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13-28

마태복음 23:13-28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며 책망하신다.
그들에게 ‘화1’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자기를 더 높이는 방법이 있을까?
화2 – 그들은 교인 한 사람을 얻어 자신들 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게 한다. //천국에 들어가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한 술 더 뜬다. 화3 – (예수께서 그들을 눈 먼 자라들이라고 하신다.)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은 지키나 마나고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 예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결국 그들은 재(제사)보다 잿(젯)밥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긴다. 아니 하나님보다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다. 화4 –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의 완성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 예수께서는 십일조도 드리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다. //이 역시 돈 되는 일에만 집착한다고 책망하신다. 하나님은 돈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을 원하신다. 화5 – 겉은 번지르게 치장하지만 마음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신다.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해야 겉도 깨끗할 것이라 하신다. //마음을 깨끗게 하는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수 밖에 없다. 화6 – 겉으로는 아름답게 치장하나 속은 생명이 없는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지적하신다. 겉으로는 의로운 척하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신다. //남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한다고 하신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르침은 받되 그들이 행하는 것은 따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들을 열거하신다. 하나같이 ‘화’를 불러올 일들이다. 이 모든 외식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교만이다. 자기를 높이기 때문이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4/04/

마태복음 23:1-12

마태복음 23:1-1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놓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자리에 앉았다는 뜻이리라.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돌려말하면, 그들은 모세처럼 순종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리라.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가르침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에게 멍에를 지우고 자신들은 손에 물도 묻히지 않으려고 한다고 책망하신다. (예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신것을 기억하자)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 (예수께서 이런 자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고, 하늘로부터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도 기억하자) 그들은 경건한 옷차림을 하며, 잔치의 상석에 앉으며, 문안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며, 지도자로 추킴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행위를 본받지 않기 위해서는 선생님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신다. 선생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시고, 제자들은 모두 형제자매라고 하신다. 심지어 육신의 부모도 하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을 기억하자. 또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신다. 지도자도 오직 한 분 그리스도뿐이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와 같은 뜻이다.)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셔서 하늘 보좌에까지 높아지셨다.

//그런데 왜 한국 교회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되었는가?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여전히 리더쉽세미나가 판치는 세상이다. 지도/이끔 (leading) 이라는 단어대신 영향력 (influence) 이라는 단어로 옮겨가고 있지만 이 역시 세상가치로 따진다. ‘종의 리더쉽’이나 ‘섬김의 리더쉽’이라는 표현도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하신다. 나의 선생님이 누구신지, 나의 주인이 누구신지 분명히 하라고 하신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4/03/

마태복음 22:34-46

마태복음 22:34-46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관한 예수의 답변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자 바리새인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 한 율법사가 예수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지 시험하여 물었다.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의 자손인지 물으셨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라는 노래에서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 시편을 인용하셨다. 그리고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은 즉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물으셨다.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 날부터 감히 예수께 묻는 자도 없었다.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이다. 우선순위가 없다. 둘째도 첫째와 같다고 예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는 말에는 토 달지 않으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라는 말에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예수를) 믿어야 한다’ 고 토를 단다. 그놈의 ‘믿음’ 타령이다. 그러나 믿음의 여부는 처음부터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증명된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위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다윗의 시로 깨우쳐주신다.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으로 이땅에 오셨지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대로 오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오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곧 하나님이시다. 더이상 감히 예수의 권위에 트집을 삼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권위를 부정하게 된다. +++++//율법사의 선공은 구약을 정리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구약을 줄줄 외우고 묵상한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객관식이다. ‘무엇입니까?’의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후공은 암기문제가 아니라 해석이 필요한 주관식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율법사라 하여도) 누구의 자손이냐라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어찌’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 직강을 수강생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어찌에 대해서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 다윗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는데 성령의 도우심 없이 우리가 어찌 깨달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같은 것이다’ 라는 가르침은 어떻게나 어찌를 따지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같은 것임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보다는 어떻게나 어찌를 따지면서 탁상공론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질책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도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4/02/

마태복음 22:23-33

마태복음 22:23-33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4/01/

>> 4년전 묵상글 몇자만 수정

헤롯당을 끌여들였다 실패한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없다하는 사두개인들이라도 예수를 해코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침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사두개인들은 ‘형사취수제’를 언급하며 부활의 모순을 꼬집고자 했다. 만일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우라는 모세의 법이 있는데 칠형제 집안에서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상속자 없이 죽어서 그 아내를 동생에게 물려 주었는데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침내 그 여자까지 죽었다. 사두개인들은 그려면 부활 때에 이 여자는 일곱 명 중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예수님께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해 오해한다’ 고 대답하셨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다. 성경도 모른다고 하신 것을 봐서는 모세오경만 인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에 대한 무지에 대해 지적하신다. 성경을 바로 알았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알았다면 부활에 대해서도 바로 알 수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개인들은 만약 부활한다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다시말해 이 땅에서의 삶이 반복된다고밖에 달리 생각 못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이땅에서도)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했다. 예수님은 부활의 삶을 천사의 삶이라고 정리하신다. 천사들과 같다는 말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줄로 정히한다면 천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하에 순종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다.

예수님은 죽은 자의 부활이 모세오경에도 이미 드러난다고 사두개인들에게 답하신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셨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살아계셨을 때도 그들의 하나님이셨고 아브라함이 이땅에서 죽은 후에도 그들의 하나님이시다. 다시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몸의 부활은 아직일지 몰라도) 존재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부활특강에 무리는 놀랐다. 사두개인도 놀랐을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이상한(잘못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우리가 황금집에서 사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황금성에 사시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보좌에 앉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문학적 묘사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요한은 성도들에게 새하늘과 새땅은 물질적이 설명이 아닌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은 곳이라고 천국의 속성을 밝힌다. 처음 것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다 지나간 곳이다. 바울은 한걸음 더 나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도들은 이땅에서도 부활의 맛을 보며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을 누리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부활을 맛보며 살 수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신다.

마태복음 22:15-22

마태복음 22:15-22

바리새파 사람들은 어떡하든 예수를 트집잡기 위해 의논했다. 자기들만으로는 힘들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싫어하는) 헤롯당원과 연합도 불사했다. 그들은 예수를 선생님이요, 진실하신 분이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시는 분이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추켜 세운 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그들에게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하고 입을 여셨다. 그리고 세금으로 내는 돈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오자, 예수께서는 데나리온에 있는 초상이 누구의 것이며 누구 이름이 적혀있는지 물었다. 사람들은 황제의 초상과 황제의 이름이 적혀있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리라고 대답하셨다. 그들은 트집잡기는 커녕, 오히려 예수의 답볍에 탄복하고 돌아갔다.

//바리새인들은 정말 예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듯 말을 했다.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진실하신 분이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시는 분이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추켜세운 대목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예수와 사귐은 없는 자들이었다. 아니 오히려 트집을 잡으려고 했으니 대적자들이다. 아는 것과 사귐은 이처럼 극명히 구분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트집을 잡기 위해 자신들이 가장 싫어하는 헤롯당원과 연합했다. 그만큼 예수께 대적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께 ‘세금문제’가, 자신들이 예수께 받았던 ‘요한의 세례’와 같이 진퇴양난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에 답변을 주저하고 모른다고 대답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모릉양가와 달리, 예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고 분명한 답을 하셨다. //무엇이 황제의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지는 여전히 모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모호할 수 있어도 황제의 초상과 황제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황제의 초상과 황제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선언같이 들린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든 표식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것은 돈이 아니고 너희 자신들이라고 교훈하시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돈을 동시에 섬기는 자신들의 위선이 드러나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돌아갔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