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7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1)

방주로 초대받은 유일무이한 노아가족. 초대받은 이유는 노아가 자기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주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에게서 주하나님은 의로움을 보셨다고 한다. 다른 이유를 토달지 않는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따라서 주하나님이 노아에게서 의로움을 보셨다는 것은 노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지으신대로 정직했다는 뜻이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닮아갔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창세기 기자는 다시한번 노아가 주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기록한다. 노아가 육백세 때 홍수가 일어났다. 노아 나이 육백세에서 갑자기 스치는 생각은

5장 아담족보에 의하면 노아는 오백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육백세에 홍수가 났으니 홍수나기 120년 전에 노아는 480세 정도 였을 것이다. 증조부 에녹을 좇아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는 어쩌면 자신도 하나님께 데려감을 입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때까지 독신으로 산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하나님의 뜻이 노아를 하나님께 데려감이 아니라 방주를  지어 생명을 보존하는 것임을 깨닫고 결혼하고 세 아들을 낳았을 것 같다.

방주에 들어간  칠 일 후에 홍수가 시작되어 사십주야 비가 땅에 쏟아졌다. 방주의 문은 주하나님께서 직접 닫으셨다고 한다.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다.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은 다 살아 남았다. 물은 백오십 일 동안 땅에 넘쳤다.

//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과 노아의 삶은 다르게 진행된다. 똑같지 않다. 한명은 데려가시고 한명은 생명보존을 위해서 땅에 두신다. 내가 걷는 믿음의 길도 믿음의 선진들과 똑같이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데려감을 입든, 방주에서 보호를 받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사는 삶도 같은 듯 하지만 다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다양함 가운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임마누엘뿐이다.

창세기 6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창세기 1장 28절 주하나님의 축복(명령)이 이루어지는 듯한 뉘앙스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로 세상은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난제다. 쉽게는 앞에 나온 두 족보를 따라 사람들에게서 난 딸(자녀)들은 가인의 후손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자녀)들은 아담(셋)의 후손들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명확하지 않은 것은 넘어가자. 대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하고 순종하는) 존재들일 것이고 사람의 딸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존재들일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당연히 아들과 딸은 자녀들을 뜻할 것이다.) 결혼하면서 생긴다. 영이신 주하나님은 주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육신으로 지음받은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 그런데 주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녀들이 주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과 한몸을 이룸으로 더 이상 주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주하나님은 주하나님께 충성하고 복종하라고 ‘사람’이라는 작위를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하셨는데, 사람들이 생령(사람)되기를 포기하고 그냥 육신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하나님은 120년이라는 기한만 사람과 함께 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람의 자녀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고대문명을 이루어내었지만 주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죄악으로) 살고있고,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항상 하나님 없이 진행되는 것을 보셨다. 주하나님께 충복하라고 무릎꿇게 하시고 ‘사람’작위를 주셨건만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고 말았다.

주하나님은 주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실 계획을 세우신다. 노아 이전 세대들은 모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께 데려감을 보았으면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치 않자 사람들을 쓸어버리실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에녹이 하나님께 데려감을 받은 후 태어났지만 증조부 에녹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이다. 에녹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노아 역시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런 노아로부터 새로운 족보가 시작된다. 창세기 기자는 노아가 주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소개한다. (주하나님과의 동행은 주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결과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으나 하나님과 동행한 또 다른 의인 노아에게는 주하나님께서 또 다른 계획으로 일하신다.

창세기 기자는 다시 한번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였다고 기록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땅이 부패하였다. 사람(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땅과 함께 포악한 사람들을 멸하시겠다고 알려주신다. 대신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다. 친히 규격까지 알려주신다. 그리고 노아에게 생명을 보존 할 수 있도록 새로운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야 말로 생명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해서 땅과 함께 그들을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 노아 가족과 혈육있는 모든 생물의 씨가 마르지 않도록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주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마음이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 하나님니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요, 의인의 삶이다. 주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결과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성서의 마지막도 주 예수의 은혜를 얘기한다.

창세기 5

아담의 족보다. 아담의 족보는 아담의 시조가 창조주 주하나님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로 지음을 받았다고 분명히 한다.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고 사람이라고 불러주셨다. 앞에서 복을 주시고를 ‘행복’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묵상했다. 기사가 왕에게 기사작위를 받듯, 남자와 여자는 주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하나님께 ‘사람작위’를 수여받은 것이다. (사람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달리 생령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작위를 받았다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을 뜻으로 ‘사람작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 기사가 왕에게 충복하듯, 사람은 주하나님께 충복하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이렇게 아담의 족보는 시작한다.

아담 족보는 가인의 족보와 다르게 건축가든 예술가든 장인이든 새로운 문명의 조상이 되었다는 언급이 없다. 대신 에녹 때에 와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한다. 930에 죽은 아담의 경우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시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어도 에녹과도 함께 살았을 것이다. 노아는 에녹과 겹치지 않지만 노아 이전의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시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셨다는 것 외에 아담의 족보는 후손들에 대해 누가 무엇을 했는지 토를 달지 않는다. 다만 노아 이름이 안위라고만  주석을 단다. 다시말해 아담의 족보는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를 자랑하는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교훈하는 족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의 족보는 일단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것에서 멈춘다.

// 아담의 족보는 죽음의 족보처럼 보인다.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다. 셋도 죽었다. 천년가까이 살아도 불순종의 결과는 정녕 죽는 것이었다. 단 한명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에게는 죽었다라는 문구 대신 하나님 데려가셔서 세상에 있지 않았다라고 한다. 영생은 하나님과 동행함이라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교훈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과 동행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임마누엘이다.

창세기 4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득남을 주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주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아니라 악화로 치닫는다.

창세기 기자는 가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양치기라고 소개한다. 가인과 아벨도 자라면서 주하나님을 알았나 보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 주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주하나님께 드렸다. 주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제 삼자는 주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셨는지 알 수 없을지 몰라도, 가인은 자신과 자신이 드린 제물을 주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을 알고 분해서 안색이 변했다.

주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왜 분해하고 안색이 변했느냐고 물으신다. 주하나님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다. 선이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다. 반면 악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라고 적용했다. 따라서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행했다는 뜻이다. 하나님 없이 뭔가 행했다는 것이 곧 죄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없이 행하도록 속삭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사탄이 속이더라도 가인은 죄를 다스려야 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는 일에 결국 실패하고 만다. 주하나님과 함께 하시 않으면 죄를 다스릴 수 없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들에서 쳐죽이고 만다.

주하나님은 가인에게서 아벨을 찾으신다. 가인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반문한다. 가인은 이렇게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잃고 만다. 창조의 족보와 첫사람 아담의 족보는 불순종한 가인의 족보로 이어진다. 가인과 후손들은 성을 쌓고 장막을 짓고 가축을 치며 수금과 퉁소를 잡는 예술인이 되며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장인의 조상이 된다. 문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나보다. 문명은 그 방향이 하나님 아는 것 대신, 하나님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했나보다.

주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 새로운 아들을 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그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셋의 아들 에노스를 통해 멀어져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신다.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800년 이상씩 장수하던 때라 셋은 가인과 가인의 후예들과 상당기간 같은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세상 문명이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지는 방향으로 흐르자 주하나님을 아는 셋과 에노스는 하나님을 부르짖을 (기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주하님께 기도했다는 뜻일 것이다.

// 주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주하나님을 부르는 수 밖에 없다. 기도하지 않고서야 언제 또 주하나님을 부를까?

 

창세기 3

창조는 주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3장에서 창조는 ‘그런데’ 라는 전환을 맞는다.

창세기 기자는 뱀을 소개한다. 뱀을 주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고 평가한다. 이 뱀이 여자에게 묻고 말한다. 주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사람과 교제하신다. 간교한 뱀이 말로, 다시말해 하나님이 사람과 교제하는 방법으로 여자를 유혹한 것이다. 이렇듯 사탄은 하나님 처럼 다가와 진리를 교묘히 흔든다.

벌거벗었어도 부끄럽지 않던 남자와 여자는 벗었음으로 두려움에 빠진다. 이렇게 불순종은 기쁨의 에덴동산을 두려움의 동산으로 바꾼다. 아담은 한몸이어야 할 여자와 책임을 미루는 사이가 된다. 여자는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뱀에게 책임을 미룬다. 사람은 주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사람과 피조물과의 관계도 파괴되었다.

주하나님은 사람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 곧 ‘신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선은 하나님과 함께 함이고, 악은 하나님이 없은 것이다. 사람들이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선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 대신,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 없이 살아보겠다는 교만을 뜻한다.

주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쫓아내신다. 하나님없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인 양 사는 (영생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아주신 것이다. 이 쫓겨남이 은혜다. 기쁨의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 없이 두려움에 사는 것이야 말로 저주 중의 저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나라에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탐욕하며 산다면 에덴이 저주의 동산으로 바뀐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에덴은 장소가 아니라 임마누엘, 하나님과의 교제가 기쁨의 동산으로 만든다.)

//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이 한 순간에 파괴되었다. 말씀이신  주하나님 아닌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 결과다. 사탄은 오늘도 성도?들에게까지 값싼 은혜를 들먹이며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거짓을 속삭인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그리고 믿음이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영원히 죽는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불순종으로 깨어진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종으로 회복시키셨다. 우리도 순종으로 회복된 관계를 누리라고 하신다.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고 속삭이지만 사탄에 귀를 기울이면,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미 죽은 자다.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