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7:16-34

바울은 아덴에 혼자였다.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렸다. 혼자 아덴을 돌아보던 바울은 신전으로 (우상으로) 가득함에 마음이 아팠다. 혼자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했다. 그래서 바울은

안식일에는 회당을 찾아가 유대인과 경건한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주중에는 장터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논쟁했다. 철학자들과도 논쟁했다.  철학자들은 말쟁이 (오지랖이 넓은) 바울이 무슨 새로운 철학을 소개하는지 궁금해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제로만 생각했다.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에 세웠다. (아레오바고는 종교재판을 하던 언덕으로 알려져 있지만 재판을 하기 위해 데려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을 가르침이 무엇인지 변증할 기회를 주었다. 저들에게 이상하게 들리는 바울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아덴에는 뭔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이들은 새로운 얘기를 주고 받기에 바빴다고 누가는 당시 문화를 소개한다.

아레오바고에 선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종교심이 많다는 말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종교심이 많다는 것은 ‘신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많다는 의미다. 아덴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신전들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했을 것이다.  신전들 중에는 심지어 이름 없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도 있다고 했다. 바울은 이름 있는 신전들도 결국은 그 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제사하는 것이라며, (참 신이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신전에 머무는 분이 아니시라고 소개했다. 신전에 머무시면서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다. 사람들이 다양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아덴사람들이 생각하듯 멀리 신들의 세계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수  있도록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했다. 삶의 원천이요, 생명의 근원 (부모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그러니 우상처럼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이 디자인하여 만들어 모시면 안된다고 했다. 알지 못하던 때에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은 봐주시지만 이제는 (알았으면)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참 신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을만한 증거라고 전했다.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자 어떤 사람들은 조롱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더 받고자 했다.   그리고 그중에 몇 사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다.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 다마리라는 여자, 그리고 또 몇명이 더 있었다. 바울 일행이 박해가운데도 복음을 전하면 많은 사람이, 적지 않은 무리가 믿었는데 오늘을 몇 사람이 믿었다. 그래도 오늘은 누가 믿었는지 두사람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름이!

아덴 사람들뿐 아니라 사람들은 종교심이 많다. 신적, 영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행복을 추구하든 우주적 질서에 민감하든. 불교국가인 캄보디아도 그렇고, 점집과 무속인이 늘어가는 한국도 그렇다. 바울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소개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라고 외친다.

 

사도행전 17:1-15

빌립보를 떠난 바울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해오던 대로 유대인회당에 들어가 세번의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였다. 그 중 어떤 사람, 즉 경건한 (유대교에 입교한) 헬라인의 많은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였다. 그래서 시장의 조폭들을 선동하여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회당장) 야손의 집에 머물러 있던 바울일행을 끌어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대신 야손과 믿음의 형제들을 끌어내어 지역 유지에게 가서, 천하를 어지럽게하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람들이 (빌립보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야손이 그를 맞아 들였다고고 고발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바울 일행이 황제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고, 대신 다른 임금 예수를 따른다고 으쌰으쌰 고발했다.

지역유지들이 (읍장들) 고발장을 받아들고 어떻게 해야 할 지 정신이 없었으나 (빌립보 소문이 왔다면, 로마시민인 저들을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야손과 믿음의 형제들을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었다. 밤이 되자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 일행을 베뢰아로 보냈다. 거기에서도 바울 일행은 유대인 회당을 먼저 찾아 들어갔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융통성이 있는 (융통성이 있다고 신사적이거나 너그러운 것은 아니겠지만,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사람들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그리고 말씀이 그런가 하여 매일 묵상했다. 역시 유대인 중에도 믿는 사람이 많았고, 또 적지 않은 경건한 (유대교에 입교한) 헬라인과 귀부인들도 믿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이 베뢰아에서 전도하는 줄 알고 베뢰아까지 가서 또 소동을 일으켰다. 믿음의 형제들은 실라와 디모데는 남겨두고 바울을 먼저 바닷가 아덴까지 보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을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실라와 디모데도 속히 (안전하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성령의 바람이 분다. 베뢰아에서 잠시 산들바람으로 불었지만, 빌립보, 데살로니가, 그리고 베뢰아에서 광풍으로 불었다.

사도행전 16:19-40

점집 주인들은 자신들이 여종에게서 귀신이 나가 점을 신통하게 치는 능력을 잃자, 자신들의 밥줄이 끊어졌다고 생각해서 열받아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터 관리들엑 끌어갔다가 상관들 (재판장) 앞으로 데리고 갔다. 점집 주인들은 물질적 손해를 보게 했다는 이유대신 바울과 실라는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고발했다. 아주 자신있게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했다. 군중심리에 모인 무리가 바울과 실라를 함께 고발하니 재판관들이 재판도 하지 않고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하였다. 그런후 옥에 가두고 지키라고 명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다. 발에 착고까지 채워졌다. (그래도 성령의 바람은 불었다.) 한밤중에 매맞은 몸을 추스리고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노래로 기도했다. 이것을 죄수들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가 아니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렸고, 심지어 착고까지 벗겨졌다. 간수는 자다가 깨어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책무를 다하지 못한 문책을 당할까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다. 바울이 크게 소리를 질러 간수의 자결을 막았다. 간수가 등불을 들고 가보니 정말 죄수들이 그대로 있었다. 간수는 이일로 놀라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오히려 엎드리고 옥에서 일단 데리고 나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까 물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간수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전했다. 간수는 그제서야  바울과 실라의 맞은 상처를 씻어주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 음식도 차려 주었다. 간수와 집안 식구 모두가 하나님을 믿어 크게 기뻐하였다.

날이 새어 재판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전했다. 간수는 (기뻐) 바울에게 석방되었으니 평안히 가라고 전했다. 바울이 간수에게 로마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며 말하는 소리를 부하들이 듣고 재판관에게 가서 보고 했다. 재판관들을 바울과 실라가 로마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두려워 바울과 실라에게 와서 정중하게 옥에서 데리고 나와 빌립보를 떠나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 위로하고 떠났다.

‘로마사람’ 로마 속국 (식민지) 빌립보 사람들은 유대인들 앞에서 로마사람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다 바울이 자신이 로마사람이라고 하자 꼼짝을 못한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에 오히려 당한 것이다.

다시 25절로 돌아가서 ‘죄수들이 듣더라’에 주목한다. 기도와 찬양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죄수들이 듣더라고 누가는 포함시킨다. 그리고 이 죄수들은 이후의 사건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옥문이 열리고 모든 착고가 풀렸을 때 (바울과 실라에게만 아니라)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도망갔을까? 그대로 있었을까? 바울은 큰 소리로 간수에게 말해 자결을 막았는데 다른 죄수들의 탈출은…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바울과 실라가 주의 말씀을 전했다고 누가는 기록하는데 ‘그 집’이 감옥이었을 수 있다. 하여간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도를 할 수 있겠는가?

성령의 바람이 분다. 좋은 일로 나뭇가지가 산들산들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때론 광풍도 분다.

사도행전 16:6-18

성령께서 바울일행의 사역에 개입하셨다. 하던 일이라고 성령의 지시에 대한 기대없이 추진하면 성령께서 개입하신다.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지 못하게 하셨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따라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 일행은 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를 거쳐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성령)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무시아에서 드로아로 가야했다. 그날밤 환상이 바울에게 임했다. <마게도니아로 거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환상을 본 바울은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신 일행을 부르신 줄 알고 마게도냐로 건너가기 위해 힘썼다. 바울일행은 (누가 포함, 주어가 우리로 바뀌었다)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 네압볼리를 거쳐 마게도냐 제일 도시인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에 도착했다.

빌립보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바울 일행은 쉬면서 회당을 찾아보았을 것이나 없었던 것 같다. 마게도냐 제일 도시에 회당이 없는 이유는? 안식일이 되자 바울 일행은 기도할 곳을 찾아 성문밖 강가로 가서 거기 모여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곳에는 두아디라에서 건너온 자색옷감 장사 루디아가 있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는데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셨다. 루디아와 그녀의 온 집안이 세례를 받았다. 세례받은 루디아는 바울 일행을 집으로 초청해 믿는자의 교제를 나누며, 자기 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바울 일행이 기도하는 곳에 갈 때, 귀신들린 점쟁이 여종이 바울 일행을 보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 라고 여러날 따라다니며 바울 일행을 괴롭게 하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귀신에게 명하여 여종에게서 나오게 하였다.

선교의 주체는 나의 열심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 15:36-16:5

며칠 후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전에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제안했다. 바나바는 동의했고 마가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말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다. 이 일로 둘은 심히 다투어 갈라섰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바울은 실라를 불러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아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했다. 선교와 전도에 형제들에 대한 심방이 중요함을 배운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속적으로 함께 지어져 가야한다.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갔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곳이다.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라는 제자를 만났다. 믿는 유대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사이에서 태어났다. 디모데는 루스드라뿐 아니라 이웃 이고니온에서도 칭찬받는 제자였다. 바울이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한 이유는? 회당중심 유대인 전도의 걸림돌 제거라는 모범적인 답은 있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왜 누가는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인줄 앎이니라고 안적고 아버지는 헬라인인줄 앎이라고 썼을까? 더군다나 바울과 디모데의 (실라포함) 사역을 여러성에 다니며 예루살렘에서 정한 규례를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무할례자도 주의 은혜로 구원받는다의 본질을 훼손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더군다나 바울이. 무슨 계산이 섰던 것일까? 개인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믿음 안에서 해오던대로만 해도 믿음이 더 굳어지고 믿는 자의 수가 날마다 늘어간다. 그러나 열매가 있다고 하던대로만 해서는 안된다. 미리 흘깃 다음절을 보았다. 결국 성령께서 간섭하신다.

//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경 앱으로 사도행전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50개, 헬라어 프뉴마로 검색하면 67개가 나온다. 성령 대신 거룩한 영으로 번역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뒷부분으로 갈수록 뜸해지기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는 없다. 절묘하게 사도행전 15:36-16:5 로 구분해서 그렇다. 여기에 사도들간의 다툼이 있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다. 내가 뭘 말하려고 하는거지. 음

결론적으로 믿음 안에서 해오던 대로 행하기만 하여도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간다.(16:5) 그러나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으면 다툼도 있고 불필요한? 할례도 행한다.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