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2:11-20

느헤미야 2:11-20 (공동번역)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사명과 예루살렘에 온 목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몇 사람과 밤에 예루살렘을 돌아봤다. 느헤미야는 짐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돌아보았다. 나귀가 지날 수 없는 곳에서는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돌아봤다. 예루살렘 관리들은 느헤미야가 밤에 어디가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몰랐다. 느헤미야가 관리들과 동행하지도 알리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흘이 지나)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돌아본 소감을 말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아서 다시는 남에게 수모받지 않도록 하자고 말했다.

https://quietwaters.blog/2019/03/02/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방문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포로귀환 후에도 여전히 황폐한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 상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아뢴 기도가 사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인 감상에서 나온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서너달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다. 결국 예루살렘을 방문해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느헤미야의 뜻이라기 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도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벽을 살피는데 사흘이면 충분했다. 친척들의 보고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느헤미야의 방문을 언짢아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신중을 기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다시는 남에게 수모를 받지 않도록 하는 일이라고 유대인들에게 독려한다. 느헤미야 개인이 받은 사명을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사명이 되도록 했다. //개인이 받은 사명은 공동체적인 사명과 부합해야 한다. 성도의 사명은 교회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사명으로 교회 공동체가 바로 서기를 기뻐하신다. 그렇다면 나의 사명을 함부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 안에서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느헤미야 2:1-10

느헤미야 2:1-10 (공동번역)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온 형제로부터 소식을 들은 기슬레우월에서 니산월 사이에는 세개의 달이 끼어 있다. 그러니 2장은 서너달이 지난 후의 일이다. 느헤미야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금식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물론 식음을 전폐한 금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 임금도 안색으로부터 느헤미야 마음의 걱정을 알았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모르실리 없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르닥사싸 황제의 입을 빌어 느헤미야의 소원을 묻는다. 느혜미야는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하고 황제의 귀를 통해 유다에 가서 선조들의 뼈가 묻힌 성읍을 다시 세우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소원을 아뢴다. //하나님께서는 황제와 황후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황제는 느헤미야에게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느헤미야는 한 술 더 떠, 황제에게 자신이 가는 일이 공무가 되게 해달라는 친서를 받아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형통하게 해 주신 덕분에 황제가 자신의 청을 들어주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러나 유다에는 느헤미야의 일을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그의 심복 암몬 사람 토비야는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사람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온(왔)다는 소식에 몹시 언짢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느헤미야는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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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1-11

느헤미야 1:1-11 (공동번역)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친척으로부터 예루살렘의 형편을 들은 예레미야는 여러날 금식하며 기도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야훼, 하늘을 내신 하느님이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한결같은 사랑으로 약속을 지켜주시는 높고 두려우신 하느님께 빕니다.” 하고 시작한다. 느헤미야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차 사랑하는 관계다. 느혜미야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언약관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함으로 약속(언약)을 지켜주신다. 기도는 언약관계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대화다. //느헤미야 가문이 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는지 언급이 없다. 예루살렘으로 귀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덜 경건한 가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느헤미야는 6절에서 ‘저와 저의 가문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지만, 이 죄가 꼭 예루살렘으로 귀한하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지을 근거는 전혀없다. 느헤미야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계명과 법규와 명령들을 어긴 것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죄를 지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약속에 따라 그들을 귀환시키시지 않으셨냐고 반문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 간 그들이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돌려보내신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드리는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구한다. 기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귀환한 백성들이 고생하며 수모 받고 있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채 있고 성문들은 불에 탄 채 그냥 그대로 있다는 소식에 대한 응전일 것이다. 다시말해 포로귀환은 했지만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미뤄지는 것에 대한 기도일 것이다. //기도는 약속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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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1-11

데살로니가전서 5:1-11 (공동번역) 읽기

1-2 주님이 다시 오실 날에 대해서는 쓸 필요가 없다. 그날은 도둑 같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4 그 날은 태평세월을 노래할 때 갑자기 들이닥칠 것이다. 그날은 해산할 여자에게 닥치는 진통과 같아서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빛 가운데 사는 성도들에게는 그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 않을 것이다. 5-6 성도들은 빛의 자녀요 대낮에 다니기 때문이고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둠에 속한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으면 안 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7-8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속한 사람들이요 밤에 술을 마시고 취한 자들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가슴을 무장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써야한다. 9-11 하느님은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도록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미 하고 있는 그래도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도둑 같이 올 것이다. 그런데 빛가운데 사는 성도들에게는 도둑 같이 오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가르친다. 그 날과 시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임마누엘을 누리기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성도들은 빛의 자녀다. 빛 가운데 거한다. 대낮에 다닌다. 반면 어둠에 속한 사람들도 있다. 빛을 모르기 때문에 술취하고 만다. 방탕하다. 빛의 자녀라면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성도가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다. 성도가 서로 격려하며 협력하여 완주해야 할 길이다. 성령충만을 구해야 할 이유다.

**성도는 깨어 있든지 자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이미 죽은 성도도, 아직 살아 있는 성도도 주와 함께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삶이다. 임마누엘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죽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고, 살아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천국이다. 성도의 죽음이 슬픔이 아닌 이유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그날을 소망하며, 성도는 서로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워야 한다. 나 혼자만의 천국은 없다.

데살로니가전서 4:1-18

데살로니가전서 4:1-18 (공동번역) 읽기

1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들에게 배우고 살고 있는 대로 앞으로도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라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권고한다. 2 바울 일행이 주 예수의 권위로 가르친 것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3 (요약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음행을 피하고 4 각각 존경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아내의 몸을 대하고 5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도들처럼 욕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6 음행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가차없이 처벌하실 범죄로 알아야 한다. 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음탕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다. 8 이 경고를 거역하는 것은 사람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9-10 교우를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는 더 쓸것이 없을 정도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교훈을 받고 잘 실천하고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온 지방의 교우들까지도 사랑하고 있다 칭찬하며,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고한다. 11-12 조용히 (자랑하지 않고) 살도록 힘쓰며, 자기 손으로 일해서 살아가라. 그래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존경을 받게 되고 남에세 신세를 지지 않게 될 것이다.
13-18 죽은 사람에 관해서,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말한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천국에 갈
것이다. 주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실 때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슬퍼하지 말고 위로하라.

//바울 일행의 마지막 권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는 당부다. //특별히 조용히 살라고 하신다. 수고해서 살라고 하신다. 조용히 산다는 것은 좋은 집, 큰 집, 명품들로 자랑질 하지 말라는 의미로 적용해 본다. 수고해서 살라는 말씀은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라느 뜻으로 적용한다. 이런 검소하고 수고하는 삶이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화려한 교회당이 아니라 검소한 교회 수고하여 이웃을 돕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죽음에 대해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과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야 함을 말한다.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에 영원히 참여하는 자들이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한 몸에 참여한다. 이렇듯 사별의 슬픔은 연합의 소망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것이 위로가 된다. 인지상정으로는 쉽지 않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구하게 된다.

https://quietwaters.blog/2022/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