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33:50-34:29

민수기 33:50-34:29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다 몰아내고, 그들이 새긴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주하라고 명하신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소유로 등기이전 시키신 분이 주님이시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나서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 나누라고 하신다.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지 않으면 사는 동안 기존 세입자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아니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존 세입자와 같은 취급을 하시겠다 경고하신다. 주님은 모세에게 약속의 땅 지경을 분명하게 정해주신다. 이 경계 안의 땅을 요단 동편에서 땅을 분배받은 갓 자손, 르우벤 자손, 므낫세 자손의 절반을 제외한 아홉지파 반에게 분배하라고 하신다. 땅의 분배는 아론 이은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이 둘을 도와 땅을 분배할 각 지파의 지도자를 뽑아주셨다. 유다지파 갈렙의 이름이 가장 먼저 언급된다. 지도자의 이름은 제비뽑힌 순서대로 나열된 것 같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거룩한 땅이 아니다. 거룩하게 해야 할 땅이다. 이전 세입자의 흔적을 지워햐 할 땅이다. 마치 야곱의 가족들이 기근을 피해 요셉 있는 이집트에 갔을 때처럼, 이전 세입자들의 도움을 받으면 새로운 땅에 거주하는데 더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명령하신다. 그들과 섞이면 그들처럼 대하겠다고 하신다. 결국 그들처럼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약속의 땅은 모호한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주님은 분명하게 동서남북 사방의 경계를 정해주셨다. 두지파 반에게 분배한 요단 동편 땅은 포함되지 않았다. 구약시대에는 지리적 약속의 땅이 주님의 백성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정해진 곳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도가 거주하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다. //땅의 분배는 차세대 지도자들에게 주어졌다. 내 때에 모든 것을 마무리하려고 무리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대를 잇게 하신다. 아론에게서 엘르아살로, 모세에게서 여호수아로 믿음의 대를 잇게 하신다. 유독 유다지파만 여전히 갈렙이 지도자로 이름을 올렸다. 유다지파에서는 갈렙보다 약속의 땅을 더 잘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주님은 차세대 지도자를 나이로 결정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민수기 33:1-49

민수기 33:1-49

모세는 주님의 명에 따라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에서 머물렀는지 기록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난, 곧 첫번째 유월절 다음날 부터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던 곳을 기록했다.
[라암셋-숙곳-에담-(비하히롯- 바알스본)-믹돌부근- 바닷길-마라-엘림-홍해부근-신광야-돕가-알루스-르비딤-시내광야-기브롯핫다아와-하세롯-릿마-림몬베레스-립나-릿사-그헬라다-세셀 산-하라다-막헬롯-다핫-데라-밋가-하스모나-모세롯-브네야아간-홀하깃갓-욧바다-아브로나-에시온게벨-신광야의 가데스-에돔땅 국경 호르 산]
호르산에서 제사장 아론이 죽었다. 그 때는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지 사십년 되던 해 다섯째 달 초하루였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을 때의 나이는 백이십삼세였다.
[호르산-살모나-부논-오봇-모압국경지대 이예아바림-디본갓-알몬디블라다임-느보 앞 아바림 산-(벳여시못에서부터 아벨싯딤까지)여리고 부근 모압평지]

//친숙한 지명도 있고, 여전히 낯선 지명도 있다. 가나안 1세대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후 몇 세대까지는 지명만 들어도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줄줄이 꿰고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광야일지를 작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성막이후 광야에서 이스라엘 진영이 구름기둥을 보고 진을 치거나 행군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호르산까지 진을 친 곳이 스무 곳정도 되니, 한 곳에 평균 2년 정도 머물렀다는 계산이 나온다. 광야라도 안주하고 싶은 곳이 있었을 것이고, 때론 빨리 떠나고 싶은 곳도 있었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형편의 주인이 되어 주셨다. 같은 길을 걸었어도 불순종의 세대에게는 죽음의 길이었고, 순종의 사람들에게는 소망의 길이었다. – 이 땅의 길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길을 걸을 것인가? 순종함으로 소망의 길을 걸으라고 하신다.

민수기 32:20-42

민수기 32:20-42

모세는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에게 그들의 약속대로 무장을 하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이 정복될 때까지 주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면 요단 동편의 땅이 주님 앞에서 르우벤과 갓지파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일 약속대로 하지 않으면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며,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모세는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 가족들을 보호할 성을 쌓고, 가축을 가둘 우리를 만들고 약속대로 실행하라고 말했다.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모세에게, 모세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가족들과 가축 떼는 길르앗 여러 성읍에 남고, 남자들은 무장하고 요단강을 건너가 주님 앞에서 싸우겠다고 약속을 했다. 모세는 제자장 엘르아살과 후계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무장을 하고 요단강을 건너가 주님 앞에서 싸우면, 약속의 땅이 정복되는 날,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주라고 명령했다.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모세의 명령대로 하겠다고 다시 약속했다. 무자을 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가서 함께 싸우겠지만 요단강 동쪽에서만 땅을 차지하겠다고 말했다.
므낫세 자손의 절반도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함께 하기로 했다. 모세는 이들에게 아모리 시혼 왕국과 바산의 옥 왕국을 주었다. 므낫세 자손은 길르앗에 있던 아모리 사람을 포로로 잡기도 하고 내쫓아 버리고 그 땅을 차지하고 정착했다.

//요단 동쪽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자손 절반에게 분배되었다. 지금까지의 흐름과 다르게 모세는 요단 동편의 분배에 관하여 일절 주님께 묻지 않았다. 요단 동편의 분배는 모세의 명령이라고 강조된다. 더 이상 주님께 묻지 않아도 될만큼 모세는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므라바 사건에서 보았듯이 아무리 모세라 하여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할 만큼 믿음이 없기도 하지 않았던가? 한편으로는 그 사건 이후 모세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눈을 뜬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절반에게 요단 동편의 땅을 분배함으로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오히려 가나안 정복의 선봉꾼을 얻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결속을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모세의 결정은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성경은 어느새 르우벤과 갓 지파를 언급하는 순서를 바꿨다. 갓 자손을 먼저 언급한다. 요단 동쪽에 남자고 적극적으로 주도한 지파가 갓 자손이라는 암시일까? 하여간 두 지파는 요단 동쪽에서만 땅을 차지하겠다고 마지막까지 맹세했다. 모세가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명령을 내릴 때, 갓 가손과 르우벤 자손이 무장을 하고 요단 강을 건너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서 함께 재산을 받게 하라고 명령했음에도 약속의 땅에 대해서 조금의 미련도 갖지 않았다.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싸움의 수고를 하면서까지 자녀 세대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현세의 평안을 주고자 내린 부모세대의 결정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아쉽다.
//므낫세 자손의 절반이 갓과 르우벤 자손들의 길을 따른다. 마길과 야일이 요단 동편에서 길르앗을 쳐서 빼앗고 아모리 사람을 쫓아내고 모세로부터 그 땅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주님께 허락받지 않은 싸움으로 땅을 차지했는데, 과연 옳은 방법인지 또 물음표를 붙여본다. –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 이 땅에서의 평안을 위해 싸우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까?

https://quietwaters.blog/2017/08/18/

민수기 32:1-19

민수기 32:1-19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가축의 떼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 두 지파의 인구가 다른 지파에 비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두 지파를 합하여도 유다 지파 보다 만명도 더 많지 않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얻는 전리품 중 가축이 많았어도, 어차피 모든 지파가 골고루 분배 받았으니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가축의 떼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던 이유는 될 수 없다. 하여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가축을 치기에 적당한 요단 동쪽에 머물고 싶다고 모세와 엘르에셀과 회중의 대표들에게 요청했다. 이 두지파에게 가축이 많았다기 보다는 이 두 지파에게 가축을 기르는 노하우가 있었다고 보는게 맞겠다. 요단 동쪽이 가축 기르기에 좋은 땅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모세의 첫 반응은 당연히 반대였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거부하는 두 지파에게 사십년 전의 일을 상기시킨다. 열 정탐꾼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는 회중의 사기를 꺾는 행동이라고 책망했다. 그래서 주님의 진노로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게 되었다고 말했다. 모세는 이번에는 주님께서 더욱더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광야에서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책임을 두 지파가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냥 물러날 두지파가 아니었다. 두 지파는 먼저 가축우리와 가족이 머물 성읍을 만든 후에 (부모세대가 희생해서라도 자녀들에게 좋은 땅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가나안 땅 정복의 선발대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 받을 몫을 차지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요단 강 서쪽에서는 땅을 재산으로 분배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요단 강 서쪽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면, 요단 강 동쪽은 푸른 초장이요 쉴만한 물가였나 보다. 특별히 낙농에 관심이 있었던 르우벤과 갓에게는 좋은 땅이었던 모양이다.
//르우벤 지파는 장자였으나, 장자권을 잃었다. 둘째 시므온 지파는 브올에서의 음행으로 작은 지파가 되었다. 세째 레위지파는 제사장 가문이 되었다. 그리고 네째 유다 지파가 지도권을 쥐었으니… 가나안에 들어가도 지도적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머니 레아의 종 실바에게서 태어난 갓 자손과 함께 요단 동편에 남기를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모세는 주님의 약속과 사십년 전을 들먹이며 협박조로 나가지만, 르우벤과 갓 지파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협박이 통할리 없다. 자녀들에게는 더욱 그런 것 같다. 부모가 지는게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그러니 자녀들에게 처음부터 협박조로 나가지 말자.
//르우벤과 갓은 자녀들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주님의 약속보다 자녀들을 더 사랑했다고나 할까? 자기 시대를 희생하면서까지 자녀 세대에는 더 풍족히 살았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을까? 그러나 자녀 세대의 풍족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세상은 그렇게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 성도는 달라야 한다. 당장 보이는 풍족함을 따르기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동고동락해야 한다.

민수기 31:25-54

민수기 31:25-54

전리품 분배는 싸움에 나간 사람들이 절반, 그리고 진영에 머물렀던 회중이 절반을 나눠 갖는다. 싸움에 나간 사람들의 몫에서 1/500을 제사장 엘르아살의 가문에게로, 그리고 회중의 몫에서 1/50을 레위 자손의 몫으로 돌린다.
놀라운 것은 전쟁에 나간 이스라엘 군인은 한 명도 실종되지 않았다. 다친 군인은 있을지언정 전사자는 없었다는 의미다. 전쟁에 나갔던 지휘관들은 전리품 분배외에 전원 무사귀환에 감사하는 예물을 따로 드렸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런데 자신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님 앞에 속죄하려고 바쳤다고 하니, 이들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포로로 잡혀 온 여자들이 삼만 이천 명이나 되었다. 시므온 지파의 20세 이상 남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이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 분배되어 그들의 종이 되었을 것이나,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하여 회중의 일원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이스라엘 공동체는 단일 혈통이 아니다. 주님의 백성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포로로 잡혀 왔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게 복이 되었다.
////나는 왜 헌물을 드리는가? 소득에 대한 감사인가? 건강에 대한 감사인가? 자녀에 대한 감사인가? 근본적으로 나의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