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2:36-23:12

민수기 22:36-23:12

22:41, 23:9,10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친 진의 끝부분을 보았다. 그리고 티끌처럼 많은 이스라엘의 수에 놀랐다. 하나님은 그런 발람에게 이스라엘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은 의인의 회중이라는 마음을 넣어주셨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에 넣어주신 대로 발락 앞에서 “야곱은 티끌 같아 헤아릴 수 없고 이스라엘은 먼지 같아 셀 수도 없구나. 내 목숨이 올바른 사람(의인)처럼 끝났으면! 내 여생도 그들(의인)과 같았으면!” 하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저주 아닌 축복을 마무리했다.

//발락은 축복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발람에게 축복의 댓가를 충분히 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축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인의 회중이 누리는 것이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들이 누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이 누린다.
//발람은 신탁에서 ‘나는 정직한 사람이 죽듯이 죽기를 바란다. 나의 마지막이 정직한 사람의 마지막과 같기를 바란다’ 하고 자기 고백으로 마친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에 넣어주신 말씀이다.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도 사람의 의지로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했다고 모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또 아니다. 발람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궁금해진다.
//먼지와 티끌 – 먼지와 티끌이라도 모이면 태산이 된다. 메뚜기 같아도 떼로 모이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한 마리의 메뚜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의인의 회중은 하늘을 덮는 메뚜기 떼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발람도 보았는데, 우리가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진을 치고 있는지 반성이 앞선다.

민수기 22:21-35

민수기 22:21-35

발람이 발락이 보낸 고관들을 따라 길을 나서자 하나님이 크게 노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라고 하셨으면서 크게 노하신 것을 보아,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자기가 원하는 말만 듣고 귀를 닫아버렸다. 발람의 귀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았다. 발람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발람이 타고 가는 나귀를 막아섰다. 나귀는 길을 벗어났다. 발람이 나귀를 때려 길로 돌이켰지만 주님의 천사는 나귀를 양쪽에 담이 있는 곳에서 막아섰다. 발람은 나귀를 또 때렸지만 주님의 천사 앞에서 나귀는 어쩔 수 없었다. 발람을 태운채로 주저 앉았다. 화가 난 발람은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다. 그러자 주님은 나귀의 입을 열었다. 나귀는 주인 어른께 무슨 잘못을 했다고 세번씩이나 때리냐고 따졌다. 발람은 나귀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칼이 있으면 나귀를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귀는 자신은 지금까지 발람에게 충성했다고 말했고, 발람도 그것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고 있는 발람은 주의 천사를 불 수 없었다.) 그때 주님께서 발람의 두 눈을 열어 주셨다. 발람은 그제서야 칼을 빼어 든 천사를 보았다. 발람은 즉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천사는 발람이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기에 막으려고 왔다고 말했다. 나귀가 세 번이나 자신을 비켜서지 않았다면, 발람을 죽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람은 주님의 천사에게 자기가 가는 것이 잘못이면 되돌아 가겠다고 물러섰다. 그러나 주님의 천사는 일행과 함께 같이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말해주는 것만 말하라고 강조했다. 발람은 발락이 보낸 고관들과 함께 갔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한낱 미물인 나귀도 보는 주님의 천사를 보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말씀을 마음에 두고 성령의 인도에 따를 때 정결한 마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보는 복을 누린다. //함께 가거라. –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발람의 탐욕을 이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모압과 미디안 사람들에게 드러내길 원하신 것이다. 발람은 결국 하나님의 사자로 발락에게 가는 것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발람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발락에게 가기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주관하신다.

#요나는 가야 했으나 불순종하다 가야했고, 발람은 가지 말아야 했으나 불순종하다 결국 가게 되었다.

민수기 22:1-20

민수기 22:1-20

//발람 –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방 점쟁이 발람. 주(여호와)가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신)이 아니라는 증거다. (출애굽 사건으로 주님의 이름이 만천하에 알려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주님을 하나님으로 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이런점에서 발람은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자다. 이런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받을 게 전혀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발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졌다. 하나님 또한 발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발람은 하나님과 대화한 후 발락이 보낸 사신들을 그냥 돌려보냈다. 발람은 주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그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발락이 재차 사신을 보내자, 발람은 한 번 더 하나님께 나갔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발락이 보낸 사람들과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다. 다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하신 말씀만 전하라고 하셨다.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가 어리석다고 하셨다. 말씀을 듣는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왜 발람에게 함께 가라고 말씀하셨을까? 다만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하신 말씀만 전하라고 하신데서 그 이유을 찾을 수 있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도, 발람은 발락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가라고 하셨지만 발람은 하나님의 뜻이 달라지지 않음을 깨달아야 했다. (가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면 스스로 가지 않는다고 응답해야 정상인데, 자신이 듣고자 하는 답이 나오자 하나님과의 대화를 끊어버렸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바꾼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민수기 21:21-35

민수기 21:21-35

에돔을 우회한 이스라엘은 아모리 땅을 지나야 했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 지나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에돔 왕과 마찬가지로 시혼도 허락하지 않았다. 시혼은 그의 백성을 소집해 이스라엘을 치러 광야로 나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오히려 칼날로 아모리 사람을 쳐서 무찌르고 그리고 암몬지역까지 나아갔다. 이스라엘은 아모리의 모든 성읍을 차지하고 아모리 왕 시혼의 도성 헤스본까지 빼앗았다. 이스라엘은 헤스본에서부터 시혼이 빼앗았던 그모스 신을 섬기는 모압의 아르, 아르논까지 차지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주했다. 모세는 사람을 보내 야셀을 정탐하고 그 촌락들을 빼앗고 그곳에 있던 아모리 사람을 몰아 내었다. 그들이 바산 왕 옥에게로 피하자, 옥이 자기 백성을 거느리고 싸우러 나왔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주님은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바산 왕 옥에게도 행하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바산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그 땅을 점령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형제 에돔은 우회하게 하셨지만, 아모리와 바산은 정면돌파하게 하셨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선제공격을 해오자, 주님은 아모리 왕과 시혼 왕의 포악성을 벌하셨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친 역사는 후대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자랑하는 사건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미 이긴 싸움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긴 싸움이라고 해도 전쟁은 두려운 것이고, 환난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피할 길만을 내시는 것만이 아니라 돌파하게 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7/07/28/

민수기 21:1-20

민수기 21:1-20

약속의 땅을 향한 우회로라고 쉬운 길은 아니다. 아랏왕이 이스라엘과 맞서 싸웠다. 이스라엘 얼마는 포로로잡히기까지 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네겝지방 가나안 사람을 자신들의 손에 붙이시면 그들의 성읍을 전멸시키겠다고 서약했고, 주님은 이스라엘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스라엘은 네겝지방 성읍들을 전멸시켰다. 그곳 이름을 호르마라고 불렀다.
에돔땅을 돌아 호르산에서 홍해길을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 행군하던 백성들은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다며 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 만나는 이제 진저리가 난다고 불평했다.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뱁을 보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이 많이 죽었다. 백성은 모세에게 주님께 죄를 지었으니 뱀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중보해주기를 요청했다. 모세가 주님께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주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기둥위에 달아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기둥 위에 달아 놓은 불뱀을 보면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곳을 떠나 오봇-이예아바림-세렛-아르논 강변-브엘-맛다나-나할리엘-바못-비스가 산 꼭대기(모압 고원지대의 한골짜기)에 이르렀다.

//광야길과 일용할 양식이 지겹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다 주님이 보내신 불뱀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모세를 통해 해결책을 주셨다. 기둥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죽다가도 살아났다.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하시다. 원망과 불평으로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주님은 여전히 사랑하셔서 놋뱀을 보게 하셨다. 단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만 살아났다. –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곧 원망과 불평을 하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이 구리뱀을 보면 살려주셨듯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면 살아나도록 사랑하셨다. 단 예수를 구세주로 쳐다 본 사람들만 살아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7/07/27/

#요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