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4:1-27

아브라함도 늙는다. 헷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은 아브라함. 창세기 저자는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다고 인정한다. 이삭을 통하여 열방의 아비가 되리라는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일백삼십칠 세에 아내 사라를 잃었으니 이삭도 이제 삼십대 중반을 넘어 사십대를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미혼이다. 아브라함은 죽기전에 이삭이 결혼해서 손주를 낳는 것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조금이라도 더 성취되는 것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을 불러 가나안 땅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하지 말고 고향 친척에게로 가서 아들 이삭의 아내를 택하라고 부탁한다.

가나안 땅에 그랄 왕 아비멜렉처럼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행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사람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었다. 그렇다고 이삭을 데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도 안된다고 당부한다. 하늘의 하나님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버지의 집과 고향을 떠나 이곳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아브라함은 범사에 복을 주신 주하나님의 사자가 종보다 앞서가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이라고 종에게 믿음으로 당부한다. 종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한다.

아브라함의 종은 낙타 열마리에 모든 좋은 혼례물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나홀이 거주하는 성에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저녁 때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 아브라함의 주하나님께 이삭의 배필을 순조롭게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삭의 배필을 순조롭게 만나는 것도 주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범사에 복을 주시는, 곧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라고 기도한다. 종은 물길러 나오는 처녀에게 마실 물을 부탁할 때, 자신에게 물도 주고 낙타들에게도 물을 주겠다고 대답하는 소녀가 주께서 이삭의 배필로 정하신 자라는 것을 알겠다고 기도한다. (기도했다기 보다 주하나님께서 종의 마음에 기도응답을 주셨다.)

마침 리브가가 물동이를 메고 우물가로 왔다. 종은 달려가서 물을 달라고 부탁했다. 리브가는 종에게 물을 마시게 할뿐 아니라 낙타를 위해서도 물을 길러 마시게 하겠다고 말했다. 종은 기도대로 되는 것이 신기했지만 들뜨지 않고 묵묵히 리브가를 주목하며 주하나님의 응답이 맞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친척인지 알고자 했을 것이다. 종은 리브가에게 물에 대한 답례로 폐물을 주면서 누구의 딸인지 묻는다. 리브가는 자신은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라고 대답한다. 종은 그제서여 머리를 숙이고 주하나님께 경배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주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주하나님께서는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주하나님께서 나의 여정도 인도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식을 결혼시킬 순 없었다. 그랄 왕 아비멜렉, 헷 족속의 족장, 동맹을 맺었던 아모리 족속 마므레 형제들을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다스리고 있는 유력자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4대후 후손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언약을 염두에 둔 것일까? 이삭의 결혼에 가나안을 떠나서도 안되고 가나안 사람과 혼인해서도 안된다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조건을 단다.

성도들도 세상에 산다. 세상을 떠나 살아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세상과 결탁해서 살아서도 안된다. 이렇게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나도 친구, 선배, 후배의 하나님을 찬양하던 때가 있었다.

창세기 23

아브라함은 저 멀리 갈대아 우르에 있는 형제 나홀이 열두 아들을 낳았고 조카 브두엘이 리브가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상처의 아픔도 피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백이십 칠세에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그땅을 차지 하고 있던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서 사라를 매장할 막벨라 굴을 은 사백 세겔에 사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삼고 아내 사라를 그곳에 장사하였다. 그땅을 차지하고 있던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고 부르며, 그 땅을 무상으로 취하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시세대로 댓가를 지불하고 에브론의 밭과 굴을 샀다. 창세기 저자는 가나안 땅 마므레 (헤브론) 앞 막벨라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로 소유지 이전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 헷사람들이 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고 불렀을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랄 왕 아비멜렉의 태를 열어 주었기 때문일까? 소돔을 엘람 왕의 손으로부터 구해 주었다는 역사도 헷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기 때문일까? 100세데 아들을 낳았기 때문일까? 모르는 것은 일단 지나간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장례를 위해 아주 적은 부분이지만 가나안 땅을 산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이지만 값을 주고 샀다. 세상 땅도 댓가를 지불하고 산다면 하나님나라를 차지하기위해서 값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어제에도 언급했듯이 하나님나라는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야 살 수 있는 나라다. 나나 빌게이츠나 가난한 사람에게 동일하다. 공평하다. ‘자기 소유의 전부’! 아브라함은 자기 소유의 전부인 상속자 이삭을 하나님께 아끼지 않음으로 하나님나라를 샀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상속자이신 성자 예수님을 아끼지 않으시고 성도들을 사셨다. 아멘) 이런 아브라함이어서일까  사라의 매장을 위해 아브라함은  후손에게 주어질 땅임에도 값을 치르고 샀다. 성도들도 세상에서 값을 치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며 공짜 좋아하면 안된다. 손해보는 것 같지만 실상 정당한 댓가를 치르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혹여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대접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보다 더 솔선수범하고 겸손해야 한다.

창세기 22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은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의 땅에 거하게 된다. 이일 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시 찾으신다. 아브하람을 시험하시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창세기 저자는 토를 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내가 여기 있나니다 라고 응답한다. 주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라는 황당한 명령을 하신다. 명령을 받을 때 아브라함이 어땠는지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아들 이삭을 데리고 출발했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가지는 삼일길이었다. 돌이킬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갔다. 멀리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이 보이자 아브라함은 동행한 두 종은 나귀와 함께 그곳에 머물라고 명하고 번제에 쓸 장작을 이삭에게 지우고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으로 출발했다. 두사람만 동행할 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이 일러주신 곳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벌여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위에 놓고 칼로 아들 이삭을 잡으려고 했다. 그때 주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불렀다. 아브라함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하자, 주하나님의 사자가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했다. 아브라함이 아들, 곧 독자까지도 주하나님께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셨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숫양이 불이 수풀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숫양을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땅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다.

주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아브라함을 불렀다. 주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고 아브라함의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대적의 성읍을 차지하고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언약을 확인해 주셨다. 아브라함이  주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시험에 통과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왔다. 이일 후에 아브라함은 밀가가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홀은 아내 밀가에게서 우스, 부스, 그므엘, 게셋, 하소, 빌다스, 이들랍, 브두엘 여덟 아들과 첩 르우마에게서 데바, 가함, 다하스 마아가를 낳았다. 나홀에게도 열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브두엘을 통해 리브가가 태어났다.

//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주하나님은 이삭이 아브라함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임을 강조하신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주하나님께 아끼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믿음이 있을까? 태양이 기브온 골짜기에 달이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게 해달라는 여호수아의 기도응답보다, 히스기야 때 태양이 십도 뒤로 움직인 것보다 더 놀라운 믿음이다. 주님께 아낄 것이 무엇이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의 화평을 위해 댓가를 지불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 아브라함의 아들, 곧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암양 새끼 일곱으로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 집을 계약한 것이라면, 주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은 것은 영원히 살아갈 하나님나라를 산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보화가 묻힌 땅과 값비싼 진주를 사는 것이라고 비유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유일한 상속자, 곧 ‘자기 소유의 전부’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천국을 샀다.

창세기 21:22-34

그랄 왕 아비멜렉과 그랄의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왔다. 이들은 우선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계심을 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냈기 때문일까?. 그런데 갑자기 왜? 아비멜렉과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평화협정을 맺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이 의롭다고,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인정하신 적이 있다. 그때 오히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왜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을 행하였느냐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느냐고) 책망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 가문의 태가 열렸었다. 이렇게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사라를 범하지 않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기도로 왕위를 이을 수 있게된 것이 아비멜렉이 경험한 하나님이다. 아비멜렉은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아브라함을 찾아온 것일까? 아비멜렉은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아브라함을 본 것은 아닐까?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았던가? 최근에 들려오는 소식은 아들 이스마엘을  하갈과 함께 광야로 쫓아내지 않았던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살아온 아비멜렉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자신이 선대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평화롭게 자신의 땅에 거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 평화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믿어도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은 존재라느 생각이 들었나보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 거짓되게 행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온 것이다. 그것도 군대장관과 함께.

아브라함은 이때 오히려 평화를 깨는 것은 아비멜렉의 종들이라고 말한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지만 아브라함은 그래도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다고 하면서 자신도 언약을 맺어 평화가 유지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은 언약을 맺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약을 맺은 곳이 브엘세바다. 아브라함과 아들 이스마엘의 평화가 깨진 곳이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 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아비멜렉과의 평화에 대한 감사 찬양이었을까? 이스마엘(과 하갈)을 기억하며 용서도 구했을까?

블레셋 사람의 땅이라는 표현이 두번 나온다. 언약후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이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날 (오랜 기간) 거주했다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한다. 평화언약을 맺은 땅이 블레셋 사람의 땅이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아모리 족속 마므레 형제들과 동맹(언약)을 맺고 마므레의 수풀에 거주했었다. 이번에는 아비멜렉과 동맹(언약)을 맺고 블레셋 사람이 땅에 거주했다. 창세기에 나오는 언약은 이 두 동맹(언약)을 제외하면 모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맺은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맺을 언약은 화평밖에 없다. 오늘날 팔레스타인(블레셋) 땅에 사는 사람들이 수천년전 그들의 조상들이 맺은 평화를 불러내왔으면 좋겠다.

세상에 거주하는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댓가를 치르면서 화평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창세기 21:1-21

주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주하나님이 말씀하신 때가 되어 사라는 노년의 (백세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말씀대로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였다. 이삭에게도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다. 마침내 사라는 웃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웃게하셨다. 이삭은 자라 젖을 뗐고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베풀어 기뻐했다.

사라가 보니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창세기 저자는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라고 적는다.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그냥 볼 수 없었다. 아브라함에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이 일로 근심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고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기 때문에 이스마엘로도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다. 브엘세바 광야로 쫓겨난 하갈은 목마르고 지친 이스마엘을 멀리두고 소리내어 울 수 밖에 없었다. 이스마엘도 울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갈에게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하갈로 기운차리게 하시고 샘에서 물을 길러 이스마엘에게 마시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함께해 주셨다. 이스마엘은 사냥꾼이 되었고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 하갈은 이스마엘을 위해 애굽여자를 아내로 얻어 주었다.

// 임마누엘의 신비는 ‘함께 계심’에 머물지 않는다. ‘함께 동행’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가 두번 반복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이삭을 낳는다. 곧 주하나님께서 사라와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다. 그렇다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했느냐는 별개문제다. 앞선 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이 온전한 화평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 증거라고 지적했다.

20절에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라고 기록한다. 그렇다고 이스마엘이 하나님과 동행했을리 만무다. 이스마엘이 독립할 수 있는 사냥꾼이 되었고 돕는 베필을 애굽여인 중에서 찾았다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살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해도 비도 공평하게 주신다.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동행할 수 없는 멀리 계시는 하나님으로 느껴진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만 동행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에 이삭을 낳은 사라의 웃음(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스마엘이 눈엣가시로 보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언약에서 언급한 복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의와 공도를 행하는 ‘하나님나라의 기사작위’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의와 희락과 화평을 이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은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의 화평을 위해 불순종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신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음이 아픈 대목이다. 바울의 갈라디아서 해석이 조금도 위로가 안되는 아침이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온전한 순종으로 완성된다.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온전한 동행을 위해서 이 문제로 근심하는 아브라함을 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