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16-25 읽기

16-18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대 아래 놓는 사람은 없다. 등경 위에 올려 놓아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한다. 빛은 숨은 것을 드러내고, 감추인 것을 환희 나타낸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줄로 생각하는 것마저 빼앗기기 때문이다.

19-21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로 왔으나 무리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고 전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22-25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배에서 잠이 드셨다. 그런데 사나운 바람이 호수로 불어왔다. 배에 물이 찼을 정도로 배가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고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깨어나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꾸짖으셨다. 바람과 물결이 곧 그치고 잔잔해졌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제자들은 두려웠고 놀랐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을 호령하니, 바람과 물조차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 등불을 켠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다. 아무도 행할 생각이 없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준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말씀의 숨은 뜻, 감추인 의미을 환희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말씀이 삶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더 경험하게 될 것이요, 말씀을 듣기만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들은 말씀마져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16-18)

//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의 가족이 갖는 특징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족, 곧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다. 누가가 예수의 족보를 하나님께까지 올린이유다.  (19-21)

// 바람과 물은 통제되지 않고 임의로 (소위 자연법칙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 즉시 순종한다.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지만 여전히 말씀을 배우는 자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훈련을 받는 중이다. 너희 믿음이 어디있느냐? 라는 질문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물처럼 말씀을 듣고 즉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가 (제자들이 절대 순종해야 할) 창조주 하나님이심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누가복음 8:1-15 읽기

1-4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했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했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여러 고을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께 나아오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5-8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 발에 밟히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기도 하였다. 더러는 돌짝 밭에 떨어져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아 없어서 말라 버렸다.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가시덤불과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 백백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고 외치셨다.

9-10 제자들이 이 비유가 무엇인지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운을 떼시고 제자들에게는 비유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11-15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길가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돌짝밭에 떨어진 것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동안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예수와 동행한 여자들. 누가는 많은 중에 세명은 이름까지 밝힌다. 열두 제자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여자들은 ‘섬기는 자’로 동행했다. 굳이 비교한다면, 사도는 자신의 소유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일하는 자들이라면, ‘섬기는 자’는 자신의 소유를 주님께 드려 일하는 자들이었다. 자신의 소유를 버리든, 자신의 소유를 주님께 드리든 천국을 산 사람들이다. 남녀의 차별이 없다.

// 씨뿌리는 비유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 ‘씨뿌리는 자’를 농부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농부라면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엔는 굳이 씨를 뿌리지 않을 것이다. 좋은 땅을 골라 뿌려야 농부라고 할 수 있다. 이천 년 전 예수 때는 어땠을까? 하여간 촛점은 씨뿌리는 자가 자기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가도 씨는 길가에도 돌짝밭에도 가시덤불에도 좋은 땅에도 떨어진다. 뿌려진다가 아니다. 다시말해 길가든 돌짝밭이든 가시덤불이든 좋은 땅이든 어느 곳도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기 위한 자기 밭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씨는 그런 곳에도 떨어진다. 그리고 씨가 떨어진 곳이 좋은 땅인지 아닌지는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 결국 좋은 땅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예수와 동행하는 제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지만 동행하는 제자들에게는 예수께서 친히 설명해 주신다. 제자들은 길가도 돌짝밭도 가시덤불도 아니다. 좋은 땅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들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하기를 기대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열매를 기대하신다. 결국 제자들에게 너희가 좋은 땅이라고 가르치시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길가가, 돌짝밭이, 가시덤불이 스스로 노력한다고 좋은 땅이 되지 않는다. 예수와 함께 동행함이 좋은 땅이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갈고 닦는다고 좋은 땅이 되지 않는다. 임마누엘뿐이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았다면, 지금은 비록 부분적으로 알고 있지만,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굳게 간직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인내하면, 그 말씀은 나를 통해 열매를 맺을 것이다.

누가복음 7:36-50 읽기

36-40 바리새파 사람 중 한 사람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예수께서 식사하시는 것을 알고,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등 뒤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 털로 예수의 발을 닦고, 예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바리새파 주인은 이것을 보고 혼자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며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라고 중얼거렸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바리새파 사람의 이름이 베드로의 이름과 같다. 흔한 이름이었다는 증거다)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시몬은 예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면 말씀하시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41-48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었다. 돈놀이꾼은 둘의 빚을 모두 없애주었다. 그러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돈놀이꾼을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시몬의 판단이 옳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뒤에 있는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기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여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라고 말씀하셨다.

49-50 상에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렸다. “이 사람이 누구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라고 말씀하셨다.

//  사랑과 용서. 용서와 사랑.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가르치신다. 사랑하고 용서하라.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런데 우리는 용서 받아야 사랑하려고 하든지, 아니면 사랑 받아야 용서하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분명 향유 옥합을 깨뜨린 죄인인 여자는 주님을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많은 죄를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여인이 마치 오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받는 사람처럼 많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신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랑=용서’라고 적용했었다.  사랑은 용서다. 용서는 사랑이다. 예수께 사랑받는 것이 곧 예수께 용서를 받는 것이요, 주님께 용서 받는 것이 곧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은 양방향이다.)

// 이것은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향한 성도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랑해야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사랑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죄인인데!’ 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십 데나리온 빚을 탕감받은 바리새인이 된다. 아니 스스로를 정죄하는 꼴이다. 주님은 오백 데나리온, 오십 데나리온 빚을 진자를 모두 탕감해 주신다. 오십 빚을 졌다고 더 의롭다고, 오백 빚진자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며 오산이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차이도 주님 앞에서는 오십보백보가 아니던가.

// 나의 자리에 주님을 초대했다고 다 된 것은 아니다. 내 편에 주님을 모셔야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내가 주인(공)이 되려는 것이다. 바리새인처럼 조연의 역할마저 여인에게 빼앗기게 된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초대한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주님 편에 나아가 서야 한다.

누가복음 7:18-35 읽기

18-23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일들을 옥에 있는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둘을 불러 주님께 보내서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게 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계셨다. 예수께서 요한의 두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24-28 요한의 심부름꾼이 떠난 뒤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광야에서 무엇을 보기 위해 나갔느냐? 갈대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비단 옷을 입은 사람,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을 보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다. 그렇다.  너희들이 광야에서 본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위해한 인물이다. 성경에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기록된 내 심부름꾼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29-30 (모든 백성과 심지어 세리들도 요한의 설교를 듣고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옮으심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물리쳤다.)

31-35 예수께서는 이 세대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 너희가 요한이 귀신이 들렸다 하였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마시기도 하니, 너희가 저사람은 식탐이 있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한다.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냈다.]

// 누가가 기록한 평지?설교의 핵심은 ‘사랑=용서’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장 중요한 구절을 뽑으라면 6장 36절이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35절 하반절에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라고 선언한다. 옥중의 요한은 회개의 메세지는 전했지만,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대해 듣지 못했다. 그래서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는 평가를 예수로부터 받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작은 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요한의 의심은 당연하다. 예수의 사역이 유대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유대 (광야)에서 활동한 세례자 요한과 달리, 예수님은 유대 변방을 넘나들며 활동하셨다. 유대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 물 세례를 베푼 요한은 이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의 세례, 곧 성령과 불 세례가,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인 이방에도 미친다는 것을 미쳐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지역적인 이방인만 포함시키신 것이 아니셨다. 사회적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나라의 문을 여셨다. 그 당시 눈먼자, 다리 저는 자, 나병환자, 귀먹은 자들은 이방인과 다름이 없었다. 이들에게는 요한의 회개촉구도, (요한은 기껏 세리와 군인들까지 포함시켰는데) 예수의 하나님나라 (곧 사랑도 자비도) 다른 세상 얘기였다. 따라서 이들이 회복되는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누가는 하나님나라는 지역적으로 이방인을 포함함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불가촉천민 을 포함하는 우주적인 나라로 소개한다.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사는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 예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촉구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혜로운 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촉구까지만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하나님나라는 세례자 요한의 생각과 달리 유대민족만의 나라가 아니라 지역적으로는 이방을 포함하는 확장된 나라요, 사회적으로는 불가촉천민을 포함하는 우주적인 나라다. 하나님나라는 더불어 함께 사는 나라다.  

누가복음 7:1-17 읽기

1-10 예수께서는 평지설교?를 마치시고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어떤 백부장이 소중히 여기는 종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 그 백부장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 장로들을 예수께 보내어 예수께서 오셔서 자기 종을 낫개 해달라고 청했다. 유대인 장로들을 예수를 찾아, 그 백부장을 유대 회당을 지어줄 정도로 유대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예수께서는 장로들과 함께 백부장 집으로 출발했다. 백부장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께 이렇게 전했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로 나가길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저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제 밑에 있는 병사들도 제가 말하면 그대로 합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전언을 들으시고 백부장을 놀랍게 여기시며 동행하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백부장의 친구들이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백부장의 집에 돌아가서 보니, 그 종은 나아 있었다.

11-17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나인으로 가셨다. 제자들과 큰 무리가 예수와 동행했다. 예수께서 나인 성문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죽은 사람를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과부의 외아들이었다. 시신을 옮기는 사람들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과부와 함께 오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며 “울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죽은 사람이 관에서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소생한 그를 과부에게 돌려주셨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주셨다.” 예수의 이야기가 온 유대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에 퍼졌다.

// 백부장! 예수를 만나본 적이 없다. 예수의 소문만 들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백부장은 자기 종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심부름꾼들도 친구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웃 문화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고 권위에 순종하고, 권위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이웃을 사랑하고 권위를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다.

// 나인성 여인! 예수의 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과부에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마져 죽었다. 소망이 끊긴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장례에 따르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잃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기다리시지 않고 먼저 다가가셨다. 하나님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기에.

// 큰 믿음의 사람, 백부장도 묵은 포도주만 알았다. ‘근묵자흑’만 알았다.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부정해지는 것만 알았다. 그러나 ‘마중지봉’, 구부정한 쑥도 삼밭에서 나면 꼿꼿해 진다는 말처럼, 예수가 가르치시는 새 포도주는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정한 것이 부정해 지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이 정해진다. 예수께서 말로만 해도 될 것을 율법에서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인 시체를 만지신 것이 그 증거다. 예수께서는 묵은 포도주를 귀하게 여기는 백부장의 믿음이 크다고 하셨지만, 하나님나라의 능력인 새 포도주를 소개하기 위해 나인 성 과부를 위로하셨다.

//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 “내가 네게 (너희에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