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4:1-12

시날 왕? 바벨 성읍을 쌓으려고 했던 곳을 차지한 왕인가? 하여간 시날 왕, 엘라사 왕, 엘람 왕, 고임 왕이 요단 지역 소돔 왕, 고모라 왕, 아드마 왕, 스보임 왕, 소알 왕과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여 한판 붙었다. 창세기 기자는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십이년 동안 엘람 왕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13년에 배반하자, 엘림 왕 그돌라오멜이 시날, 엘라살, 고임 왕들과 더불어 르바, 수스, 엠, 호리 , 아말렉, 아모리 족속을 치면서 엘림 왕에 대항해 반기를 든 소돔, 고모라, 아드마, 소알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싸움은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연합군이 이겼다. 합종책을 이끌었던 소돔왕과 고모라 왕은 도망했고 연횡책을 주도한 엘람 왕의 연합군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았다. 당시 소돔에 거주하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재산을 노략당하고 포로로 잡혔다.

// 아브람 시대에도 합종연횡이 있었나보다. 작은 나라끼리 힘을 합해 큰 나라에 대항하거나, 큰 힘으로 이웃들을 하나 하나 포섭해 각개격파하여 합종을 깨뜨린다. 세상은 이렇듯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밥먹듯 한다. 이것이 세상의 역사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의 힘을 이용하셔서 주하나님앞에서 악하며 큰 죄인이었던 소돔을 일차적으로 벌하신다. 주하나님 앞에서 악하며 큰 죄인이었던 소돔으로 거주지를 옮긴 롯은 이 재난을 피할 수 없었다. 물과 꼴이 풍부한 에덴 동산 같고 애굽의 나일 평야 같은 요단지역이었지만 제단을 쌓지 않으면,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으면 진흙탕 싸움(이전투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가 되지 않도록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소서.

창세기 13

아브람은 애굽에서 나와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갔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고 기록한다. 하여간 아브람은 천하의 장사꾼이었나보다. 예순이 넘은 아내 사래도 바로에게 비싼 값이 팔았다가 환불 없이 사래만 돌려받았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아브람은 처음 쌓았던 벧엘과 아이사의의 제단에 이르러, 거기서 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안전하게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신 주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기근을 피해 남방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 왔으니 몇년은 지났을 것이다.

아브람과 동행한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었다. 그런데 소유가 많은 아브람과 롯이 머무는 땅은 두 집안이 동거하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곳은  이미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이 아닌가? 자연스레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고, 아브람은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니 서로 다투지 말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롯에게 분가하라고 명령한다. 대신 땅을 선택할 우선권을 롯에게 주었다.

롯이 눈을 들어 본 결과, 온 땅에 물이 넉넉한, 조상 대대로 들어온 에덴 같은, 그리고 (짧은 경험이었겠지만) 애굽의 나일 평야 같은 요단지역을 택하고 아브람을 떠나 동쪽으로 옮겼다. 롯은 요단 지역의 도시들에 머물렀다고 한다. 가축을 치며 살던 유목민 롯이 도시 생활에 빠져 소돔까지 이르렀다. 창세기 기자는 소돔사람은 주하나님 앞에 악한 큰 죄인이었다고 평가한다. 도시의 유혹은 강하다.

한편 아브람은 가나안에 그냥 머물렀다. 롯이 떠난 후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아브람이 있는 곳에서 북남동서 사방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브람이 보는 땅을 아브람과 아브람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셨다. 아브람의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이 밟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람은 장막을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로 옮겨 그것에 거주하며 거기서 또 주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 계시록을 읽을 때 제단, 곧 하늘 성전의 제단은 성도들의 기도가 향기로 하나님께 올려지는 곳으로 묘사된다. 다시말해 제단은 하나님과 대화(기도)하는 곳이다. 제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성도들의 눈으로 하나님의 길을 보게 하신다. 눈을 들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보는 제 눈을 감겨주시고 하나님께서 제 눈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소서. 아멘

창세기 12:10-20

주하나님이 가라는 곳이 꼭 좋은 곳만은 아니다. 주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람이 이주한 가나안에도 기근이 든다. 그것도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다고 한다. 아브람이 점점 남방으로 내려간 이유가 바로 기근일 것이다. 아브람은 결국 나일 평야가 있는 애굽까지 내려갔을 것이다.

아브람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내 사라에게 말한다. 예순이 넘은 아내에게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얼마나 로맨틱한 표현인가. 그러나 아브람이 이렇게 말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해야 자신이 안전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심보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브람 일행이 애굽에 이르자 정말로 애굽사람들이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고 반했다. (화장발인가? 아니면 이국적인 외모나 얼굴색이 달라서…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났다면 사래는 적어도 65세였을 것이다.) 바로의 고관들에게 그소식이 퍼졌고 고관들이 바로 앞에서 공공연히 이국에서 온 아리따운 여인 이야기를 하자 바로는 사래을 바로의 궁으로 데려가고, 아브람에게는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댓가로 주었다. 한마디로 사래가 바로에게 팔린 것이다.

그러나 주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어야 할 아브람을 위해 바로와 바로의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무슨 재앙일까?)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서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어찌하여 사래가 너의 아내라고 말하지 않고 누이라고 말하고 나에게 아내로 주었느냐고 호통?을 치며 아브람에게 네 아내를 도로 데려가라고 하였다. 바로는 수하사람들에게 아브람이 아내 사래와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안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명하였다.

아브람도 영락없는 아담의 후손이다. 아내를 핑계거리로 삼는다. 그러나 불순종의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주시고 주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하게 하셨듯이, 주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부부관계를 지켜주셨다.

//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아브람이 어쩌다 하나님이 아닌 아내 사래로 말미암아 안전을 담보하고 목숨을 보존하고자 했을까? 주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 가나안 땅의 심한 기근이 불신으로 이끌었을까? 이 사건에서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이 완전했다기 보다는 여전히 믿음의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브람도 처음부터 믿음이 완전했던 것이 아니었다. 불순종의 경험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쌓여가면서 믿음이 온전해져 갔다. 하물며 우리랴. 불순종은 회개하고 말씀에 대한 순종을 쌓아가야 한다.

창세기 11:31~12:9

데라의 족보는 ‘낳고 죽었다’로 간단하게 기록되지 않는다.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이끄는 족보다.

데라는 아들 중 아브람 부부와 일찍 죽은 하란의 아들, 곧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출발한다. 가나안으로 가던 데라는 국경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데라는 끝내 하란에서 생을 마감한다.

데라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왜 둘째아들 나홀의 가정은 함께 가지 않았을까?

데라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가 죽기전에 태어났다. 당연히 노아로부터 직접 노아와 동행한 하나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데라가 하나님과 동행했을리는 없다. 데라가 죽은 후에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하셨을까? 주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리에서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던 데라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이미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셨고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하란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나홀은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동의하지 않고 갈대아 우르에 남았을 것이고 노구의 데라는 아들  아브람을 따라 억지로 하란까지는 왔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가안안 땅으로 가는 경계를 넘지 못하고 하란에서 버티다 (불순종하다) 죽었을 것이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고향 – 갈대아 우르, 친척 – 나홀 가정, 아버지의 집 – 하란/데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때 데라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겠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축복하셨다. 아브람에게 복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주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장면은 아담과 노아에게 복을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릎을 꿇게 하시고 주하나님께 충복하도록 ‘하나님나라 기사작위’를 수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임명하시는 것이다. 주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온 땅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온 땅을 축복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를 주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축복하시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주하나님도 불순종하는 자로 저주하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람은 주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 (순종했다). 하란까지 함께 왔던 롯도 아브람과 동행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다고 한다.

주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여주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종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출발했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히브리서 저자가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고 기록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야할 곳이 가나안이라는 것을 몰랐다기 보다는, 주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가나안이 어떤 곳인지,  주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람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어떻게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며, 어떻게 아브람으로 하여금 창대케 하시며, 어떻게 아브람이 복이되게 하실 지 몰랐다는 뜻일 것이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주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람은 주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곳에다 제단을 쌓았다. 첫 제단은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쌓았다. 제단은 주하나님의 축복/약속에 대한 사람의 마땅한 반응이다. 주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다. 아브람은 벧엘 동쪽, 아이 서쪽 사이로 옮겨 (여호수아서를 읽을 때를 기억하면 가나안 정 중앙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창세기 기자는 기록한다.  에노스 때 사람들이 주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후 오랜만에 나오는 표현이다. 다시말해 아브람때 와서 다시 주하나님과 (규칙적으로, 본격적으로) 교제하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아브람은 점점 남쪽을 향해 옮겨갔다.

// 믿음으로 아브람은 주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믿음은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믿는다’는 동사가 따로 있겠지만 오늘은 ‘믿음’은 명사형이고 ‘순종’이 믿음의 동사형이라고 적용해 본다.

사족: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죽은 후 에녹을 눈으로 직접 본 마지막 세대 다음 세대에 태어났다. 아브람도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가 죽은 후 노아를 눈으로 직접 본 마지막 세대 데라의 아들이다. 에녹을 본 사람들이 (아담을 포함), 노아를 직접 본 데라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에녹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노아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브람이 믿음으로 순종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들음’이란 ‘듣고 순종함’이다.

 

창세기 11:10-30

바벨 사건 이후 셈의 족보가 이어진다. 셈은 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 그후 오백년을 더 살며 자녀를 낳았다. 셈 – 아르박삿 – 셀라 – 에벨로 이어지는 족보를 보면  홍수 후 바벨에서 세상이 나뉘었을 때인, 곧 에벨에게서 벨렉이 태어나기까지 101년 정도의 시간의 흘렀다. 방주에서 구원받은지 1세기만에 사람들 모두 한가지 언어로 하나님께 대적했던 것이다. 노아가 홍수 후에 삼백오십 년을 더 살았으니 노아도 당연히 바벨의 현장에 있었을 것이다.

셈의 족보는 계속해서 벨렉 – 르우 – 스룩 – 나홀 – 데라로 이어진다. 이 데라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셈의 족보는 여기서 끝나고 데라의 족보가 이어진다. 대충 년도를 따져보면 노아는 분명  데라 때까지 살아 있었을 것이다. 아브람은 노아가 죽은 후 태어났다.

데라의 족보는 데라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은 것으로 시작한다. 하란은 데라보다 일찍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고 한다. 아브람은 이복여동생 사래와, 나홀은 일찍 죽은 하란의 딸 밀가와 각각 장가들었다. 하란에게는 롯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밀가와 이스가라는 딸이 있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

// 왜 데라의 아들 아브람에서 족보가 갈라지지 않고 굳이 데라에게서 족보가 새로 시작할까?  홍수 이야기의 주인공 노아를 생전에 만난 데라, 아니 하나님과 동행이 무엇인지 경험했던 노아와의 연장선상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은 창세기 저자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란은 데라의 막내 아들? 하란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 족보상 하란은 아브람과 나홀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름이 나오지만 육신의 장자일 수 도 있겠다. 하란의 아들 롯이 아브람과 동행하고 딸 밀가가 삼촌 나홀과 결혼을 한 것도 하란이 육신의 장자였다는 것을 뒷받침하지 않을까?  뇌피셜이다.

데라 족보의 또다른 특징은 2장 천지족보에서 아담과 하와가 가정을 이룬 것을 기록한 이후  중단되었던 가정을 이루는 이야기가 다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짧은 데라 족보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데라는 이것을 알았기에 아들들을 근친상간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가계내 결혼을 시켰다. 이 전통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며느리를 찾을 때도 이어진다.

홍수후 사람들은 족속과 언어와 나라로 흩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행을 경험했던, 방주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던 노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고 축복한 셈의 후예를 중심으로 교제를 이어가신다. 그 새로운 시작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다. (아브람의 족보는 신약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로 이어질 때까지 아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