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13-24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라!

가지가 잘리지 않고 붙어 있는 이유는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가지가 잘리지 않고 붙어 있는 것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지 않으면 접붙임을 받았어도 잘릴 것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인자하게 대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는 것은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인자하게 대하는 것이다. 결국 믿음이란 다른 사람에게 인자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적용할 수 있다. 믿음의 상대어는 교만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자하신 것처럼, 나도 이웃에게 인자하라고 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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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1-12

로마서 11:1-12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은 아닌가?”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이스라엘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바울 자신이 그 예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엘리야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명을 남겨두신 말씀을 소환한다.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선언한다. 남은 자들은 은혜로 된 것이요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행위에 의한 보상이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아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은 찾던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얻었다고 말한다. (은혜를) 얻지못한 사람들은 완고해졌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혼미한 영을 주셨으니, 오늘까지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못한다” 는 말씀이 완고해진 사람들에게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다윗도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기도 했다고 시편 말씀을 소환한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끔 되었느냐고 묻는다.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져서 구원이 이방 사람에게 이르렀지만,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설 때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기대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나? 바울은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혈통적 육벙적 사람의 뜻으로 난 사람들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이라고 단서를 붙인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엘리야 때에는 은혜를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오직 칠천이었다. 칠천은 이스라엘 백성 중 1% 안 되는 수였을 것이나, 일곱이라는 완벽한 수에 십이라는 완전수를 세번씩 곱했으니 은혜를 얻은자가 온전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렁뚱땅 섞여서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서면 그 복이 엄청나겠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엄청난 복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들이다. 이들이 은혜를 얻는다. 은혜는 내가 찾는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찾던 것을 얻지 못했다. – 예수께서는 구하면 얻고, 찾으면 찾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디서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르니냐가 중요하다.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율법의 행위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생각은 혼미한 영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완고해진다. 완고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가지고 있던 (거룩하고 신령한) 율법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성도에게도 말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은혜 아래 거하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으로 살아가라! 자비와 긍휼의 사람이 되어라!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 유력한 우승후보 독일이 러시아 월드컵에서 예선 탈락한 꼴이다. (물론 지역 예선에서 탈락한 이태리도 네덜란드도 16강에 없다.) 그만큼 16강 맛을 본 나라들이 풍성해졌다. 독일 국민들은 시기심으로 남은 월드컵을 시청했을 것이다. 독일의 실패는 변방축구의 풍성함이 되었다. 그렇다고 독일축구의 충만함이랴! 여전히 독일은 다음 월드컵의 우승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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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5-13

로마서 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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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을 바울은 6장 17절에서 ‘마음으로 순종하여’ 라고 풀어냈었다. 오늘도 ‘믿는다=순종한다’ 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에 대한 재청인 것이다. 믿어 의에 이르고는 순차적 단계를 뜻하지 않는다. ‘믿음=의=구원’ 이라는 등식이 자연히 성립한다. 구원은 의롭다 인정받은 것이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우리는 자꾸 ‘믿는다’가 ‘구원’의 선행조건이라고 이해하려고 하는데, 아니다.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누리는 것이요, 믿음이 없으면 구원에서 떨어진 것이다. ////결혼전 아내에게 생일을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였다. 무슨 선문답도 아니었는데… 하여간 나는 아내의 암송이 끝나기 전에 당근 아내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았다. 결혼후 아내는 그때 이남자면 됐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후로 누군가 내 생일을 물으면 나는 이 구절로 답하기도 한다.////5년전 묵상글만 읽다가…

로마서 9:30-10:4

로마서 9:30-10:4

바울은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은 것은 믿음에서 난 의라고 선언한다. ‘의=하나님’의 등식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얻은 것은 믿음에서 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추구해서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이르려고 하지 않고,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준수였던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준수하려는 마음이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데, 그들은 율법 준수를 해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런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한다. 이스라엘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지만,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해서,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쓸뿐,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셔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어 주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결국도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신뢰=순종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일방적이지 않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하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르실 수 없으니, 알고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사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지만 그 열성이 올바른 지식에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은 이 ‘사귐’이 없다는 의미다. 교제가 없으니 ‘임마누엘’이 아니다.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완성(끝마침)인 사랑의 주님이시다. 이 지식이 있다면,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예배가 사랑보다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이 곧 예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형제 사랑이다. 요한도 ‘(서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고 교훈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율법의 요구에 맞출 수 없지만 율법의 마침이 되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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