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25-42 읽기

25-28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반문하셨다. 그 율법교사가 율법에 이르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네 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답변하셨다.

29-37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 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나귀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고 그 사람을 잘 볼봐 달라고 부탁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는지 그 율법교사에게 물으셨다. 그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라고 명하셨다.

38-42 예수 일행은 어떤 마을로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했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마리아 보고 자신을 거들어 주라고 말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다.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아무도 그것을 마리아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 영생! 율법은 영생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아는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칭찬에? 율법교사는 자신이 예수를 시험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는 지 보이기 위해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강도만난 사람을 도운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마리아 사람 같이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다.

// 영생을 주제로 한 율법교사와 예수의 대화에서 다시한번 예수의 평지설교, 곧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가르침을 (6:27-36 )떠올려 본다. 율법교사는, 죄인들도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사람이요,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좋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의 사마리아 인은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주는 자로 등장한다. 원수지간인 유대인을 측은히 여긴 사마리아 인을, 율법교사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인정하게 한다. 예수께서 평지설교에서 말씀하신 대로 ‘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씀을 실천한 전형으로 등장한다. 예수께서 산상에서 가르치신 그대로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이것을 누리는 것이 영생이다.

// 율법교사는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을 알았지만,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정작 몰랐다. 율법교사는 알기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아는 만큼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율법교사가 사랑의 대상을, 이미 사랑하고 있는 자로 제한하고 있었기에, 예수께서는 원수에게도 이웃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내’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 마르다와 마리아 – 주님의 일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르다는 주님을/주님의 일행을 접대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에 반하여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예수께서는 주님의 일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님을 교훈하신다. 미가 선지자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게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지 염려하며 들뜬 사람에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게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예언했다. 핵심은 예수와 함께 함이다. 주님을 어떻게 섬길지 염려하고 들뜨는 것보다, 차분히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가복음 10:17-24 읽기

17-20 일흔[두] 사람이 (사도가)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예수께서 일흔[두] 사도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22 일흔[두] 사도의 보고를 들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이렇게 아뢰었다. 다음과 같이 성부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들 밖에는, 그리고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23-24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 칠십[이]인의 기쁨 – 예수께 돌아 온, 칠십[이]인 사도들은 귀신들까지도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했다. 물론 주님의 이름을 대면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이들 칠십[이]인은 요한이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9:49)라고 말했다가 예수께 책망을 들었을 때, 요한이 지칭한 어떤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 더 큰 기쁨 – 예수께서는 귀신들까지도 칠십[이]인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칠십[이]인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귀신들까지 내게 복종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신다.

// 예수의 기쁨 – 예수의 기쁨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다.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성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삼위하나님의 교제!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곧 아버지 하나님께 아신바 된 사람들로 (특별히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칠십[이]인의 사도들과 이들의 복음을 받아들인 곳곳의 사람들이 포함될 것이다.) 말미암아 기뻐하신다. 그러나

// 기쁨 중의 기쁨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보는 너희 눈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를 많은 예언자들도, 왕들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했다고 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삼위 하나님이 교제를 보고 들으니 복되다고 하신 것이다. 성도가 삼위하나님의 사귐(교제)에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기쁨 중의 기쁨이요, 가장 큰 복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다.

누가복음 10:1-16 퀵메모

// 다른 일흔[두] 사람 – 열두 제자(사도)와 다른 제자들이다. 아마도 요한이 차별하려고 했던, 예수 일행과 함께 따라 다니지 않았지만 (따라 다녔어도 함께 숙식을 하지 않았던)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어떤 사람들이 아닐까? 예수께서 일흔[두] 명을 둘씩 보내셨으니(파송하셨으니), 이들을 일흔[두] 사도라고 불러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 주님께서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 예수께서는 물리적 한계를 분명하게 지니신 완전한 사람으로 이땅에 오셨다. 승천할 기약이 가까이 오자, 예수께서는 좀 더 많은 고을과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자 일흔[두] 제자를 둘씩 (사도로) 보내셨다.

// 일흔[두] 사도의 첫(먼저) 메세지는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였다. 이 말을 참 뜻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하여간 평화의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영접하는)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경고를 하고 그곳을 떠나라고 하신다. >> 한국 교회는 평화의 메세지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가? 한국 교회는 평화의 메세지를 가지고 다가오는 세상에게 열려있는가? 한국 교회는 개교회 안에서만 우리끼리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 누구든지 일흔[두] 명의 말을 듣는 사람은 예수의 말을 듣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 단순히 보내심을 받았고 해서 사도가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말이 예수의 말이라고 예수께서 친히 인정하셨으니 일흔[두] 명은 사도가 맞다.

누가복음9:51-62 읽기

51-56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아마도 날이 저물어) 예수께서 심부름꾼들을 앞서보내 사마리아에 있는 한 마을에서 예수께서 머물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마을에서는 예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그 마을 사람들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태우라고 명령해도 될까요 라고 예수께 물어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런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셨다. 할 수 없이 예수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서 유숙하셨다.

57-62 예수 일행이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예수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제자의 길은 집도 절도 없는 나그네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따르겠다는 사람 말고) 다른 사람에게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즉답 대신,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라고 명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예수께 ‘내가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고 답하셨다.

// 누가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너머에 있는 승천을 본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끝나는 게 아니다. 승천이 화룡점정이다. 예수께 승천이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서 아버지 집에 돌아가 영원히 아버지 집에 거하는 것이다. 시편 23편의 시인이 부른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라는 노래를 성도도 불러야 한다.

//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있는 사마리아 마을들도 방문하여 하나님나라 복음을 전파하길 원하셨으나, 모든 마을에서 예수를 모시지는 않았다.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은 마을들을 (예수께서) 불로 심판하길 원했지만, (야고보와 요한의 이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목적이 심판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여러부류다. 1) 제자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제자의 길은 이세상에서는 집도 절도 없는 길이라고 가르치신다. 세상 집이 아닌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려주신다. 2) 죽은 사람 장사를 핑계로 제자의 길을 미루는 사람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알려주신다. 하나님나라는 사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3) 예수께서는 가족관계로 제자의 길을 미루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야 말로 형제 자매요 어머니라고 가르치신다.  

누가복음 9:37-50 읽기

37-45 다음날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다. 큰 무리가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 중 한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제 외아들을 보아주십시오. 귀신이 제 아들을 사로잡으면,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경련을 일으키고, 입에 거품을 물게 합니다. 그리고 제 아들을 상하게 하면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청하였지만, 그들은 해내지 못했습니다.” 라고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예수께서는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네 아들을 데려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아이가 예수께로 오는 도중에도 귀신은 그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예수께서 그 악한 귀신을 꾸찢으시고, 아이들 낫게 하셔서, 그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랐고 감탄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도 무슨 뜻인지 예수께 묻는 것을 두려워했다.

46-50 제자들 사이에서 서열 다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제자들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요한이 동문서답을 한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쫒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막지 말아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남아 있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고 아버지에 돌려주신 예수께서는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인자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믿음이, 올바른 마음이 물리적인 예수와의 동행보다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죽기까지 섬기러 오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께 받은 치유와 축귀의 능력과 권능을 자랑하는데 사용하려고 했다. 남아 있던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으려고 했을 때, 귀신을 내쫓는 자신들의 능력/권능을 자랑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향해 가시는데, 남아 있던 제자들은 영광의 자리를 놓고 다퉜던 것이다. 그러니 귀신을 내쫓을 수 없었다.

// 이런 제자들은 결국 서열 다툼을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라는 말씀으로 서열 논쟁을 일축하신다. 그러자 이번에는 요한이 배타적인 분리 논쟁을 한다. 우리끼리는 크고 작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다른 그룹과는 다르다는 논리다. 직접 예수를 따르는 자신들이 낫다는 논리다. 예수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사람들을 막지 말라고 하신다. 반대하지 않으면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신다. 서열 매김도 하지 말고 분당질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 기도는 예수와의 동행이다. 예수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와 물리적 동행을 못하는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