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5:1-13 읽기

1-4 아마샤는 스물 다섯에 왕이 되었다. 아마샤는 예루살렘에서 29년동안 다스렸다. 아마샤의 어머니 여호앗단은 예루살렘 사람이다. 아마샤는 주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 아마샤는 왕권을 장악한 뒤, 부왕 요아스를 살해한 신하들을 처형하였으나, 모세 율법에 따라, 곧 주님의 명령에 따라 처형받은 자녀는 죽이지 않았다.

5-8 아마샤는 (국방을 위해)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가문별로 군대 단위로 조직했다. 군대 조직에 편성된 스무살 이상된 남자는 모두 삼십만명이었다. 그리고 은백달란트를 주고 북이스라엘에서 용병 십만명을 고용했다. 이때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북이스라엘 용병을 싸움에 데리고 가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만약 아마샤가 북이스라엘 용병을 데리고 출전하면 하나님께서 아마샤가 대적들 앞에서 엎어지게 하실 것이라고 충고했다. 하나님께서 아마샤를 이기게도 지게도 하실 수 있다고 가르쳤다.

9-10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북이스라엘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 지불은 은 백 달란트는 어떻게 하면 좋느냐고 물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주님께서 은 백 달란트보다 더 많을 것을 주실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용병들은 유다 사람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11-13 아마샤는 용병없이 출병하여 소금계곡에서 세일 자손 만명을 죽였다. 또 만명을 산채로 붙잡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아마샤가 세일 자손과 전쟁을 하는 동안 북이스라엘로 돌려보낸 용병들이 사마리아와 벳호른 사이에 있는 유다의 여러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을 삼천명이나 죽이고 물건도 약탈했다.

>>  “주님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 아마샤 왕에 대한 평가다. 아마샤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고, 아마샤가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따라 북이스라엘 용병들을 돌려보낸 것을 사관은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한 것이라고 보았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일의 진행을 보니 아마샤의 행위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마샤는 부왕 요아스를 죽인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자로 사용되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을 돌려보내면서 경제적 득실을 따졌다. 결국 북이스라엘 용병들은 승전후 받아야 할 전리품을 포기해야 할 생각에 불쾌한 마음으로 돌아가다가 유다 마을을 약탈하고 유다 사람 삼천명을 죽였다. 아마샤는 북이스라엘 용병들이 유쾌하게 돌아가도록 선처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샤는 용병없이 출병하여 세일 자손 만명을 죽였다. 문제는 산채로 잡은 만명의 포로들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전쟁포로들을 이렇게 대우했다는 것은 이기게도 하시고 지게도 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 아마샤! 우리들은 주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한 것처럼 사람에게 보일 수 있다. 살인하지 않으면 되고, 간음하지 않으면 되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말씀대로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놀리는 것만으로도 사형받을 죄를 지은 것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남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면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자들이요 아버지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는 자들이라고.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신앙에는 ‘이정도면 됐어’가 있을 수 없다.

역대하 24:17-27 읽기

17-19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었다. 유다 지도자들은 왕을 부추겨 자기들의 말을 듣도록 했다. 그결과 백성은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다. 이런 죄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렸다. 주님은 백성을 주님께로 돌이키도록 예언자들을 보내 경고하셨지만 백성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20-22 여호야다 제사장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백성들에게 말했다. [나 하나님이 말한다. 어찌하여 너희가 주님의 명을 거역하느냐? 너희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주님을 버렸으니 주님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스가랴을 없앨 음모를꾸몄고, 요아스 왕의 명령에 따라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다. 요아스는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신에게 충성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스가랴는 주님께서 이 일을 굽어보시고 갚아달라고 외치며 죽었다.

23-24해가 바뀔 무렵, 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왔다. 시리아 군대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지도자들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해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왕에게로 가져갔다. 시라아 군은 대군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적은 수의 시리아 군이 유다의 대군을 이기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요아스에게 심판을 내리셨다.

25-27 시리아 군대가 물러간 후, 요아스의 신복들은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인 일에 반감을 품고 요아스가 자고 있는 동안 요아스를 죽였다. 요아스는 다윗 성에 묻히기는 하였지만 왕실 묘지에는 안장되지 못하였다. 요아스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암몬 여인 시므앗의 아들 사밧과 모압 여인 시므릿의 아들 여호사밧이었다. 요아스의 사적은 열왕기 주석에 기록되어있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었다.

>> 사관은 요아스를 죽인 사람의 이름을 사밧과 여호사밧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여호사밧’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이다. 결국 요아스는 신복들에 의해 ‘심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더 이목을 사로잡는 것은 이들이 암몬과 모압 여인의 아들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어미들은 여호사밧 왕 때 전리품으로 잡혀왔거나, 하나님께서 암몬과 모압 연합군을 치셨다는 것을 알고 남유다에 들어와 이스라엘 자손과 결혼한 여인들일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 하는,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아는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소규모 시리아 군의 침공에 유다 대군이 참패당했을 때, 암몬과 모압 여인의 아들들인 사밧과 여호사밧은 당장 패전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 요아스는 독립적인 신앙인격체로 성장하지 못했다. 주변의 소위 모태신앙 친구들이 대학시절, 자신들은  못된신앙이었다라고 자조하던 것이 기억난다. 여호야다가 죽자 독립적인 인격체로 바르게 성장하지 못한 요아스는 통치에 있어서도 스스로 서지 못하고 신복들의 꼬드김에 널뛰었다. 어쩌면 요아스는 스가랴의 충고를 들을 때도 여호야다의 적자가 아닌 ‘서자 콤플렉스’에 시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요아스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 성도라고 별 수 없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다.

역대하 24:4-16 읽기

4-7 얼마 뒤, 요아스는 성전을 새롭게 단장하기로 마음먹고,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을 불러 유다백성들로부터 성전세를 거두어 성전을 보수하도록 명령했다. 요아스가 지체하지 말고 바로 실시하라고 했지만 레위 사람들은 즉시 움직이지 않았다.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 대제사장을 불러 추궁했다. (열왕기서에 따르면 이때가 요아스 23년이라고 기록한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에게 모세도 장막을 지을때 백성들에게 성전세를 부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왜 성전세를 받는데 성전 보수는 이루어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요아스는  할머니 아달랴가 자기 아들들을 (꼭 육신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아달랴를 따르는 사람들, 바알 제사장들을 지칭하는 듯) 시켜 성전을 부수고 들어가 성물을 꺼내 바알에게 바쳤기 때문에 이곳 저곳 부서진 성전에서 숨어 지내야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도록 성전은 보수되지 않았다. 그만큼 성전 보수는 서둘러야만 했다.

8-14 요아스 왕은 궤를 하나 만들어  성전 문 밖에 놓게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모세 때처럼 성전을 보수할 세금?을 주님께 드리도록 했다.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했고 백성도 모두 기꺼이 돈을 가지고 와서 궤가 가득할 때까지 돈을 넣었다. 궤가 차면 레위 사람들이 궤를 왕궁 관리들에게 가져갔고, 왕실 서기관과 대제사장의 관리가 그 돈을 계수했다. 레위 사람들은 빈 궤를 다시 성전 문 밖에 갖다 놓았다. 왕과 여호야다는 계수한 돈을 성전 공사감독관들에게 주었고, 공사감독관들은 성전을 보수할 석수와 목수와 각종 기능공을 고용하였다. 일을 맡은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해서 성전은 설계대로 견고하게 세워졌다. 공사를 마친후 남은 돈을 왕과 여호야다에게 정산했고, 왕은 남은 돈으로 성전에서 쓸 기구들을 마련하게 했다.

14b-16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여호야다는 늙어 백삼십에 죽었다. 여호야다는 평생 이스라엘 백성과 성전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아, 사람들은 여호야다를 다윗 성 왕실 묘지에 묻었다.

>> 성전에서 숨어지냈던 요아스. 요아스는 그곳에서 유모와 여호야다로부터 성경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아마도 성경이야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요아스가 왕궁보좌에 앉자, 왕궁과 성전이 비교되었을 것이다. 어린 요아스였지만 성전을 보수해 달라고 여호야다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데 23년이 지나도록 성전보수는 진행되지 않았다. 아달랴 때 너무 많이 파괴되어 성전세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었는지, 제사장들이 게을렀는지, 아니면 성전세를 제사장의 유익을 위해 착복했는지 본문은 답하지 않는다. 개혁을 이끌었던 대제사장 여호야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여호야다의 영향력을 충분히 벗어난? 요아스는 백성이 성전보수 비용을 자원하여 드릴 수 있도록 큰 궤를 만들었고 철두철미하게 관리하여 성전보수를 마쳤다.

>> 딴지 하나. 평생 이스라엘 백성과 성전을 위하여 좋은 일을 했다고 평가받은 여호야다는 요아스 왕이 서른이 될 때까지 왜 성전보수를 못했던 것일까? 분명 여호야다가 상당기간 섭정을 했을 것인데. 마치 다윗이 성전 건축을 하지 못하고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한 것과 같은 맥락일까? 성전보수보다 무너진 나라의 체계를 잡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딴지 둘. 23년이 지나서야 요아스가 다시 성전보수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성전보수를 명령한 어릴 때 마음 그대로일까? 자신은 화려한 왕궁 보좌에 앉았는데, 유아기를 보낸 하나님의 성전은 여전히 보수되지 않고 있어서? 혹시 성전보수를 통해 국력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이웃나라에 선전하기 위한 욕망때문은 아니었을까?

>> 여호야다에 대한사후평가를 통해 성전보수보다 필요한 것이 제사드리는 것이요, 제사보다 필요한 것이 백성에게 좋은 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꺼꾸로 행한다. 이웃에게 좋은 일하는 것보다 예배가 중요하고, 예배드리는 것보다 화려한 예배당이 중요하다고. 말은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교회가 하는 꼴을 보면 그런것 같다. 일의 결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왜 성전이 보수되어야 하는가? 왜 성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하는가? 백성은 선한 일에 언제든지 자원하여 바쳤다. 성도들도 선한 일에 기꺼이 동참한다. 교회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선한 일이 무엇인지 바르게 가르쳐야 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

역대하 23:16-24:3 읽기

16-17 아달랴를 죽이고 여호야다는 자신과 백성과 왕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세웠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바알신전으로 가서 신전을 허물고 제단을 뒤엎고 신상들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들은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18-19 여호야다는 주님의 성전을 돌보는 일을 정하여 레위사람 제사장들이 관리하도록 맡겼다. 모세 율법에 기록된 대로 제사를 드리고 찬양을 하도록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였다. 또 성전 문마다 문지기를 두어 부정한 사람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20-21 여호야다는 백부장들, 귀족들, 지도자들,  모든 백성들과 함께 왕을 성전에서 데리고 나와 왕궁으로 가서 보좌에 앉혔다. 모든 백성이 기뻐하였다. 아달랴가 살해된 후 도성은 평온을 되찾았다.

24:1-3 요아스은 일곱살에 왕이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마흔해 동안 다스렸다. 요아스의 어머니 시비아는 브엘세바 사람이다. 여호야다 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 요아스는 주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다스렸다. 여호야다는 왕에게 두 아내를 추천했다. 요아스와 두 아내 사이에서 자녀들이 태어났다.

>>  하나님은 여호야다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지켜가시는 도구로 삼으셨다. 여호야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은 단순히 다윗 가문의 왕위계승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임을 알고 온 백성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세웠다. 주님의 백성이 되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알 신전과 제단과 신상을 완전히 부수고 바알 제사장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책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했다. 그리고 나서야 요아스를 보좌에 앉혔다. 그결과가 기쁨과 평온이었다. 여호야다를 통한 하나님의 열심이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열심이 하나님의 열심을 지나치곤 한다. 여호야다는 요아스에게 두 아내를 추천했고 요아스와 두 아내 사이에서 자녀들이 태어났다. 두 아내를 추천한 것은 다윗 가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많은 자녀를 갖도록 독려하기 위한 사람의 열심이 아닐까 한다. 일부다처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군사의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듯이, 다윗의 자손을 보존시키시는 것도 자녀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딴지를 걸어본다.

딴지 하나 더. 성전에 문지기를 두어 부정하 사람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 말씀을 교회의 문턱을 높이는데 적용해서는 곤란하다. 부정한 자도 들어와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오히려 아무나 교회 교역자들이 되지 못하도록 적용해야 한다.  

역대하 23:1-15 읽기

1-2 여섯해를 기다린 여호야다 제사장은 일곱째 해가 되어 용기를 내어 백부장들, 곧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 오벳의 아들 아사랴,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과 밀약을 맺어 유다 각지역의 레위사람들과 각 가문의 족장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다.

3-7 이들은 성전의 모여, 요아스와 언약을 세웠다. 여호야다가 성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왕세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요아스) 왕이 되셔야 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약속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번 안식일 당번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은, 성전에 도착하여 삼분의 일은 성전문을 지키고, 삼분의 일은 왕궁을 지키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기초문’을 지키십시오. 일반 백성은 성전 뜰로 모이게 하십시오. 그 날, 당번을 맡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말고는 어느 누구도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만 성전 안으로 들어오고 일반 백성은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전 밖에 서 있어야 합니다. 레위 사람들은 병기를 들고 왕을 호위하십시오. 왕께서 출입하실 때 반드시 경호하십시오. 어느 누구라도 성전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모두 죽이십시오.]

8-11 레위사람들과 모든 유다 사람들은 여호야가가 명령한대로 행하였다. 여호야다가 안식일에 당번을 끝낸 사람들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으므로 당번인 사람과 비번인 사람들이 모두다 성전에 있었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백부장들에게 다윗 왕이 성전에 보관했던 창과 크고 작은 방패를 나눠주었다. 일반 백성에게도 무기를 들려 성전 전 지역에 배치하고 성전에서 왕을 경호하게 하였다. 여호야다와 여호야다의 아들들이 요아스 왕세자를 데리고 와서 왕관을 씌우고 왕의 직무를 규정한 규례를 요아스에게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임금님 만세를 외쳤다.

12-15 아달랴가 백성들이 요아스 왕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고 성전에 모여있는 백성에게로 갔다. 왕이 성전 앞 기둥 곁에 서 있고 관리들과 나팔수들이 왕을 모시고 서 있으며, 모든 백성이 기뻐하며 나팔불며 찬양하고 있었다. 아달랴는 이것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고 ‘반역이다! 반역이다!’ 라고 외쳤다. 그때 여호야다가 백부장들에게 아달랴를 끌어내고 아달랴를 따르는 모든 사람는 칼로 쳐죽이라고 명했다. 다만 성전 안에서는 아달랴를 죽이지 말라고 했다. 백부장들은 아달랴를 끌고가 왕궁 ‘말의문’ 입구로 들어가 거기서 처형하였다.

>> 여호야다가 제사장이 쿠데타를 모의한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약속을 따랐다. 육년의 시간은 어쩌면 요아스가 어느정도 자라기를 기다린 시간이라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가르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로야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충분히 늘어났을 때 혁명을 일으켰을 것이다. 주님의 약속이 분명하다고 해도, 급하게 일을 추진하지 않고, 일반 백성까지 주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가르치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밭이 희어져 이미 추수할 곳도 있지만 여전히 갈아야 할 밭이 많고 씨를 뿌려할 곳도 많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서두드라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주어진 일에 성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