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5:1-21

민수기 15:1-2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시간순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자손이 불순종하여 아말렉에게 패배하여 호르마까지 물러난 후다. 당장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은 직후다. 그런데도 주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이 약속의 땅, 곧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할 제사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본토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외국인이나 예외 없이 자자손손 규례대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외국인들도 주 앞에서는 이스라엘 자손과 같을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같은 법과 같은 규례가 너희에게와 너희 가운데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함께 적용될 것이다.16]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 땅에서 난 양식을 먹게 될 것인데,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게 헌납물을 바쳐야 한다고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다. 자자손손 처음 거두어 들인 곡식으로 헌납물을 바치라고 명령하신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자손이나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주하는 외국인이나 같은 법, 같은 규례의 적용을 받는다. 차별이 없다. 역으로 말하면 외국인도 본토인과 같은 제사할 권리를 갖는다. 이런 법을 40년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면 한세대가 더 지나야 하는데, 미리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미리미리 그놈의 선민의식을 버리라는 뜻은 아닐까? (아마 출애굽 직후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선민의식이 없었을 것이다. 선민의식은 나중에 유대인들에게 의해 생겨나지 않았을까 한다.) – 그리스도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나음이 있다면 ‘서로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렇게 살 것이기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곳이기에….
//성도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차별이 없다. 그런데도 성도가 이 세상에서도 뭐 대단한 것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불순종 하는 곳에, 나의 먹는 것과 마시는 것만 생각하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께서 이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가진 권리는 이웃을 사랑할 권리다. 예배할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이웃을 자비와 긍휼로 대한 권리부터 실천해야 한다. 자비와 긍휼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증거다.

https://quietwaters.blog/2017/03/29/

민수기 14:26-45

민수기 14:26-45

(읽기)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을 원망하는 말을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전하셨다.
[나 주의 말씀이다. 내가 맹세한다. 너희가 원망한 대로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하겠다. 너희 가운데 스무살이 넘어 인구 조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뒹굴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약속의 땅을 주겠다고 맹세했지만, 이제 너희는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다만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갈 것이다. 너희가 걱정한 너희 자녀들은 내가 이끌고 너희가 거절한 그 땅으로 들어가겠다. 그 땅이 너희 자녀들의 고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뒹굴 것이다. 너희 자녀들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너희의 시체가 썩어 없어질 때가지 너희가 저지를 죄를 대신 짊어질 것이다. 너희가 그 땅을 사십일 동안 탐지 하였으니, 그 날 수대로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너희는 사십년 동안 너희의 죄의 짐을 져야 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싫어하면 너희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씀이다. 나를 거역한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말한 대로 반드시 할 것이다. 그들은 이 광야에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죽는다.]
열주 정탐꾼 중 열명은 그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리면서 온 백성을 선동하여 모세를 원망하게 했다. 이렇게 가짜뉴스를 퍼뜨려 선동한 사람들은 주님 앞에서 재앙을 받아 죽었다. 다만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아남았다.
모세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자 백성들을 매우 슬퍼했다. 다음날 백성은 일찍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잘못했다’ 하고 외쳤다. 모세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고 말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일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지금 올라가면 적에게 패한다고 경고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아말렉과 가나안 사람들의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주님을 등지고 돌아섰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생각하지도 않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모세는 주님의 언약궤와 함께 진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산간지방에 살던 아말렉 사람과 가나안 사람이 내려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추격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교만했다. 주님께서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데 굳이 올라가겠단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경고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더 생각하지도 않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주님께서 아말렉과 가나안을 피하도록 길을 돌리셨건만, 그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올라갔다.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만하면 무슨 소용인가?) 주님이 우리편이 될 것이라는 생각보다 더 큰 교만은 없다. 주님을 감히 우리편으로 만들 수 없다. 우리가 주님 편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왜 하라는 것은 안 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하려고 할까? 청개구리 심보다. 결국 주도권을 우리가 쥐겠다는 태도다. 교만이다. 교만은 망하고 만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7/03/27/

//// 방황이란 단어는 가축들이 풀을 뜯으며 다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방황에 필요한 것이 목자입니다. 목자의 미움을 받으면 소멸되기까지 방황하게 되고 목자의 사랑을 받으면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됩니다.

https://quietwaters.blog/2017/03/28/

////막무가내의 신앙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필경은 패배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로 하나님마저도 움직인다고 생각하고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입니다. 그러나 기도로 움직여야 하는 것은 막무가내의 나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민수기 14:11-25

민수기 14:11-25

(읽기)
회막에서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 온 회중 앞에 납작 엎드렸던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모세에게 이 백성이 돌로 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을 멸시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백성들에게 온갖 표적을 보이셨건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전염병으로 백성들을 쳐서 없애고 모세에게 더 크고 힘센 나라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신 장본이시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셔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이집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전멸시키시면, 세상 사람들이 주님이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어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죽였다고 말할 것이라고 주님께 아뢰었다.
모세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넘치어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지만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보여달라고 주님께 간구했다. 이집트를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주님께서 이 백성을 용서하신 것처럼 주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이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주님께서 모세의 말대로 용서하셨다. 그러나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지는 않으셨다. 주님의 영광을 보고도 주님께서 이집트와 광야에서 보여준 이적을 보고도 열번이나 거듭 주님을 시험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약속의 땅을 못 볼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주님을 멸시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 땅을 못볼 것이라고 하셨다. 다만 갈렙은 전적으로 주님을 따랐으므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가겠고, 그의 자손은 그 땅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이스라엘 진영을 아말렉과 가나안 사람들을 피해, 홍해길을 따라 다시 광야쪽으로 가라고 명하셨다.

(생각하기)
//주님의 권능 –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넘치어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지만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시는 것이 주님의 권능이 갖는 특징이다. 모세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려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없애려고 하시자,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넘치어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주님께서는 모세의 간구대로 출애굽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용서해주셨다. 그렇지만 죄에 대한 벌로 내리셨다. 열번이나 거듭 주님을 시험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약속의 땅을 못 볼 것이라고 하셨다.
//열번이나 거듭 주님을 시험했다는 말은 주님께 대한 완전한 불순종을 뜻한다. 열에 열번이다. 순종의 흔적이 없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약속의 땅을 상속받지도 못한다. 지리적으로도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겠지만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도 갖지 못한다. 이들에게도 아말렉과 가나안 진영을 피하는 일반은총은 주어지겠지만, 이들은 약속의 땅을 앞두고 유턴을 당하고야 만다. 이들에게는 약속의 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이 땅에만 미련이 있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찌 주어질까?

(지난글) ////온 회중이 돌을 들어 갈렙과 여호수아를 치려고 할 때[10] 하나님께서는 회막에서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순간적으로 자세가 바뀝니다. 온 회중은 엎드렸을 것이고, 엎드렸던 모세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 // 죽이는 것이 ‘작은’ 권능이라면 살리는 것은 ‘큰’ 권능입니다. 주님의 권능은 큰 권능입니다. …

https://quietwaters.blog/2017/03/26/

민수기 14:1-10

민수기 14:1-10

가나안 백성이 자신들보다 강해 쳐올라갈 수 없다는 열 정탐꾼의 말에 소동이 일어났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했다. 그리고 “차라리 이집트에서 죽었더라면, 아니 이 광야에서라도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에 대한 원망은 “주님은 왜 우리를 이땅으로 끌고 와서 칼에 맞아 죽게 하시는가? 왜 우리 가족을 포로로 잡히게 하시는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하며 주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 대신 새로운 우두머리를 세워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호 엎드렸다. (모세와 아론마저도 온회중 앞에 사죄하려는가?)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슬픔에 겨워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온 회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탐지하고 온 땅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주님게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주님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스라엘 온 회중은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회막에서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타났다.

//매우 좋은 땅 –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신 그런 좋은, 아름다운 땅이다. 목자가 양들을 인도해서 들어갈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다. 그런데 땅을 보지 않고 거주민을 보고 불평을 하는 것은 목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양들의 태도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어떻게 지나왔는지 새까맣게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와 다름 없이 매우 좋은 땅이 아니었던가? 가짜 뉴스에 좋은 땅이 사람을 삼키는 땅이 되어버렸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홍해)바다가 이집트를 삼켰듯이, 어떤 땅이든 사람을 삼킬 것이다. 그러니 핵심은 그 땅이 문제가 아니라, 그 땅의 거주민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함의 여부다. 만사가 그렇다. 주님과 함께 할 때가 가장 좋은 때요,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가장 좋은 땅이다.
//우리의 밥 –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속담?이 있다.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는 가나안이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밥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그 땅의 사람들에게 밥이 될까 두려웠다. 술에 취하할까봐 전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태도랄까? 이런 두려움은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의 종착역이다.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면 먹어야 할 밥에게 먹힐 일이 없다. 술에 취하지 않는 것보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을 바로 알 수 있다. 주님을 알 때 두려움은 사라진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좋은 예다.

https://quietwaters.blog/2017/03/25/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1,32]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땅을 살려고 하면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온 회중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앞설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10:2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니 약 600,000:2가 맞겠죠)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적은 무리에 속하고 싶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따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하며 살고 싶습니다.

민수기 13:21-33

민수기 13:21-33

열두 정탐꾼은 가나안 땅을 샅샅이 탐지했다. 그들은 에스겔 골짜기에서 포도 한 송이가 달리 가지를 꺾어서 두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둘러 메었다. 석류와 무화과도 땄다. 그들은 사십일 만에 바란 광야 가데스로 돌아왔다.
열두 정탐꾼은 가져온 과일을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에 보여주면서 정탐 결과를 보고했다.
[정탐한 땅을 샅샅이 탐지했다. 그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다. 가져온 과일이 증거다. 그렇지만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은 강하고 성읍들은 요새처럼 견고하고 크다. 그곳에서 아낙 자손도 보았다. 네겝지방에는 아말렉 사람이. 산악지대에는 헷 사람, 여부스 사람, 아모리 사람이 살고 있다. 바닷가와 요단 강가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다.] (그러나 적용은 달랐다.)
갈렙은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며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하고 격려했다.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은 “우리는 도저히 그 백성에게로 쳐올라가지 못합니다. 그 백성을 우리보다 더 강합니다.” 하고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악담했다. [가나안 땅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삼키는 땅이다. 그 땅에 사는 백성은 키가 장대 같고, 또 그곳에 네피림 자손의 한 갈래인 아낙자손오 보았다.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다. 아마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메뚜기 같이보였을 것이다.]

//정탐꾼 보고서를 한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탐한 가나안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그곳을 차지하고 사는 사람은 거인이다.] //이 보고에 따른 적용은 둘로 갈린다. 갈렙은 그 땅으로 올라가 점령할 수 있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은 그 땅 백성이 우리보다 강하니 점령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다. //갈렙은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였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판단에 따랐다. 갈렙의 반대편은 가짜뉴스까지 퍼뜨렸다. //보고에 따르면 가나안 땅에 아낙자손이 사는 것은 맞는듯 하다 그러나 갈렙의 반대편 정탐꾼은 거기에, 가나안 사람들이 모두 키가 크다고 말하며, 아낙 자손을 네피림의 후예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은 존재라고 덧붙였다. 이같은 침소봉대가 또 있을까 싶다. 이렇게 가짜뉴스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순식간에 백성들을 삼킬지도 모르는 저주의 땅으로 소문났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짜뉴스에 속은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도가 두 마음을 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야고보는 편지1장에서 이런 사람은 주님께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 순종없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는 방법은 없다. 아니 순종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암송만으로는 안 된다.

https://quietwaters.blog/2017/03/24/

////메뚜기 한마리 한마리는 열명의 반대의사처럼 거인과 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땅을 덮은 ‘메뚜기 떼’에는  애굽땅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작습니다. 뭐 메뚜기라 불려도 됩니다. 그러나 저는 ‘메뚜기 떼’에 속한 한마리, 한명이라는 것을 압니다. 수많은 믿음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믿음의 위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 선배들이 있습니다. 다들 각각 유니크 하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이들과 함께라면 메뚜기 같은 저도 하나님나라를 능히 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한다고 추상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개인적으로 불러 주셨지만 하나되라고 불러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