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1-9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단순히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는 의미보다는 한통속이었다는 뜻이 아닐까? 셈과 야벳이 생각하는 바가 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하나님의 평가는 노아 가족과 후손 모두에게 적용된다.

노아와 세 아들들은 아마도 아라랏산지에서 내려와 동쪽으로 지경을 넓혀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시날 평지를 만나자 그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통속이었던 이들은 함께 살고자 큰 성읍을 만들고 탑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 아들들에게 말씀하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명령에 대한 거부다. 노아의 아들들은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라며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들었다.

주하나님은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주하나님은 사람들이 한 족속(가족)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겠다고 하셨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을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친히 내려오셔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서로 알아 듣지 못하게 하셨다. 창세기 저자는 10장에서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언급하면서 벨렉 때에 언어가 나뉘었다고 한다. 그래서 10장에서와 같이 노아의 세 아들들과 자손들은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흩어졌다.

주하나님은 사람을 흩으심으로 사람들이 온 땅에 충만할 수 있도록 하신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 완전히 선다.) 사람들이 세우려던 성읍 이름이 바벨이요, 그곳에 세우려던 탑이 바벨탑이다. 바벨은 주하나님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는 뜻을 갖는다.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사람들이 세우려고 했던 성읍의 이름을 후대 바벨론은 그대로 가져다 쓴다.

// 바벨 사건은 노아가 아직 살아 있는 때 일어난 일이다.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족보 첫머리를 장식했던 노아도 어쩔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대신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려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을 하나님은 흩으셨다. 우리는 잠언의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 완전히 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으로 하나될 것이다.

(왜 창세기 저자는 굳이 주하나님이 내려오셨다고 기록할까?)

창세기 10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다.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후에 자녀를 낳았다. 창세기 저자는 야벳의 아들들부터 기록한다.

야벳의 아들(후손)들로부터 여러 나라와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물렀다고 한다. 바벨사건을 기록하기 전에 언어가 나뉠 것을 언급한다. 함의 자손 중에는 사냥꾼 니므롯을 제외하면 당연히 가나안이 눈길을 끈다. 가나안은 신돈, 헷,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족속을 낳았다고 한다. 브리스 족속이 빠졌지만 자연스레 가나안 땅 일곱족속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이들 역시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나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셈의 아들들이 기록된다. 셈의 후손 중 에벨이 두 아들을 낳았을 때 세상이 나뉘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토를 단다. 마찬가지로 셈의 자손도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나뉘었다. 이 노아 자손의 족보로부터, 곧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이 땅의 백성들이 나뉘어 퍼졌다.

// 9장에서 노아의 세 아들은 저주 받은 함과 하나님을 찬송하리라는 셈과 야벳 장막으로 나뉜다. 가인과 셋(아담) 족보가 달랐던 것 처럼, 함의 자손과 셈과 야벳의 자손의 족보도 조금 다르다.  가인의 족보에는 성읍을 건설하고 예술인과 장인의 조상이 언급된다. 곧 문명의 발전을 언급하는데 셋의 족보에는 출생과 죽음 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함의 족보에는 사냥꾼 니므롯, 큰 성 레센의 건설이 언급되지만 야벳과 셈의 족보에는 자손을 낳은 것만 기록된다. 하나님의 축복과 세상에서 명성을 얻거나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세상에서의 명성이나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 없는 자들이 하나님 대신 내 세우는 우상과 같은 것이다.

노아 세 아들들의 족보에는 아담의 족보와 노아의 족보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기록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홍수 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악하다는 것이 노아 세 아들의 족보에서부터 드러난다. 홍수에서 구원받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전히 불순종의 결과인 죽음의 지배를 받는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다.

창세기 9:18-2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는 포도농사를 시작했고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하여 (무엇이 노아로 하여금 취하도록 포도주를 마시게 했을까? 그것도 혼술로. ㅠㅠ)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있었다. 노아의 아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노아의 하체를 보고 나가서 그의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셈은 야벳과 옷을 가지고 뒷걸음 쳐 들어가 노아의 하체를 덮고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지 않았다.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고 취한 함의 행동과 셈과 야벳의 행동은 아담과 하와가 벌것벗음으로 두려워했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방주를 지어 홍수로부터 구원을 받은 노아지만, 불순종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 같은 완전한 존재로 회복(재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아도 결국 구백 오십 세가 되어 죽었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은 모든 사람을 죽음아래 있게 만들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 취하지 (즐거워하지) 않고 방심하는 순간, 노아는 포도주에 (스스로의 성취?에) 취하게 되었고 술취한 노아의 벌거벗음은 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악’을 맛보게 했다. ‘악’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 하나님은 정녕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속삭이지 않는가? 자초지종을 안 노아는 함에게 가나안은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것이며) 셈과 야벳을 섬겨야 한다고 저주한다. 그러나 셈은 야벳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죄를(가나안을) 다스리라고 축복한다.

노아의 술취함은 아들 삼형제를 둘로 갈라 놓는다. 한몸을 이루어야 할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핑계를 대는 사이가 되었고, 아담과 하와에서 태어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인한 것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셨나보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없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인 ‘선’을 배울(닮을)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해 가면서 ‘선’을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곧 ‘선’임을 깨달아야 한다. 반대로 하나님 없이 행하는 것이 ‘악’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없이도 즐거움에 취하는 것이 악이 아니면 무엇이랴.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한 시인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벌거벗음이 두려움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는 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일 것이다.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안기는 수 밖에 없다.

^^ 1월 13일 추가: 문제는 요즘 사람들은 벌거벗음을 드러내려고 한다. 부끄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수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벌거벗음이 수치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교만이다.

창세기 9:1-17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복을 주신다. 첫 사람 아담에게 복을 주셨듯이 (생기를 불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을 사람작위를 주신 것이라고 이해했다.)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에게도 ‘사람작위’를 주셔서 하나님께 충복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작위’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사람작위를 주시며 첫사람 아담에게와 같은 사명을 주신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그 고기를 그 생명이 되는 피채 먹지 말라고 명하신다. 특별히 살인을 금하시면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 한 노아의 아들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하나님이 갑이 되시고 을은 노아와 노아의 후손들, 방주에서 구원받은 모든 생물이다. 갑이신 하나님은 다시는 을인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땅을 멸할 홍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무지개를 그 증거로 주신다. 무지개가 언약에 대한 갑의 싸인이라고 하신다.  이 짧은 본문에 ‘언약’ 언약이라는 단어가  일곱번이나 반복된다.

// 갑이신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의 증거를 주시고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생물인 을을 대표하여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사람작위를) 주셨다. 사람이 모든 생물을 대표할 수 있는 이유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당연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복종해야 한다. 8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신다. 이 언약관계가 성도에게 주어진 영생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후손들에게 무지개로 싸인하셨다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더 확실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싸인하셨다.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의 증거를 주신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신다. 언약안에 살라고 하신다.

창세기 8

방주 밖의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고 방주 안의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은 다 살았다.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다.

백오십 일 후에 물이 줄기 시작했고 비가 그쳤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라고 8장을 시작한다. 바람은  자연적인 현상이나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기도 한다. 창세기 기자는 에덴 동산에서 주하나님이 거니시는 소리를 바람으로 표현했었다. 포악한 자들이 다 죽은 후 땅에 다시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이) 거니시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일곱째 달에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다.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달에는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봉우리가 보인지 사십일이 지난후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놓아 땅이 말랐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둘기가 돌아오자 칠일 후 다시 비둘기를 내놓았고 저녁에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다. 다시 칠일 후 비둘기를 내놓았으나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 육백일 년 첫째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혔다. 방주의 문은 하나님이 닫아 주셨는데, 얼마나 궁금했을까?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지면을 보았다. 물이 다빠졌다. 그래도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방주에 머물렀다.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노아에게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있는 생물을 이끌어 내어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노아와 노아의 아들과 아내와 며느리, 그리고 방주 안에 있던 모든 생물이 방주에서 나왔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제일 먼저 주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를 드렸다. 주하나님께서 번제의 향기를 받으시고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을 아신다고 하신다. 그래서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는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땅이 있을 동안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계속될 것이라고 하셨다. 창조세계가 주하나님이 섭리하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절기와 기후와 계절과 주야의 변화로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읽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하나님은 절기와 기후와 계절과 주야의 변화로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자연만물을 봐도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니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하나님의 말씀만한 것이 없다. 성서의 기록은 노아도 누리지 못한 성도들의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