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28-36 읽기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그 때,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했다. 그들은 영광에 둘러싸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에 대하여 말을 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과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를 떠나가려고 할 때, 베드로가 예수께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선생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구름이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휩쌌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 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났다. 구름 속의 소리가 끝나자, 예수만 거기 계셨다.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다. 길게 안보고 짧게 본다면, “여기에 서있는 사람 가운데는,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는 앞 구절의 말씀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하나님나라를 보는 사건이다.

//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다른 제자/사도들보다 편애하시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이 셋은 이론 교육보다 현장학습이 더 필요해서 예수께서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고 상상해 본다. 많은 물고기를 잡는 순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를 때부터 이들 셋은 ‘백문이불여일견’이었다.

//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산상에서 변화된 예수의 사건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졸면서 눈비비면서 목격한 사건이다. 증인이 셋이나 되니 꾸며낸 사건은 아니겠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내용을 세 제자가 제대로 알아 들었을리 없다. 심지어 초막 셋을 지어서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모시겠다는 말도 베드로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한다. 다만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하늘의 소리는 분명했다고 기록한다.

// 산상에서 변화된 예수의 사건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하는 것이요,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들어야하는, 곧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곧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다스리는 나라요,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 (순종하는) 자들임을 가르친다.

// 누가의 이야기 전개는 ‘오병이어-제자도-산상에서의 변화’로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주라’ 고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돌로 떡을 만드시지 않으셨지만, 굶주린 무리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이런 예수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기 시작하시며, 제자도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산상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실 때도 (세 제자가 이해하지 못하고 보고 들었지만) 핵심은 분명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이었다. 그러나 셋은 확실히 들었다. “너희는 예수의 말을 들어라”

//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능력과 권능을 내려놓으시고 섬기는 삶을 구체화 하신다. 기도하러 올라가신 산에서 변화된 예수의 모습이다. 우리도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라고 능력과 권능을 떠벌이지 말고 (내려놓고) 복음에 합당한 삶, 고난과 함께 하는 삶을 구체화해야 한다.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논의하신 것은 부활의 ‘영광’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고난과 죽음이었다. 예수께서 내게 바라시는 것, 나의 기도를 통해 변화되어야 할 나의 모습도, 부활에 참여하는 영광이 먼저가 아니라, 우선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고난이다. 기도의 자리가 곧 변화의 자리다. 기도의 자리가 곧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자리다

누가복음 9:18-27 읽기

18-22  예수께서 제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또) 혼자 기도하셨다. (기도를 마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부활했다’ 라고 말한다고 대답했다. 곧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대표로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다. 그리고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상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 라고 덧붙이셨다.

23-27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있는 사람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

// 예수께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바로 기도였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통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이땅에 오셨음을 재차 확인하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길 앞에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 예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다. 제자의 정체성은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제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라가야 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곧 날마다 자기 정체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다. 곧 예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는 것이다. 예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목숨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 앞에도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  

// 예수께서는 자신과 자신의 말씀을 동일시 하신다. 예수가 곧 말씀이요, 예수의 말씀이 곧 예수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야 (심판 날에) 예수께서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역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은 자기들의 본향을 찾는 자들이라고 말하며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라고 편지한다. 하나님께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 모든 사람들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들은 결국 제자들이다. 성도다.

누가복음 9:1-17 읽기

1-6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시고,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주도록 그들을 파송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속옷도 두벌씩은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다가 거기에서 떠나라고 하셨다. (만약)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거든,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서 그들이 거부했다는 증거를 삼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파송받아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7-9 분봉왕 헤롯이 예수와 제자들이 곳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다니자 당황했다. 어떤 사람들은 헤롯이 죽인 요한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소문을 내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또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가운데서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헤롯은 자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문의 주인공인 예수가 누군지 만나고 싶어했다.

10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예수께 보고했다.

11-17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벳새다라고 하는 마을로 가셨다. 무리들은 예수 일행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무리를 맞이하시고 하나님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열두 제자가 예수께 ‘무리를 헤쳐 보내어 주위의 마을과 농가로 가서 잠도 자고 먹을 것도 구하게 하십시오’ 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명하셨다. 제자들은 ‘우리에게는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모든 사람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을 것을 사와야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빈들에 모인 무리는 남자만도 오천 명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라고 명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무리를 한 오십 명씩 앉게 하였다. 예수께서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시고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무리들 앞에 나누게 하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 오병이어의 미스테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광야에서 40년동안 만나로 먹이신 ‘일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라는 호기심이 없지만,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해서는 늘 궁금하다. 그러나 오늘은 ‘일상’이 곧 ‘기적’임을 깨닫게 된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주게 하시려고 열두 제자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능을 주시고 파송하셨다. 제자들은 돌아와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친 것을 예수께 보고했다. 예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 빈들로 가셨다. 지팡이도 없이 배낭도 양식도 돈도 여벌의 옷도 없이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고 돌아온 제자들, 곧 일상이 기적이 되는 하나님나라를 맛보고 돌아온 제자들이었지만 벳새다 빈들에 모인 엄청난 무리 앞에 다시 현실적 계산이 앞서고야 말았다. 자신들은 매매(사고팔지)않고 사역을 감당하고 돌아왔는데, 남자만 오천명인 큰 무리 앞에선 그만 다시 계산적이되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는 먹고 마시고 쉬기 위해 매매하는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셨다. ‘어떻게’라는 질문이 또 꿈틀 거린다. 그러나 오늘은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었다’를 생각하게 한다.

// 열두 제자야 말로 일상이 곧 기적인 사도의 삶, 하나님나라를 경험한다. 예수의 명령에 따라 ‘오병이어’를 나눠주었는데, 결국 자신들의 바구니를 채운것이다. 그러나 사실 열두 제자가 사도의 삶, 곧 곳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주면서 이미 경험한 것이었다. 모든 능력과 권능을 예수께 받아, 열두 사도는 곳곳에서 그저 명령에 따라 나누어 주었는데, 그들은 지팡이. 배낭, 양식, 돈, 여벌의 옷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곧 열 둘 모두 바구니를 채우는 삶을 살았다.

// 지난 27년 나와 우리 가족이 경험한 삶이다. 어떻게? 미스테리다. 세상 임금은 관심이 없을지라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은 분명 나를 만나 이 모든 미스테리를 설명해 주고 싶으실 것이다. 나의 믿음의 경주를 응원하실 것이다. 내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누가복음 8:40-56 읽기

40-42 예수께서 (거라사로부터) 돌아오시니, 예수를 기다리던 무리는 예수를 환영했다. 그때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께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간청했다. 야이로의 열두 살쯤 된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데, 무리가 예수를 밀어댔다.

43-48 예수를 밀어대는 무리 가운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있었다. (열두해 동안 의사에게 재산을 모두 다 탕진했지만) 아무도 이 여자를 고치지 못했다.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 곧 출혈이 그쳤다. 예수께서 ‘내게 손을 댄 사람이 누구냐?’ 라고 물으셨다. 아무도 시인하지 않자, 베드로가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서 밀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누군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떨면서 예수께 엎드려서, 예수께 손을 댄 이유와 자신이 낫게 된 경위를 모든 사람 앞에 고백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라고 말씀하셨다.

49-56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실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딸이 죽었으니 더이상 예수를 괴롭히지 말라고 전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회당장 야이로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딸이 나을 것이다.’ 야이로의 집에 이르러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아이에게로 들어가니, 집안 사람들은 모두 울며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울지 말아라.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아이가 죽었음을 알았기에 예수를 비웃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아이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이의 영이 돌아와서, 아이가 곧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을 아이에게 주라고 지시하셨다. 아이의 부모는 놀랐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다.

//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은 이방인 백부장이나 유대 회당장이나 차이가 없다. 다만 이방인 백부장과 달리 회당장은 직접 예수께 나아왔다. 백부장은 예수와의 물리적 동행은 없었지만 예수의 권위에 순종하는 큰 믿음을 보여주었다면 회당장은 끝까지 예수와 물리적 동행을 하는 믿음을 보여준다. 믿음은 크고 작냐보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예수의 치유집회 소식을 듣고 나왔는데, 회당장이 나타나 예수를 데리고 가니 그 마음이 어땠을까?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그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서라도 낫고자 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른다. 그 여자는 믿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곧 믿음대로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다.

// 집으로 가는 길에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회당장은 죽은 딸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딸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와 끝까지 동행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딸의 죽음을 확인한 집안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아직 딸의 죽음을 직접보지 못한 야이로와 달리 그들은 확실하게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예수와 동행하지 않는다면 죽을 병이나 죽음이나 무슨 차이가 있으랴!

// 12년전, 야이로의 집에는 딸이 태어나는 기쁨이 있었다. 그러나 한 여자에게는 혈루증이 시작되는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기쁨과 아픔은 부침이 있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것은 예수와의 동행이다. ‘예수 믿음’이 있어도 인생에서는 희노애락의 부침을 겪는다. 그러나 ‘예수 믿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한다.        

누가복음 8:26-39 읽기

26-31 예수 일행이 탄 배는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도착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오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을 떠나,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 예수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말했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 나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이었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로 묶어서 감시했으나, 그는 쇠사슬을 끊고 귀신에게 이끌려 광야로 뛰쳐나가곤 했다.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물으셨다. 그가 “군대”라고 대답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했다.

32-39 마침 산기슭에 큰 돼지 떼가 방목 중이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했다. 예수께서 허락하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목격한 이 일을 보고 읍내와 촌에 가서 알렸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예수께로 왔다. 사람들은 귀신들이 나가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도 두려워하였다.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지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거라사 주위의 주민들은 모두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혔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되돌아 가시기로 하셨다. 귀신이 나간 그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 하라고 명하셨다. 그 사람이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에 알렸다.

// 예수! 믿음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바람과 물이 예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는 것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도착한 거라사 지방. 이곳에서 예수는 불순종이, 곧 믿음없음이 무엇인지 제자들에게 보여준다.

// 귀신들! 귀신들린 한 사람을 묘사하면서, 누가는 ‘귀신’을 ‘악한 귀신’ 곧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귀신, 곧 ‘더러운 영’이 불순종의 영이다.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귀신들은 사람에게 들어가 사람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도하신 것이다. 귀신들은 어쩔 수 없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해야 했다. 악한 귀신들이 모른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연세계는 (바람과 물은) 예수께 즉시 순종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돼지들도 (동물의 세계도) 창조주께 즉시 순종했을 것이다. 돼지들은 악한 귀신에 사로잡히기 보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을 택했다.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작은 사람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큰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가르치신다. 실족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그것들을 빼어버리고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하신다. 더러운 영들은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했지만, 자신들이 이미 지옥에 살고 있다는 것을, 곧 무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런 악한 귀신들이 들어온 돼지 떼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물에 빠져 죽는 것 외에는 달리 없었을 것이다. 어찌 더러운 영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그냥 둘 수 있으랴.

// 악한 귀신에 시달리지 않았던 거라사 지방 주민들!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초지종을 듣고는 그동안 귀신들린 사람이 자신들 대신 모든 악한 귀신들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대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쩌면 마을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신사’였던 셈이다.) 돼지 떼의 죽음은 경제적으로 큰 손실인 것은 분명하나, 더러운 영들을 대신 담당해 줄 사람이 (귀신들을 모신 ‘신사’가) 사라졌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큰 두려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 마을을 떠나가시길 간청했다. 그렇다고 베드로처럼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한 것도 아니었다. 베드로와 달리 예수를 주인으로 (주님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서와 같이 환영받지 못한 거라사를 떠나시기로 하셨다.

// 귀신 들렸던 사람! 귀신이 나가자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을 찾은 그는, 거라사 주민들과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라는 바울의 표현이 딱 맞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그가 속한 마을로 (집으로) 파송하셨다. 누가는 그에게 제정신이 들었다고 표현한다. 그는 고향 읍내에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전했다. ‘사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온전한 영을 가져야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된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떠나시는 예수와 물리적으로 동행하지 못했으나, 예수의 영과 동행했다. 성도들도 하늘 보좌 우편의 예수와 물리적으로 동행하지 못하나 예수의 영, 보혜사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