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26-56 읽기

26-39 그 뒤로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36절) 여섯 달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나사렛 동네,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보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한다.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마리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 예수는 위대하게 되고 더 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예수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다. 그 예수가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자신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임신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햇다. 더 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마리아를 감싸 줄 것이다.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고 불리던 엘리사벳이 임신한 지 벌써 여섯달이 되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고 대답했다. 마리아가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대답하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마리아는 수태고지 후 곧바로 유대 산골에 사는 사가랴의 집으로 가서 엘리사벳에게 문안했다. // 두번째 수태고지는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임했다. 성소에서 섬기던 사가랴는 늙은 부부가 어떻게 임신을 하겠느냐고 불신했지만, 나사렛 동네에 살던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도 임신을 할 수 있느냐고 가능성을 비쳤다. (솔직히 사가랴나 마리아나 같은 반응을 보인 것 같아 보이지만, 천사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천사는 엘리사벳이 임신한 사실을 마리아에게 드러낸다. 엘리사벳이 다섯 달 동안 숨겼던 일이다. 세례요한은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다면, 마리아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임한 후 잉태하게 된다. 이래저래 비슷하면서도 다른 수태고지 사건이다.


40-45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던 태아 요한이 움직였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서 큰 소리로 마리아를 축복했다. [마리아는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다. 마리아의 태중의 아이도 복을 받았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했을 때,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임한 마리아를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라고 부른다. 성령 안에서의 교제는 나이의 많고 적음에 차별이 없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할 성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46-55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축복에 화답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고 할 것 입니다. 전능자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자비하시며,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는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십니다.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며,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로우사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 마리아의 노래의 핵심 주님의 자비다. 비천한 자에게 임하는 자비, 주린 사람들에게 임하는 자비, 백성을 도우시는 자비.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주린 자가 복이 있고…


56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석 달쯤 있다가 (나사렛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교제는 결국 태중 요한과 갓 잉태된 예수의 교제라고 할 수 있다.


**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마리아는 천사의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궁금히 여겼다. 2021년을 맞이하며 나도 듣고 싶은 말씀이다. “용승아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마리아 처럼 놀라지는 않을 것이나,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실 것을 기대하게 한다.

누가복음 1:1-25 읽기

1-4 누가는 복음을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 이요, 복음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이야기라고 운을 뗀다. 그리고 누가는 복음을 자기의 말로 정리하여 데오빌로에게 전달하여, 데오빌로로 하여금 복음이 확실한 사실임을 알게 되기를 바라면서 복음을 풀어간다. // 복음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다. 첫번째 ‘우리’는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사람들이다. 제자들,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우리’는 제자들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이다. 누가는 이 두번째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데오빌로는 세번째 ‘우리’의 한 사람이고… 나는 이렇게 흘러 온 n번째 ‘우리’의 한사람이다. 복음은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가 전해야 할 확실한 사실이다. ‘나’ 중심으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되는, ‘내가’ 주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복음이다.


5-7 누가는 복음을 레위 사람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어떤 사람인지로 시작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어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 그런데도 그 둘 사이에 늙도록 자녀가 없었다. //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인정 받아도, 자녀가 없는 것은 저주였던 시대였다. 의로운 삶이 세상에서의 형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8-20 사가랴가 제사장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분향하는 동안 주님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받았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르라고 하였고, 요한의 출생은 사가랴 부부가 당한 모든 설움을 씻어내는 기쁨과 즐거움이 될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기쁨이 될 것이며, 주님께서 보시기에 큰 인물, 술에 취하지 않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늙은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을 수 없어서 증거를 요청했다. 천사는 자신은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요,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하는 것이 증거라고 하였다. // 가브리엘 천사는 ‘그 때가 되면 다 이루어질 내 말을 네가 믿지 않았으므로’ 라고 말을 하며 사가랴가 요청한 증거로 벙어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가랴는 자신에게 주어진 확실한 수태고지에도, 그 때가 되어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침묵해야만 했다.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사가랴에게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떠벌이지 말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은 ‘나’에게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나’중심의 간증은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차라리 침묵이 필요할 때가 많다. 복음은 ‘나’ 중심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21-25 백성은 사가랴가 성소에 오래 머물자 이상이 (놀랍게) 여겼다. 더군다나 사가랴가 성소에서 나와서도 말을 하지 못하자 환상을 본 줄로 알았다. (사람들은 사가랴를 다구치지 않았고) 사가랴는 제사 당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사벳이 임신했다. 엘리사벳은 불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당하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주님께서 면하게 해주셨음을 알고도 다섯 달 동안은 침묵했다. // 개인적인 ‘은혜’는 때론 숨겨야 한다. 은혜 받았다는 나의 간증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내가 받은 은혜가 공동체의 유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차라리 자랑하지 않는 것이 공동체의 건강에 좋다고 적용한다.


// 내가 받은 복음이 ‘우리’의 복음이 되게 하소서.

시편 44편 읽기

1-3 시인은 구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일들을 조상들이 전하여 준 것을 듣고 자랐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몰아내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번창하게 하신 일을 듣고 자랐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가나안을 차지한 것은, 조상들이 무력으로 차지한 것도 승리한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배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4-8 시인은 조상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의 왕이요 자신의 하나님(신)이시요, 야곱(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라고 노래한다. 주님의 능력으로 적을 쳐부수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적을 막아냈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자신의 활이나 자신의 칼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오직 주님만이 주님의 백성은 승리 거두고, 적군은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언제나 하나님만 자랑한다고, 주님의 이름만 끊임없이 찬양한다고 노래한다.9-16 그런데, 시인은 주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웃나라들로부터 치욕을 당하기 때문이다. 승전이 아니라 패전의 소식만 들리기 때문이다. 적에게 밀리고 적에게 약탈당한다. 주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여러 나라에 흩어졌다. 주의 백성들이 노예로 팔렸다. <그렇다고 노예장사로 이익을 남긴 것도 아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그저 이웃나라의 이야기거리,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셨다. 시인은 포로, 노예 신분으로 전락당한 수치로 얼굴조차 들 수 없다고 노래한다. 사방에서 시인을 조롱하고 모독하고 욕을 하고 무서운 눈길을 노낸다. 17-22 시인은 당돌하게 주의 백성은 주님을 잊지 않았고 주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 모든 치욕이 닥쳤다고 항변한다. 마음으로 주님을 배반한 적이 없으며, 발이 주님의 길을 벗어난 적도 없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왜 주님께서 주의 백성을 승냥이의 소굴로 밀어 넣으시냐고, 깊고 깊은 어둠으로 덮으시냐고 따진다. 주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었거나, 다른 신들에게 기도했다면 모를까? 백성들의 속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어떻게 주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셨느냐고 반문한다. 백성들이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잡아먹힐 양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 주님 때문이라고 시인은 모든 책임을 주님께 전가한다.23-26 시인은 주님을 깨운다. 주무시지 마시고 주의 백성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히 지켜달라고 노래한다. 주의 얼굴을 백성에게서 돌리지 말아달라고 간구한다. 백성의 고난과 억압을 잊지 말아달라고 기도한다. 백성들이 무덤 속에 있는 처지라고 매달린다. “주님 일어나셔서 우리를 어서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


//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 다 주님 때문이라고 책임을 주님께 전가한다. (시인은 하나님에 관해 들었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얼굴을 백성에게서 돌리지 마시고 백성의 고난과 억압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시인을 이끌어 주시고, 시인을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시인으로 영원히 하나님 집에 살게 하심을 꿈꾼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에 의지하여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

// 2020년도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21 새해에도 하나님나라를 꿈꾸며/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시편 43편 읽기

1 시인은 41편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노래했다. 시인의 자신의 노래가 틀리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 변호해 달라고 노래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인정을 나누는 것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거짓을 일삼는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의 조류에서 구해 달라고 노래한다.2 시인은 하나님을 요새요 피난처로 삼지만, 현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갑질하는 사람들에게 시인 자신도 짓눌림 당하기는 마찬가지라,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슬퍼하며 노래한다.3 시인은 그래도 주님의 빛과 진리를 따라가면 닿을, 주님이 계시는 주님의 장막을 바라본다. 시인은 주님이 계시는 주님의 장막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구한다.4 시인의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가, 제사가 아니라 자신을 기쁨으로 반겨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안기길 꿈꾼다.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장막으로 시인을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로 찬양하길 원한다. 5 시인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낙심되며, 괴롭다. 그럼에도 시인은 하나님을 기다린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주의 장막에 들어가는 것을 꿈꾸며, 주님만이 시인의 구원자(도움), 시인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한다.


// 성도의 길도 고진감래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난다. 그러나 고진은 잠깐이요 감래는 영원하다. 이렇듯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이끌려 사는 성도들은, 23편 시인이 노래한대로 하나님의 집에 돌아가 영원히 산다. 43편의 시인도 이것을 소망하며 현실의 괴로움을 달랜다.

// 예수께서도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미) 이겼다” 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라고 환난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 평화를 얻는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는 것이다. 이땅에서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시편 42편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시인은 사람들이, 원수들이 날마다 시인을 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비웃고 빈정대는 것에 크게 낙심하고 괴로워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인터뷰를 해도, 병마에서 회복된 간증을 해도, 심지어 기쁜 감사 노래와 찬양이 울려 퍼지는 교회로 사람들을 인도해도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 역시 주님을 찾아 목마른 사슴처럼 헐떡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원하지 않는가? 시인은 심지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습니까” 라고 호소한다. 사람들과 원수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은 고사하고 시인 자신이 하나님을 뵙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는 세상 사람들과 원수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41편의 시인에게서 찾는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길은 이웃사랑이다. 먼저는 성도 간의 사랑이겠지만, 이웃사랑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 뵐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난한 자, 약자들과 더불어 사는 성도들을 볼 때 하나님을 본다. 이웃을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것을 세상도 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눅 11:37-41) 식전에 손을 씻지 않는 예수님을 이상히 여긴 한 바리새인에게, 겉은 깨끗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어제에 이어 삭개오를 다시한번 소환한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구제, 곧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돌본다.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른다. 이것이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에 대한 우리의 답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