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13-28

13-17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도 큰 무리를  가르치셨다. 마가는 장면을 바꿔 예수님이 알패오의 아들 세리 레위에게 자신을 따르라 하시고 레위 집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기록한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곧 예수를 따르는 그러한 부류의 (세리와 죄인)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인 서기관들이 보았다. 이들은 예수님께는 감히 묻지 못하고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물으며 정죄했다. 촉이 좋으신 예수님이 들으시고 건강한 자에게 의사가 필요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쓸 데 있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

// 가르침을 받는 무리의 수가 점점 커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 외에 제자를 따로 세우신다. 예수님과 가까운 (함께 먹고 마시는) 무리들 중에는 세리와 죄인, 곧 사회적 약자들이 많았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려고 따라다니는 무리들 중에는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큰 걸림돌이었다.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주변 사람들때문에 결국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불쌍하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의인이니 의사가 필요업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도 병든 자임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18-20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어찌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고 그 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답하셨다.

//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이유를 스승 세례 요한을 빼앗겼기 (요한이 옥에 갇혔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나라를 로마에 빼앗긴 것으로 금식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선생과 (하나님나라의) 주되신 (성육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은 결국 십자가의 죽으심을 암시한다

21-22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라. //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통과 관습의 잣대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음을 비유한다.

23-28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내다보니 이삭을 잘라야 했다. 시장해서 먹으려고 잘랐다고도 본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고발했다.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중에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아비아달 대제사장에게 받아 먹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없느냐고 구약을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반문하신 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다.

// 유대전통에 따르면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안식일에 씨뿌리고 밭갈고 추수하고 거두고 타작하는 일을 하면 안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추수하기를 범한 것이다. 또 랍비의 명령들에 보면 주중에 하던 활동도 금하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바리새인들도 이미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안식일 율법을 관대하게 적용하고 제자들에게는 융통성 없이 적용한 것이다. 율법에도 예외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랑으로 완성된 그리스도의 법이 필요한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전통과 관습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은 주일예배, 주일성수도 마찬가지다. 주일의 정신보다 교회전통과 관습을 따르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 의인이냐 죄인이냐, 금식, 안식일에 대한 모든 판단의 근거를 전통과 관습에 뿌리를 두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전통과 관습에 따른 자칭 의인을 부르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작은자 낮은자인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려고 오셨다.  자칭 의인인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번씩 금식한다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가 아닌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자랑질을 했다. 그에 반하여 세리들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 한국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마음 아프다.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시는데 용서와 사랑의 잣대는 간곳없고 다들 자신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은양 떠든다. 내가 보기에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자들과 별 다를바가 없다. 바리새인 마냥 말씀을 가진 자들이 낮아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한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행동한다. 어느새 전통과 관습이 말씀보다 앞선다. 슬프다.

>> 새 포도주가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면 새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은 성도들이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함께 먹고 마시는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한 나와 다른 사람들이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통과 관습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처럼  낮은 자, 작은 자 편에 서고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라고 하신다. 쉽지 않다. 주여 도우소서.

마가복음 2:1-12

1-2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적어도 칠일 동안은 나병환자를 만져 부정하다 일컬음을 받은 것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성밖 한적한 곳에서 사방에서 오는 사람들을 축귀하시고 치유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수일 후 다시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아마도 시몬의 장모집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도를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에 우선순위가 있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축귀와 치유보다 하나님나라의 도를 가르치시는 것이 영순위였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의 도를 가르치는 것이 축귀와 치유보다 중요하다.

3-12 네사람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혀 예수님께 데려왔으나 무리가 많아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사함을 받으라 하셨다. 그자리에 있던 어떤 서기관이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하나님 한분만이 하실 수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생각을 아셨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선언과 병고침의 선언 중 어느 것이 쉽겠냐고 하시면서,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에게 있는 줄 알게 하시려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그가 일어나 들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돌아갔다. 모인 사람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때껏 보지 못한 일이었다.

//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길 원해도 믿음의 친구들이 없었으면 아무 소용없었다. 내 믿음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 믿음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의 형제들이 함께 동거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형제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

>>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을 하자, 자신들이 서기관이 되면서 배웠고 서기관으로 일하면서 알고 있는 죄사함의 권세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과 예수님이 방금 하신 말씀이 서로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도 치유의 권세도 있음을 보여 주셨다. 그러자 무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무리들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표현이 없다. 이렇듯 내가 영광을 받아야만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다는 말은 틀린말이다. 내가 큰자가 되지 못해도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가 드러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오히려 나는 쇠하여야 한다. 나는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굳이 작은 자라고 부르신 이유가 여기있을 것이다.

>>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있어서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죄사함인가? 치유인가? 삼척동자도 죄사함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요즘과 다르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질병과 죄를 연결시켜 생각했다. 요한복음 9장에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장님된 사람이 누구의 죄로 장님이 되었느냐고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하여간 나는 중풍병자에게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 치유보다 죄사함이 더 절실했다고 생각한다. 치유받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나간 것은 죄사함의 증거에 불과했다. 그러나 죄사함의 선언은 힘들다. 어떤 서기관들이 하나님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한 이유다. 결국 마가복음의 시작에서 선언되었듯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사건이다. 중풍병자는 먼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죄의식, 곧 그동안의 맘고생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았다. 작은 자와 함께 한 네 친구도 위로 받았을 것이다. 죄사함이야 말로 성도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첫걸음이다. 치유는 덤이다.

>> 선교현장에서도 하나님의 도를 (말씀을) 가르치면서 죄사함의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축귀나 치유의 결과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것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어우러지면 좋겠지만…

마가복음 1:35-45

35-39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까운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전도하자고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축귀하시고 치유하셨다.

// 예수님은 기도로 성부하나님과 대화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들었다.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으시고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전도하시는 것이 그날 새벽기도의 응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제자들, 특별히 시몬은 장모의 집을 치유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을지 모르겠다. 시몬축귀치유센터장이 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뜻대로 사람들이 찾아 오는 센터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성부하나님의 뜻대로 찾아가는 전도를 하셨다.

40-45 한 나병환자 예수께와서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만져주시며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다. 곧 나병이 그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해졌다. 예수님은 깨끗해진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보이고 깨끗해졌음을 모세가 명한 율법에 따라 입증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일을 떠벌이는 바람에 예수님이 부정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을에 들어가실 수 없었다. 대신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면서 사방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축귀하시고 치유하셨다.

// 여자의 손을 잡아 치유하셨던 예수님은 이번에는 나병환자를 만져 치유하셨다. 모두 유대관습을 깨는 행위였다. 특별히 나병환자를 만지는 사람도 부정해지기 때문에 금기시 되는 행동이었다. 나병환자를 만졌다는 소문에 예수님은 한동안 마을에 들어가셔서 전도하실 수 없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겠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는 권위로 성읍에 들어가시지 않으셨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육신의 나병은 치유받았어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율법에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했다. 내가 깨끗하게 되었다고 자동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의 진단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치유의 궁극적인 목적은 관계회복이다. 좋은게 좋다고 공적인 절차가 있는데 권위로 절차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 공동체 일원이 되도록 하셨고, 대신 성밖 한적한 곳에서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전도하시는 기회로 삼으셨다.

>> 한적한 곳. 예수님은 한적한 곳을 성부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삼으셨을뿐 아니라 한적한 곳을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만나주시는 곳으로 삼으셨다. 나의 한적한 곳은 어디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가복음 1:21-34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다. 뭇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다르게 권위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회당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정확이 알았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셨다. 예수님의 축귀에도 권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교훈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예수님은 그새 시몬(베드로)도 제자로 삼으셨다. 어느날 예수님은 야고보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다. 저물어 해질 때에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왔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병고치심으로 소개하신다. 마가는 주저함 없이 이 세 사역이 기존과 달랐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마가는 예수님 사역의 특징을 권위라고 한다. 당시에 무슨 라이센스가 있었겠냐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심과 축귀와 치유가 야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권위있는 가르치심과 권위있는 축귀에 사람들은 놀라고 놀랐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전통과 관습이 더이상 권위의 근거가 되지 않는 나라다. 율법교육을 따로 받지 않으셨던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남녀의 구별의 확실했던 유대사회에서 여자의 손을 잡고 치유하셨다. 갈릴리가 단순히 유대 변방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또 새로운 헬라문화의 통로였기 때문에 전통과 관습을 뛰어 넘으셨던 것이 아니라 마가의 첫 일성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그것이 전통과 관습이라고 할지라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나라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불순종의 마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어도 결코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 아는 것과 순종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순종하게 하소서.

마가복음 1:1-2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매일성경 읽기 순서는 창세기 족장들의 족보에서 복음의 족보로 건너 뛴다.) 마가는 복음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의 복음이라고 한다. 구세주가 예수라고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곧 하늘과 땅의 시조가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 (창2:4) 마가는 복음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한다.

이 복음은 준비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나온 것이 아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은 어쩌면 구약 전부를 대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복음의 마지막 준비는 세례 요한까지 이어진다. 세례자 요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로 복음을 준비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물 세례보다 능력이 많은 성령의 세례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때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가 요한에게 와서 물 세례를 받으셨다. 이때 예수는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공적으로 인정함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친히 성령세례도 받으신 것이다. 예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가셨고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다.

세례자 요한이 옥에 갇히자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갈릴리 어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삼으셨다. 이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사함에서 머물지 않는다. 무죄방면으로 (죄사함의 회개로) 끝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처럼 성령의 인도로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이겨야 하고, 갈릴리의 세 제자처럼 나의 소유 전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마가는 복음의 시작에서부터 독자들에게 복음을 밀어붙인다. 머뭇거림이 없다.

복음은 죄사함을 목적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삶을 목적으로 한다. 곧 성도들은 구원의 순간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하늘의 시민권을 받았으면 하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고보니 야곱의 새이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이기심’, ‘하나님께서 다스리심’, 곧 하나님나라를 뜻하니 창세기와 마가복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