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 1:1-8

주 안에서 = 진리 안에서

  1. 요한은 요한이서에서와 같이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한다. 바울은 딤전에서 장로는 (감독은)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니 장로인 요한이 자신이 돌보는 사랑하는 성도 가이오, 곧 교회의 지체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는 것이다.
  2. 요한은 사랑하는 자,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도록, 그래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 // ‘잘된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성공이지만 ‘좋은 것을 얻는다’라는 뜻이 강하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는 성부 하나님을 소개한다.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성령 안에서 신실하게, 온전하게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순종이 강건하게 한다.
  3. 장로 요한은 형제들로부터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기뻐한다고 편지한다. //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사랑을 행한다.
  4.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고 편지한다. // 생명이 있다는 증거다.
  5. 진리 안에 행하는 자녀들, 장로가 돌보는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진리 안에 행함을 구체적으로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한 신실함’이라고 적는다. //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한 것이 무엇일까? 구체적인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이다. 형제를 나그네 된 자들이라고 적는 것으로 보아 늘 함께 있는 형제보다, 여행 중이거나, 방문중인 형제를 뜻하지 않을까? 바울이 로마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와 같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는 권면에 대한 적용이랄까?
  6. 장로는 나그네 된 형제들이 가이오의 사랑을 증언했다고 밝히며, 전송할 때까지 합당하게, 곧 함께 있는 동안 신실하게 대접하면 좋겠다고 편지한다.
  7.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고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 전도자들, 선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타이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삶을 사는 성도들 모두들 지칭할 것이다.
  8. 장로들은 이방인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교훈한다. 저들도 진리 안에서 함께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은 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보내는 자나 보냄을 받은 자나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함께 지어져 가야한다.

*반복:  ‘잘된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성공이지만 ‘좋은 것을 얻는다’라는 뜻이 강하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기도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는 성부 하나님을 소개한다.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신실하게, 온전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순종이 강건하게 한다.

요한이서 1:7-13

과유불급! 과녁을 벗어나지 말아라!

  1. 세상에는 미혹하는 자들이 많다. 요한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을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 편지하는 이유다.
  2. 요한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미혹하는 자들의 가르침에 조심해서 진리와 함께 사랑하는 자들의 가르침과 일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 곧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온전한 사귐을 누리라고 당부한다. // 임마누엘이 우리가 받을 온전한 상이다.
  3.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 지나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주님보다 앞선다는 뜻일 것이다. 성령의 인도 (깨닫게 하심)보다 나의 경험과 지혜를 앞세운다는 의미가 아닐까? 장로는 지나친 것을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과유불급이다. 당연히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 임마누엘이 깨어진다. // 지나친 열심보다 삼위하나님과의 교제, 임마누엘이 더 중요하다고 교훈한다.
  4.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성도의 사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사귐이다. 임마누엘의 사귐이다. 임마누엘 밖의 사람들과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람은 그 악한 일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어져도 기뻐하는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판단한다. // 만나지 말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성도는 그들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교훈한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이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되냐고 반문한다.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5. 요한도 바울처럼 성도와의 사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우선은 편지로 교제하지만 대면해서 사귐을 나누고자 소망하며 편지 한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야 말로 주 안에서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일이다.
  6. 장로 요한은 다시한번 ‘택하심’을 강조한다. 이번에는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가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 자녀들에게 문안한다고 마무리한다. //네 자매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성도의 교제, 곧 사귐은 하나님의 택하심,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땅한 바다.

// 지나침은 과유불급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전통에 사로잡혀 진리를 지나쳤다고 할 수 있다. 급(과녁)에서 벗어낫다. 우로나 좌로 치우쳤다. 그래서 푯대이신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 택하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우리와 같이 사람 (곧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과녁이(푯대가) 있다.

요한이서 1:1-6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1. 요한이서는 사도 요한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밝힌다. // 딤전 3:5에서 장로(감독)을 하나님의 교회를 볼보는 사람이라고 한다. 요한이서의 수신자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다. 요한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을 참으로 사랑한다고 문안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게 사랑으로 문안한다. // 부녀와 자녀들은 교회 지체중에 연약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는 차별이 없다.

  2. 사랑으로 문안하는 이유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것을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은 진리되신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 진리는 곧 사랑이다.
  3.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삼위 하나님을,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 가운데 함께 있다. // 하나님나라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받은 자들이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다.
  4. 요한은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것을 보며 심히 기뻐한다. // 요한이 강조하는 계명은 물론 서로 사랑하는 것이리라. 계명을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요 듣고 행하는 자녀들이다. 자녀의 덕목은 진리에 대한 순종이다.
  5. 요한는 부녀들에게도 서로 사랑하자고 당부한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하자’라는 계명은 새계명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이 가진 것이라고 한다. //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성장한 어른 들은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 진리가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다. 물론 사랑이 진리를 훼손할 수도 없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6. 요한은 사랑이 무엇인지도 정의한다. 사랑이란 성도들이 주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계명이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진리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람이 참된 사랑, 곧 진리에 순종하며 산다.

빌립보서 4:10-23

빌립보서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빌립소서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빌립보 성도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썼다.

편지를 마치면서, 이번에는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생각해주기 때문에 크게 기뻐한다고 적는다. 바울의 쓸 것을 도우려는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전달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물질의 후원때문만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비천하거나 풍부하거나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처한 상황이 달라도 주 안에서는 자족하는 감사를 배웠다고 한다.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바울의 강세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에 있지 않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곧 ‘주 안에서’가 여전히 중심어다. ‘주 안에서’라고 반복하지 않고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적는 것은 바울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주 안에서도 바울 자신의 능력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 속으면 안된다. 주 안에 있다고 성도는 욕심을 따라 , 혹은 자기 뜻을 따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자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주 안에서 능력을 주시면 성도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는 불가능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바울의 쓸 것을 도우려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한다. 이미 빌립보 성도들은 여러번 바울의 사역에 참여했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복음의 시초에, 바울의 초기 사역부터 바울의 사역에 참여했다고 감사한다.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도 한번이 아니라 두번씩이나 (온전히) 바울의 쓸 것을 보내주었다고 회고하며 감사한다. 바울은 후원 (선물)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빌립보성도들과의 교제(사귐)을 열매맺기를 원한다고 편지한다. 에바브로 디도를 급히 보내면서,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 디도편에 바울의 쓸것을 보내 준것으로도  이미 바울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고 답신한다. 에바브로 디도편에 받은 것은 일차적으로 바울의 쓸 것, 곧 물질의 후원이겠으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 지어져 가는 교제의 풍족함을 이야기 하는듯 하다. 그래서 빌립보의 도움을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라고 적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도의 연합이야 말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다. 마땅한 성도의 삶이다.) 쓸 것을 받은 바울은 성부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빌립보 성도들의 필요를 풍성한 대로 채워주시기를 기원한다. 서로서로 돕는 형제의 교제야 말로 성부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아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문안 인사를 한다. 바울과 함께 있는 모든 형제들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적는다.  구체적으로 가이사의 집 사람들을 언급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로 축원하며 편지를 맺는다.

빌립보서 4:1-9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부활의 몸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한 교제를 소망하는 빌립보 성도들을 바울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요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와같이 주안에 서라’ 라는 권면이 그러므로 이전인지 앞으로 할 말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주 안에서’를 계속 강조해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의 교제와 연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바울은 성도의 교제와 연합을 위해 구체적으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실명을  거론하며)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후원하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구체적으로 동참해 힘쓰던 여인들도 후원하라고, 글레멘드와 또 다른 자신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한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지체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바울은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바울은 마지막 때에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당부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히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교훈한다. 바울은 일상의 염려보다 죽음에 대한 염려를 염두에 두고 이 교훈을 한 것일 것이다. 바울은 3장 10,11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신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소망을 말했다.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을 소망하라! 주 안에서 평강을 누리고 기뻐할 이유다.)

다시한번 바울은 ‘끝으로’라는 접속사로 편지를 이어간다. 어디까지 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달려야 할 믿음의 경주가 남아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유종의 미를 거두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덕담을 듣고 칭송을 받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경주를 마칠 때까지 지속적으로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한 일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라고 교훈한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한 일들을 가르치고 말과 행함으로 보여주었으니 자신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친다. 임마누엘!

// 믿음의 경주는 임마누엘, 곧 주 안에서의 경주다. 그리고 믿음의 경주 결승점은 온전한 임마누엘이다. 따라서 믿음의 경주는 심지어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서도 계속되어야 한다. 감옥에 갇혀셔도 주안에서의 기쁨과 평강을 가르치고 말과 행함으로 보여주는 바울. 바울은 죽고 부활해서 영광의 몸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온전한 사귐을 소망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다른 지체들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기쁨이여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이땅에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임마누엘을 맛보며 연합의 기쁨과 평안을 누린다. 우리에게도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한다. 예수님은 칠십인 전도자가 돌아와 사역보고를 하며 기뻐할 때, 사역의 열매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 참된 기쁨과 평안은 임마누엘에서 온다. ‘주 안에서’에 답이 있다. 이땅에서는 성도들이 주안에서 이와같이 설 때, 연합할 때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