 풀려났는데,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바스훌 (자유)에게는 역으로 마골밋사빕 (포로) 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마골밋사빕’은 문자적으로 ‘사방의 두려움’이란 뜻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 ‘사면초가’라고 번역했다. 본문에서는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라고 주를 달았다. 공동번역의 ‘사면초가’가 적절한 번역인 듯 하다.

// 사면초가는 초왕 항우가 한왕 유방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진퇴양난’을 너머 사방에서 에워쌈을 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런데 초왕 항우의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소리가 들리는 데, 적군의 노래(함성) 소리가 아니라 아군의 노래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데 사면초가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사방에서 초나라 병사들이 부르는 초가 소리의 의미를 항우는 알았다. 항우는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포로가) 저렇게 많은고?” 하며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역발산(혜)기개세’라는 해하가를 남기고 마지막전투에서 자결한다. 그때가 31세의 나이라 한다.

바스훌에게 주어진 ‘마골밋사빕’이라는 이름은 자유자 바스훌이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한 것이다. 사방으로 에워싸는 것이 바벨론 군대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루살렘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다. 성밖 도벳에서, 성안 성전 뜰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렇다면 돌이켜야 하는데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도) 사면초가 상황이다. 사실 우리를 에워싼 대적이 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평안의 메세지, 긍정의 신앙이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들리는 것이 문제다. 돌이켜야 할 때다. 주께로 돌아가야 할 때다.

https://quietwaters.blog/2017/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