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19:24-51

다섯째로 아셀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뽑아 땅을 분배 받았다. (24-31) 여섯째로 납달리 자손이 그 가족대로 제비뽑아 땅을 분배 받았다. (32-39) 마지막 일곱째로 단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뽑아 기업을 받았다.(40-48) 사관은 단 자손이 레셈과 싸워 점령해서 기업, 곧 땅의 경계를 확장했다고 토를 단다. // 단 자손의 경계가 확장 되었다는 구절을 (47절) 통해 기업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두지파 사이에서 매매하거나 빼앗는 것은 안되지만 차지하지 못한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쳤다. 그런데 사관은 이스라엘 자손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따로 기업을 주었다고 추가한다. 여호수아 역시 주하나님의 명령(약속)대로 에브라함 산지 딤낫 세라를 요구했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 땅을 여호수아에게 주었다. 여호수아는 딤낫 세라에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했다.

14장 길갈에서부터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땅을 분배하기 시작하여 19장에서 드디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주하나님 앞에서 땅을 나누는 일을 마쳤다.

// 눈의 아들 여호수아도 갈렙처럼 에브라임 산지 딤낫 세라를 요구해서 차지한다. 헤브론 산지처럼 험했는지 그곳 사람들이 아낙자손처럼 컸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여호수아 역시 (살기힘든?) 산지를 배정받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땅을 분배한 여호수아가 스스로 자기 몫의 땅을 분배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기업으로 주었다는 기록이 인상적이다. 지도자는 자신의 욕심을 챙겨서는 안된다. 딤낫 세라. 구체적인 지명이 있고 여호수아가 성읍을 건설하고 살았다고 기록하지만 분명 큰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땅 배정이 갈렙에서 시작하여 여호수아에게서 끝났다는 것도 흥미롭다. 사관은 제비뽑기가 아닌 약속으로 기업을 얻은 이야기로 기업분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하나님나라가 그렇다. 모든 것이 예정되어있지만 (예정? 뭔지 모르고 적은 단어)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내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나라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상’이라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이다. 영생이다. 성도의 기업이다.

여호수아 19:1-23

남은 일곱지파 중 두번째로 시므온 자손이 가족대로 제비를 뽑아 기업을 받았다. 시므온은 유다자손의 기업 중에서 (아마도 유다자손이 아직까지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 아닐까?) 분배받았다. 사관은 시므온 자손이 유다 자손의 기업중에서 분배받은 이유를 유다 자손의 분깃이 유다 자손들에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세번째로 스블론 자손이 가족대로 제비를 뽑아 기업을 분배 받았다. 네번째로는 잇사갈 자손이 분배받았다. (많은 지역가운데 유독 ‘수넴’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주하나님의 순서을 기다려야 하지만 약속에 따라 한지파 한지파 기업을 받는다.

// 기업은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공유되고 나누는 것은 허락되었나보다.  아니 공유하고 나눠야 한다. 사관은 시므온이 유다 자손들에게 분배된 땅을 받은 이유가 유다 자손들의 분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갈렙처럼 제비뽑은 기업 외에 약속에 따라 적극적으로 점령해서 분배받은 땅이 추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진 시므온 자손들은 유다 자손의 도움아래 땅을 분배받았으나, 역시 최종적으로 점령하는 것은 저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역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곧  구원의 은혜는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유되고 나누는 것은 허락되었다. 아니 (넘치게 받은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나눠야 한다. 전도와 선교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구원의 은혜는 공유되고 나누어지지만, 받은 사람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열매 맺는다. 하늘의 시민권을 누리는 것은 시민권 유무가 아니라 시민권을 행사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지 않는다면 ‘성도’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타이틀이 무슨 의미랴!

여호수아 18:11-28

일곱 지파에 대한 기업이 분배된다. 먼저 베냐민 지파가 가족대로 제비뽑은 땅을 열거하는데 땅의 경계가 유다와 요셉자손 사이다. // (가장 강력한) 유다와 요셉자손 사이의 땅을 (가장 약한) 베냐민 자손에게 배정한 것은 외침으로부터 베냐민을 보호하시려는 주하나님의 배려가 아닐까? 또 주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요셉 (에브라임)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서 베냐민을 일종의 비무장지대로 사용하시고자 하신듯. 이스라엘의 첫왕 사울이 베냐민 자손인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베냐민이 가족대로 받은 성읍들의 이름 중 가장 인상적인 성읍은 역시 예루살렘이다. // 여부스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은 유다 자손인 다윗때에야 이스라엘이 차지하게 된다. 여부스의 예루살렘이 다윗성이 됨으로써 베냐민은 결국 예루살렘을 기업으로 받았을 것이나 무게 중심이 요셉과 유다의 중간에서 유다편으로 기울게 되었을 것이다.

// 주하나님은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을 배려하셔서 유다와 요셉 자손 사이의 땅을 분배받게 해 주셨다. 그러나 땅을 점령해야 하는 것은 베냐민 몫이다. 배려받았다고 그땅을 그냥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땅 사람을 쫓아내시겠다는 주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땅을 점령해야 했다. 주하나님은 베냐민 자손 중에서 이스라엘 첫 왕이 나오도록 배려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분배받은 땅을 온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임에도 불구하고 주하나님이 배정하신 땅을 점령해야 한다는 역사의식이 없었던 것일까?) 하여간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자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내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고 온전히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고후 10:5,6 새번역)

내가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여호수아 18:1-10

회막이 길갈에서 실로로 옮겨졌다. 분명 길갈에서 제비뽑아 땅을 분배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14:6) 땅분배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여간 가나안 대부분의 땅이 정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일곱지파였다. 열두지파중 르우벤, 갓, 동편 므낫세 반지파, 유다, 에브라임, 서편 므낫세 반지파에게만 땅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다.

여호수아는 일곱지파에게 주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언제까지 지체하겠느냐고 책망한다. 그리고 각 지파에 세사람씩 선정해서 가나안 땅을 두루다니며 땅을 그려오라고 명했다. 요단 서편에서 유다와 요셉 자손이 차지한 땅을 제외한 부분을 일곱부분으로 나눠 일곱지파에게 제비뽑아 분배하겠다고 한다. 다시한번 레위지파는 기업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땅이 아니라 제사장 직분이 레위사람들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한다.

각지파별로 세명씩 요단 서편 땅을 두루다니며 분배받을 땅을 그려, 일곱부분으로 나눈다음 실로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돌아왔다. 여호수아는 실로의 주하나님 앞에서 제비를 뽑아 이스라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했다.

// 일곱지파에 대한 땅분배에 대한 서론이다. 이스라엘 진영의 중심이 길갈에서 실로로 옮겼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자신이 속한 에브라임지파가 분배받은 땅의 중앙인 실로로 회막을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절반이 넘는 일곱지파가 땅을 분배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말이 분배지 가나안 땅은 (약속에 따라) 점령해야 할 땅이었고 일곱지파에게는 변방지역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또 지파들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었기 때문에 아마도 두려움이 컸던 모양이다. 저들에게는 요단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에서 벌인 무수한 승전의 경험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은 과거의 경험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번째 가나안 정탐때는 각 지파별로 한명씩 열두명이 나갔다. (보통 2인 1조가 아닌가?) 이번에는 각 지파별로 세명씩 내보낸다. 그만큼 가나안 점령에 대한 강한 의지와 긴박성이 엿보인다. 사실 가나안 점령은 주하나님을 따라가는 전쟁이었다. 주님이 앞서 가셔서 가난안 족속을 쫓아내시면 (물론 이스라엘의 심판의 칼로 사용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따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앞서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직 점령하지 못한 땅을 차지하라고 주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도 주하나님께서 저들을 쫓아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오늘도 앞장서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 살라고 하신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잡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하다. 예수님을 푯대로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면 푯대를 놓치게 된다. 신앙의 미아가 된다.

레위지파에게는 다시한번 땅이 아니라, 이번에는 제사장 직분이 기업이라고 하신다. 땅이 아니라 제사장 직분이 기업이다. 직분이 기업이라는 것은 직분을 살아내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

여호수아 17 (1-18)

에브라임에 이어 므낫세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기록된다. 사관은 므낫세가 요셉의 장자라고 분명히하고, 므낫세의 장자 마길이 요단 동편에서 길르앗과 바산을 차지했다고 밝힌다. 요단 서편에서는 므낫세의 남은 자손들이 가족대로 제비뽑아 땅을 분배 받았다.

므낫세 자손 중, 마길의 증손 므낫세의 현손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는 딸만 있었다.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지도자들 앞에 나와서 주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민 27) 자신들에게도 땅을 분배해 달라고 요청했고 여호수아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땅을 분배했다. 사관은 요단 동편외에 요단 서편에서 므낫세 자손에게 열분깃이 배정된 이유를 므낫세의 여자 자손들이 그의 남자 자손들 중에서 기업을 받은 까닭이라고 적는다.

사관은 이어서 므낫세 자손이 얻은 땅의 경계를 기록한다. 어제 말씀처럼 답부아 땅의 일부와 므낫세와 에브라임 경계의 땅의 일부가 에브라임자손에게 배정되었다. 사관은 앗사갈과 아셀이 분배받은 지경에도 므낫세의 소유가 있다고 밝힌다. (므낫세가 이들이 땅을 정복할 때 도왔기 때문에 얻을 땅인가?)

안타깝게도 므낫세 자손의 땅의 분배도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끝을 맺는다.

사관은 요셋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넓은 땅을 분배받은 후기를 첨부한다. 요셉 자손은 여호수아에게 (약속에 따라 장자의 권리가 있는 자신들이) 한제비 한 분깃만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항변했고, 여호수아는 브리스족속, 르바임 족속의 산지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응대했다. 요셉자손이 산지 주민은 철병거가 있는 강성한 민족이라고 다시 따지자,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 지라도 능히 쫓아 낼 수 있다고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격려했다.

// 여호수아는 므낫세에게 요단 서편에서도 열분깃, 곧 열 몫의 땅을 분배했다. 열 몫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므낫세 반지파 몫이 아니라 므낫세 온지파의 몫을 분배받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신대로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땅을 주기 위해서라고 사관은 기록하나 여호수아가 에브라임지파 소속이고 므낫세에게 많은 땅을 분배함으로써 형제 에브라임에게도 더 많은 땅을 분배하기 위해 팔이 안으로 굽지는 않았을까? 라고 삐딱한 시선으로도 읽어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호수아가 요셉자손들이  한 분깃만 배정했다는 항변에 철병거를 가진 산지를 차지하라고 분배한 것으로 보아 용사였던  (형제) 므낫세 지파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의 선봉에 서도록 자기가 속한 요셉 자손들의 희생을 독려했다고 볼수도 있겠다.

// 사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 낼 수 있는 일만은 아니다. 시간이 걸린다. 강성해져야 한다. 더군다나 세상은 철병거만큼 강하다. 믿음이 아니면 세상의 철병거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믿음이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힘이다. 유다지파의 갈렙처럼, 오늘 본문의 슬로브핫의 딸처럼, 요셉의 자손들처럼 약속에 근거하여 사는 삶이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 산다면 세상은 결심하고 성도들을 괴롭힐 것이다.

세상의 철병거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우리의 순종이다. 바울은 우리 (성도) 들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들을 이길 수 있다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온전히 순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자를 처벌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고후 10:5,6 새번역)

내가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세상의 철병거를 이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