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2편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시인은 사람들이, 원수들이 날마다 시인을 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비웃고 빈정대는 것에 크게 낙심하고 괴로워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인터뷰를 해도, 병마에서 회복된 간증을 해도, 심지어 기쁜 감사 노래와 찬양이 울려 퍼지는 교회로 사람들을 인도해도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 역시 주님을 찾아 목마른 사슴처럼 헐떡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원하지 않는가? 시인은 심지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습니까” 라고 호소한다. 사람들과 원수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은 고사하고 시인 자신이 하나님을 뵙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는 세상 사람들과 원수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41편의 시인에게서 찾는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길은 이웃사랑이다. 먼저는 성도 간의 사랑이겠지만, 이웃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 뵐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난한 자,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성도들을 볼 때 하나님을 본다. 이웃을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것을 세상도 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눅 11:37-41) 식전에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게, 겉은 깨끗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어제에 이어 삭개오를 다시한번 소환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구제, 곧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돌본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다. 이것이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우리의 답이 되어야 한다.

시편 41:1-3 읽기


시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노래한다. 주님께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에게 재난이 닥칠 때에 그를 구해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를 보살펴 주신다. 세상 사람들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주님께서 이런 복 있는 사람을 원수의 뜻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돌보시며, 어떤 병이든 떨치고 일어나게 하신다.


// 시편 41편의 시인은 4절부터 시인 자신, 곧 ‘나’를 노래하기 전에, 1-3절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복 있는 사람을 일반화 시킨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적용한다. 따라서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다. 시편 1편의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라고 노래(정의) 한다. 따라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살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시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복되다고 노래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예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으며, 천국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가난한 사람 편에 서는 것이다. 시인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보살피는 것이 복되다고 노래할 때 사용한 ‘돌보다/보살피다’ 라는 단어는 출애굽기에서는 세 번 모두 ‘배상’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다시말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배상의 성격이 강하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였을 때,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를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삭개오 집에 이르렀다고 축복하셨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단순히 베푸는 것이 아닌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공동체다움을, 사회다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시편 40:7-8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노래하는 시인은, 주님께서 시인을 멸망의 구덩이와 진흙탕에서 건져주시고, 반석을 딛고 서게 해 주시고, 걸음 걸음을 안전하게 해 주심을 7-8절로 정리한다.”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에 따라 내가 지금 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시인이 노래하는 ‘나에 관하여 기록한 두루마리 책’은 생명책일 것이다. 시편의 시인들은 ‘기록’이란 단어를 생명책(69:28), 등기부(87:6), 출생부(139:16), 심판책(149:9) 과 연관되어 사용했다. 시인은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알았기에, 혹은 시인은 자신은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함을 알았기에, 지금까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 하고, 주님의 법을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노래한다.시인은 자신의 죄가 머리털보다도 더 많아 희망을 잃은 그 순간에도 주님의 너그러움을 구한다.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주님을 신뢰하여 우상과 거짓 신들을 섬기지 않으니, 주님께 도와달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주께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한다. 시인이 주님을 기다리고, 시인이 주님을 신뢰하고, 시인이 주님을 찾는(의지하는) 이유는 시인의 마음 속에 주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게 하소서.

베드로후서 3:1-18 읽기

1-7 베드로는 두번째 편지에서 수신자인 성도들이, 거룩한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한 말씀과 구주 예수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계명을 상기하기를 바란다.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노아 때 홍수로 심판하신 사실을 무시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천지가 말씀으로 창조되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의 마지막 때까지 보존되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날까지 변함없다고 강조한다.
8-13 베드로는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 잊지말라고 당부한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 주님께서 재림에 관한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의 날에,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질 것인데,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 수신자들에게 묻는다. (당연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그 날이 앞당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도들은 그날에 타서 녹아버릴 옛 하늘과 옛 땅에 미련을 가질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하늘과 새땅이 성도들을 기다려야 한다고 선포한다.
14-17 베드로는 성도라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니, 티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으로, 거리낌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재림이 더딘 것은, 우리 주님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래 참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 쓴 편지한 바와 같다고 말한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고 말한다. 바울의 편지 중에는 알기 어려운 내용을 함부로 해석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말씀에 무지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스스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다시한번 베드로는 불의한 자들의 유혹, 곧 거짓교사들의 유혹에 휩쓸려서 그리스도 재림의 약속에 관한 확신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18 베드로는 수신자 성도들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서 자라라고 권면하면서 편지를 맺는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린다. [아멘]


//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은혜와 평화가 수신자인 성도에게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랐던 베드로는, 성도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에서 자라라고 권면하면서 편지를 맺는다. 하나님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의 시작이요, 영생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지식과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진행형)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딘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영생에,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믿음 안에서 자라기를 게을리 하는 성도에게는 파멸 당할 수도 있음을 교훈한다. 따라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으로 오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언급한다. 바울의 편지들도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성도들이 복음에 합당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이신칭의’의 교리로 성도의 행위는 상관없다고 함부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의 편지를 잘못 해석하여 파멸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 주님은 심판주로 오신다. 주님이 내 편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주님 편에 서야 한다. 내가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의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르치신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주님 편에 서는 것이다. 믿음이다.

베드로후서 2:10-22 읽기


10-16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지만,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신다. 특히 더러운 정욕에 빠져서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을 파멸하게 두신다. 불의한 그들은 대담하고 거만하며 겁도 없이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욕한다. 그럼에도 천사들은 비록 불의한 그들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 앞에서 불의한 그들을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않는다. 불의한 그들은 파멸당하기 위해 태어난 지각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라서,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비방하다가, 짐승들처럼 멸망 당할 것이다. 불의한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불의의 값에 합당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대낮에 흥청대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티와 흠 투성이 인간들이다. 그들은 성도들과 연회를 즐길 때도 자기들의 꾀를 따라, 성도들을 간음할 상대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들은 죄를 짓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들뜬 영혼들을 유혹하여,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데 이용한다. 그들은 저주받은 자식들이다.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간 자들이다. 불의의 삯을 사랑한 불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라간 것과 같다. 발람은 (그래도) 자기 잘못에 대하여 책망을 들었었다. 하나님께서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발람의 미친 행동을 막으셨었다.
17-22 불의한 자들은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다. 그들에게는 캄캄한 어둠만이 기다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허무맹랑하게 큰 소리를 친다. 그들은 그릇된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사람들을 (다시) 육체의 정욕을 따라 방종하도록 유혹한다. 그들은 자유를 약속하지만, 자유자가 아니라 타락한 종이 된다.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종노릇 하게 되듯, 그들은 육체의 정욕에 져서, 정욕의 종이 된다. 우리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게 정복을 당하면, 그런 사람들의 형편은 다 나빠질 것이다. 의의 길을 알고서도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의의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속담과 같이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몸을 씻고나서 다시 진창에 뒹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베드로는 거짓교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다가, 거짓교사를 따라 다시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게 정복 당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결국이 파멸임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의 악한 행위가, 그들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믿는 사람은 증거는 악한 행위가 아니라 진리를 행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빛되신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의의 길이다. 시편1편의 시인이 노래하는 복이 있는 사람의 길이요,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는 길이다. 베드로는 의의 길을 알고서도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의의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다. 의의 길이란 거룩한 계명을 따르는 길이다. 진리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요, 듣고 행하는 길이다. 베드로가 가르치는 경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