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19:1-21

신명기 19:1-21

1-7 하나님이 그 땅의 원주민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쫓아내어, 그 성읍과 집에서 살게 될 때, 모든 살인자가 피신할 수 있는 성읍 셋을 따로 구별하라고 하신다. 모든 살인자가 피신할 수 있으나, 모든 살인자가 살 수 있는 경우는 아니다. 살 수 있는 경우는 1) 미워한 일이 없는 이웃을 뜻하지 않게 죽인 경우 2) 과실치사한 경우 뿐이다. 도피성은 이렇게 실수로 이웃을 죽게 한 경우 자기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곳이므로 거리가 너무 멀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세 성읍을 따로 떼어 놓아 모든 성읍으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있어야 한다.

8-10 약속의 땅 전부를 차지하게 되면 세 성읍에 또 다른 세 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세우라고 하신다. (동편 3곳에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 그곳에 3곳으로 총 6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이 살인되를 지고 죽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죄없는 사람이 살인죄를 지고 죽으면 그 책임이 공동체에 있다고 하신다.

11-13 그러나 고의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신하면, 그가 살던 성읍의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도피성에서 그를 붙잡아와 사형시켜야 한다. 고의로 살인을 한 자에게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죄 없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만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14 하나님이 유산을 주신 땅의 경계선을 옮기지 말라고 하신다.

15-21 재판할 때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판결해서는 안된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확정할 수 있다. 거짓증언을 사람은 그 증인이 이웃을 해치려고 마음 먹었던 대로 그 이웃에게 갚아 주어야 한다. 그래서 거짓증언의 악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두려워서라도 이런  악한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런 악한 일에는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목숨에는 목숨,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발에는 발로 갚으라고 하신다.

//도피성은 사람의 생명이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래서 실수로 살인한 사람은 살리고, 고의로 살인한 사람에게는 도피성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법’은 (동해복수법은) 잔인한 법이 아니라 생명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교훈하는 법이다. //죄 없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만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역으로 말하면 죄있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복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신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를 도피성 삼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해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목숨에는 목숨으로’의 법을 타인에 대해서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방향으로 사용해야 한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살인이 무엇인지 재정의해 주셨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셨다. 이웃을 해치려는 거짓증언도 당연히 살인에 해당 된다. 탐욕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땅따먹기’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 안에 있어야 이런 악한 일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말씀을 마음에 품어야 한다. 

신명기 18:15-22

신명기 18:15-22

다시 신명기 말씀으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과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워주실 것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모세를 세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게 하셨다. 이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워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주님의 벌을 받게 될 것이요, 이 예언자가 주님께서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은 제멋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일컫는다면 그 또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는 일의 결과로 알 수 있다. 말씀의 성취도 없는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함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함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모세와 같은 역할이 중요하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 말씀이 있고, 성서 말씀을 깨닫게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라면 누구나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임마누엘!

https://quietwaters.blog/2018/06/04

마가복음 16:1-20

마가복음 16:1-20

1-8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사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에 이른 새벽에 예수의 시신을 장례한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누가 굴려 치워줄지 걱정하며 무덤으로 갔는데, 벌써 그 큰 돌이 굴려져 있었다. 무덤 안에 들어간 그들은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있어 놀랐다. 청년은 그들이 찾는 예수가 살아나셨고 여기 없으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하신 말씀대로 거기서 주님을 만나 뵈라고 전하라고 했다. 몹시 놀란 여자들은 무덤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9-16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다. 마리아는 슬퍼하며 울고 있는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 살아나신 예수를 보았고 예수께서 정녕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렸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 중에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났다. 두 사람도 돌아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지만 역시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 나타나셔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17-20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고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제자들은 나가 두루 복음을 전파했다. 주께서 함께 역사하셔서 그들이 말씀대로 확실한 표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빈무덤=부활 공식은 쉽게 믿을 수 없다. 여자들은 빈무덤을 보고도, 빈무덤에서 청년이(천사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고 예수께서 갈리리로 먼저 가시겠다는 말을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말을 듣고도 믿음보다는 놀람/두려움에 지배당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9-20절의 에필로그가 붙어있다. 에필로그는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시골로(아마도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그리고 식사하는 제자들에게 친히 부활의 몸을 보여주셨다고 증언한다. 복음전파는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친다. 복음증거에 따르는 표징, 임마누엘의 표징이 무엇인지 덧붙인다.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제자들이 변한 이유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예수의 부활을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들은 더 복된 자들이다.  

마가복음 15:33-47

마가복음 15:33-47

정오, 하루중 가장 밝아야 할 때,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시까지 계속되었다. 세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부르짖으셨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해 줄 엘리야를 찾는다고 수군거렸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 신포도주를 마시게 하면서 과연 엘리야가 와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주는지 두고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셨다.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예수를 마주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고말했다. 여자들은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이들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도 있었다. 이들은 갈릴리부터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많은 여자들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왔다.

날이 저물었다. 안식일 전날이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했다. 그는 의회 의원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벌써 죽을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백부방을 불러서 예수가 죽었는지 물어보았다. 빌라도는 백부장의 보고를 듣고 예수의 시신을 요셉에게 주었다. 요셉은 삼베로 예수의 시신을 싸서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놓았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는 것을 지켜 보았다.

//예수님을 엘리야보다 크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야는 아합과 맞짱을 떠서 이겼었지만, 예수는 수많은 이적에도 권력에 대항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렸지만, 예수는 하늘에서 직접 뭔가를 내려오는 표징을 보이지는 못했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구했지만, 예수께서는 기록된 말씀의 성취로 일관하셨다. 기록된 말씀이면 족하다.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를 마주보고 서있던 백부장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까지는 고백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대신 ‘의인’으로 번역한다. 이방인에게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생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부방은 예수에게서 죽음을 초월한 그 무엇을 보았을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 아리마대 사람 요셉. 요셉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다른 복음서에서는 요셉을 예수의 드러나지 않은 제자로 본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예수를 주로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아도 제자라고 인정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중요한 것은 복음에 합당한 삶이다. 의원이었고 부자였던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기득권을 누리지 않았다고 보면된다. 그가 예수가 죽은 마당에 기득권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의 시신을 거두었다는 것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멀찍이 서서라도 예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여인들. 예수의 시신이 어디에 장사되는지까지 놓치지 않았다. 갈릴리부터 예수를 따랐다고 마가는 기록한다. 예수와 동행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목도해야 하는 열두 사도 보선의 후보자 조건을 갖췄다.

https://quietwaters.blog/2020/04/11

마가복음 15:16-32

마가복음 15:16-32

16-20 예수께서는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병사들은 예수를 총독 공관 안 뜰로 끌고갔다. 그곳에서 온 부대를 집합시키고 예수께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웠다. 온 부대가 ‘유대인의 왕 만세!’를 외치며 비아냥 거렸다.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 예수께 거짓 경배를 하며 희롱했다. 그리고 자색옷을 다시 벗기고 그의 옷을 도로 입힌 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21-27  골고다로 가는 길에 어떤 시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병사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다. 그들은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드렸지만 예수께서는 받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제비 뽑아 예수의 옷을 나눠가졌다. 그때가 아침 아홉시였다. 그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 이라고 적혀 있었다. 병사들은 예수와 함께 강도 두 사람도 십자가에 못박아 예수님 좌우에 달았다.

29-32 골고다에 온 사람들은 예수를 모욕하며 말했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짓겠다던 사람이면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희롱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함께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남은 어떻게 구원하겠느냐며 조롱했다. 그들은 예수를보고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하고 말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예수를 욕하였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 성경은 보통 사람을 수식할 때 누구의 아들 누구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구레네 사람 시몬은 다르다. 누구의 아버지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다. 마가복음의 첫 독자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은 몰라도 알렉산더와 루포를 잘 알았던 모양이다. (얼마전까지 사람들은 이정후를 바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제는 이종법은 1500억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자녀들이 잘 되면 부모가 자녀의 그늘에 들어간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믿음의 가정에서 자녀의 믿음이 부모의 믿음보다 더 크다고 인정 받으면 할렐루야다. 나의 자녀로 노엽게 하지 않고 말씀과 훈계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한 열매일 것이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두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예수님처럼 나를 구원하는 것보다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썩는 길을 택하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자꾸 내가 흥해야 예수가 흥할 수 있다고 말을 한다. 아니다. 예수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죽어야) 한다. //마가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예수를 욕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누가는 한 편 강도는 예수를 모욕하는 다른 편 강도를 꾸짖고 예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하지 않았던가? 십자가 사건을 기록한 복음서 저자들의 차이는 이래저래 있으니 누구의 기록이 옳은지 따지는 것 보다 마가가 강조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싶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을 말하면서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 어디에서도 의로운 자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이방 군인들과 행악자 둘은  그렇다쳐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했을 지나가던 사람들, 유대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반전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바라볼 때 일어날 것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0/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