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3:1-19

욥기 13:1-19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욥은 보고 들어서 다 안다고 대답한다. 다시 한번 욥은 친구들이 아는 것만큼 자신도 알고 있다여 자신이 친구들 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욥은 (오십보백보인) 친구들이 아닌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말씀드리겠다고 말한다. 

욥은 친구들의 정죄는 위로가 전혀 되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거짓말이요 돌팔이 의사의 처방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니 입을 다물라고, 말을 하지 않으면 최소한 무식이 탄로 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주 하나님께 사정을 호소하는 것에 함께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한다. 욥은 알맹이 없는 말로 자신을 정죄한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변호를 받으실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자세히 알고 계신다. 거짓된 말로 자신(욥)을 고발하면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속마음을 폭로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보다 두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단언한다. 욥은 다시 한번 친구들의 말은 허사요 잡담일 뿐이니 그만 입을 다물고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말하도록 기회를 달라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욥은 자신의 호흡(육체의 생명)을 위해 주님께 호소하지 않는다. 죽어도 욥 자신이 잃을 것이 없다고 자신한다. 그래도 자신의 사정을 주님께 아뢰고 싶어한다. 주님께 사정을 아뢰고 주님의 대답을 듣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한다.  사악한 자는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하겠지만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자신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니 자신이 하나님께 하는 말에 함께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한다. 욥은 자신의 무죄에 확신을 가진다. 만약 하나님이 유죄선고를 하시면 사형이라고 달게 받겠다고 말한다.

//욥의 주장은 분명하다. 친구들에게 사람의 지혜로 다른 사람의 문제에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욥은 구원을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해했다.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주님께 물을 수 있고, 주님의 대답을 듣는 것이 구원이라고 노래한다. 욥은 자신이 무죄하니 일단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자신한다. 혹여 하나님이 유죄선고를 내리시면 사형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한다. 앞에서 정리했지만 하나님 앞에 나가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이 (비록 유죄선고를 받더라도) 구원이기 때문이다. 욥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을 맡긴다. //욥의 구원관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구원임을 배운다. 임마누엘!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믿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는 연약하다. 그러나 우리도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시기 때문이다-(히4).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이미 죽은 것이다.

욥기 12:1-25

욥기 12:1-25

소발의 말에 욥이 대답한다. 욥은 하나님의 지혜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소발이 마치 자신은 그 지혜를 아는 듯이 자신을 정죄하자, 너희들만 지혜롭냐고 대꾸한다. 욥은 친구들의 지혜정도는 자기도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문제는 지금 하나님의 침묵이다. 욥은 한때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침묵하시기 때문에 자신이 조롱받는다고 말한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았으면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비웃는 친구들을 마치 넘어지려는 사람을 떠미는 사람들에 비유한다.

욥은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수중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손수 하신 일이라는 것을 자연미물(만물)도 알고 있다고 말을 한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욥은 지혜는 오래 살았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혜와 권능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슬기와 이해력도 주님의 것이라고 선언한다. 모사재인이나 성사재천이다. 능력과 지혜가 주님의 것이다. 그러니 속고 속이는 것도 주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말을 한다. 하나님이야 말로 고관들의 옷도 벗기시고 재판관들을 바보로 만들기도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왕들보다 높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제사장들보다도 권세있는 자들보다도 높으시다. 마치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양 떠드는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노인에게서 분별력을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귀족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수치를 당한다. 이렇듯 하나님은 어둠을  밝히시고 죽음을 이기시는 분이시다. 민족들의 흥망성쇠도 주님의 손에 달렸다. 

//소위 지혜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다. 소발이 그랬다. 욥은 자신도 그정도의 지혜는 있다고 감히 말한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는 자연만물(미물)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욥은 하나님의 지혜는 고관들, 재판장들, 왕들, 제사장들, 권세자들, 노인들, 귀족들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참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밝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참 지혜다.) 욥은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여전히 자신에게 임한 고통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 어찌 한 개인의 희노애락을 주관하지 못하랴. 친구들의 정죄와 달리 욥은 조금씩 답에 다가간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내가 답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욥기 11:1-20

욥기 11:1-20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 대꾸한다. 소발은 욥의 대답과 욥의 기도를 헛소리라고 반응한다. 하나님께서 친구를 보내셔서 위로는 커녕 정죄만 하게 하셨다는 욥의 말이 귀에 거슬렸을 것이다. 소발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지혜를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상은 소발의 소견을 말한다.) 소발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린 벌은 욥이 지은 죄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깊은 뜻도 모르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토로한 것을 꼬집는것이다. 하나님의 높고 깊고 넓은 지혜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소발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데, 욥에게만 적용한다.)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모르는 욥을 미련하다고 판단한다. 욥에게 마음을 바르게 먹고 두손들고 주님을 향해 기도하라고 충고 한다. 한마디로 회개하라는 충고다. 악에서 돌이키고 불의가 깃들지 못하게 해야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지난 괴로움을 다 잊게 될 것이요 생활이 밝아 진다고 권면한다. 이럴 때 희망이 생기고 평안해진다고 말한다.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욥이 회개하지 않으면) 눈이 멀어 주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악한 사람의 희망이라고는 마지막 숨을 잘 거두는 일 뿐이라고 말한다. (욥이 죽기전에 잠시라도 자신을 내버려 달라고 간구한 내용을 비꼬는 것 같다.)

//친구들은 욥에 대한 정죄를 점점 더 당연시 한다. 정죄 말고는 이 상황을 이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깊고 높고 넓다고 말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마치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양 욥을 정죄한다. 소발의 모습에서 소위 믿음 좋다는 사람들의 날선 혀를 보게 된다. 우리는 까닭없는 고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고통받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드러내심을 알아야 한다.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자. 낮은 자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수 밖에 없다.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겸손한) 자들이 누리는 복에 동참하는 길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낮아지는 것이다. 가난과 애통과 온유가 복인데 이들과 함께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긍휼(자비)를 누리는 길이다.

욥기 10:1-22

욥기 10:1-22

사는 게 괴로운 욥은 꾹꾹 눌러오던 자신이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로한다. 제발 자신을 죄인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한다. 대신 무슨 일로 자신에게 재앙을 내리시는지 묻는다.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신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악인들은 벌을 받지 않고 형통하니 말이다. 적어도 사람이 보기에는 그렇다. 욥은 주님도 사람들처럼 외모로 판단하시는 분인가 하고 반문한다. 왜 영원에 잇대어 계신 주님이 찰라의 인생처럼 행하시냐고 묻는다. (욥은 주님이 이럴리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자신의 허물을 찾아내고 자신의 죄를 들춰 내려는 이유는 묻는다. (주님의 자비하심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님이 잘 알고 계심을 알았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멸망의) 재앙을 내리시는지 묻는다. 자신은 주님의 형상으로, 그것도 주님이 직접 빚어 만드신 자신을 어째서 (토기장이가 맘에 들지 않는 토기를 깨어 버리듯) 티끌로 되돌아가게 하시는지 묻는다. 주님이 태어나게 하시고 주님이 생명을 주시고, 주님이 사랑을 주시고 숨결까지 지켜주셨는데, 이지경이 된 것을 보니 주님께서 자신을 늘 해칠 생각을 가지신 것이 아닌지 묻는다. 주님이 자신의 출입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보시는 이유는 죄를 지으면 용서하지 않으실 작정이 아니냐고 묻는다. 지금의 고통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면, 의를 행했을 때는 어떤 보상을 주셨는지 묻는다. 욥은 자신이 잘 됐을 때도 주님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시려고 하셨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들을 보내 위로는 커녕 자신을 공격하게 하셨다고 한탄한다. 욥은 다시 한번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다. 사산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혼자 있게 내버려 달라고 애원한다. (하나님이 계심을 느끼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어차피 지옥으로 보내실 것이라면 (하나님이 떠나실 것이라면) 이 땅에서 잠시라도 쉬게 (하나님과 동행하게,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해 달라고 노래한다.

//욥이 털어 놓는 한마디 한마디는 주님이 그럴리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오는 말들이다. 다만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다. 물론 이유를 안다고 고통이 없어질까?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욥은 까닭없이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욥이 더 잘한다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욥은 광명도 흑암 같은 곳이 지옥이라고 노래한다. 욥의 반어법이다. 자신이 처한 사정이 이미 지옥과 다름 없음을 고발한다. 빛이 분명히 있는데, 주님이 분명히 계신데 자신에게 침묵하시니 흑암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노래한다. 주님께 이렇게라도 한탄할 수 있으니 아직은 지옥이 아니다. 주님께 자신의 사정을 쏟아놀 수 없게 되면 그때가, 그곳이 지옥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더라도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욥기 9:17-35

욥기 9:17-35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를 정말로 모른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이라는 것은 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의 간구를 들어주실까 자문해 본다. 자신의 변론과 상관없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이다.) 욥은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주님 앞에서 말의 실수도 있을 것이고 주님 보시기에 흠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시인한다. 욥은 비록 자신은 주께 범죄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흠이 없는 사람도 악한 사람도 다 한가지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세상은 죄 없는 자가 재앙을 받는 것을 보고 비웃겠지만 이 역시 주님이 허락하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욥은 인생이 쏜살같이 지나간다고 말한다. 곧 주님 앞에 설날이 멀지 않았다. 자신은 고통받는 이유를 모르지만 주님께서 자신을 죄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것을 안다고 말한다. (욥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도알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면,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리하는 수고가 헛수고라고 결론 내린다. 욥 스스로는 아무리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리한다고 해도 주님 앞에서는 시궁창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을 한다. 욥에게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신다.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 한다. 자신이 처한 두려움을 거둬갈 중재자를 찾는다. 스스로는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멀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욥이 모르는 중재자 그리스도 예수가 계신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있다. 그렇다면 욥보다 더 흠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그러나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이기신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