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37-22:11

성밖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했던 (바울은 로마 군사들에게 들려서 영내로 향했다. 군부대로 들어가려고 할 때 바울은 기절에서 깨어나서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을 했다. 천부장은 바울이 헬라말 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천부장은 (피투성이가 된) 바울을 이전에 소요를 일으켰다 도망쳤던 애굽인이 다시 와서 소동하였던 것으로 착각했었던 모양이다. 바울은 자신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라는 큰 도시의 (로마) 시민이라고 말하고 천부장에게 발언권을 요청했다. 천부장의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을 소동케 했던 애굽인을 잡아 넣으려다, 하마터면 로마시민을 잘못 건드려버린 셈이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허락했고 바울은 높은 곳에 서서 백성을 잠잠케 한 후 히브리 말로 말하기 시작했다.

  • 나의 변론을 들으라 (히브리 말로 말하니 더 조용해졌다. 그러니 무리중에도 군중 심리에 바울을 애굽인으로 착각하고 따라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일수도 있다.)
  •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와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과 율법의 교훈을 배운 전통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사람들을 옥에 넘겼다. 대제사장들과 모든 장로들을 증인으로 채택할 수 있다. 그들은 내가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는 공문까지 써 주었다.
  • 내가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 시간으로 오정쯤 되었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려 비쳤다. 나는 땅에 엎드려졌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 물었고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는 답을 들었다. 나와 함께 있는 자들도 빛을 보았으나 (소리도 들었으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 나는 주님께 무엇을 해야 할 지 물었고 주께서는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알려줄 것이라고 하셨다.
  • 나는 큰 빛의 광채로 인하여 눈이 멀어서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나를 끌고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헬라어와 히브리어, 유대혈통과 로마시민권, 로마 군사들에게 들려서 영내로 가던 바울이 눈이 멀어 동행하던 사람들에게 끌려서 다메섹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  성전이 아닌 이방 군부대가 오히려 바울에게는 안전지대가 되는 등 대조적인 이미지가 다양하게 떠오르는 아침이다. 그런데  이 모든 대조가 복음증거라는 한 곳을 향해 나아감을 느낀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오히려 다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때 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다 똑같기를 바라지 말자. 나의 간증을 써봐야 겠다.

+++

유대인 혈통 바울이 성전에서 잡혀 성밖에서 돌을 맞고 의식을 잃어 군사들이 군부대 (영내)로 들려가다가,  의식이 깨어나 길리기아 다소 로마 시민이 되어 헬라말로 천부장에게 말해 (바울을 애굽인으로 착각한 천부장으로부터) 백성들에게 변론 할 기회를 얻어,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들에게 다시 히브리 말로 변론하기 시작했다. 정체성 혼돈이다. 천부장에게 바울은 외모로는 애굽인, 언어로는 헬라인, 그리고 혈통적으로 다시 유대인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행 21:37:22:11)

다양한 색들의 스팩트럼이 모여져 밝은 빛을 낸다. 각각의 ‘다름’들이 모여 하나의 ‘빛’이 된다.  나의 정체성도 프리즘을 통해보면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지체들도 마찬가지다. 편광렌즈를 끼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그리스도라는 편광 프리즘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되었음을 드러내야 한다.

사도행전 21:27-36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오해를 풀기위해 결례를 받을 네 사람을 성전으로 데려가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했다. 일주일 동안 결례의식을 마치는 날 아시아에서 (바울이 복음 전하던 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바울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 전하며 ) 유대인과 율법과 성전을 비방했고, 지금도 헬라인(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 더럽혔다고 무리를 충동질하였다. (바울이 에베소 사람을 시내에서 만나는 것을 보고 그 에베소 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오해한 까닭이었다.)

군중심리는 사람을 무지하게 한다. 소동을 일으킨 무리는 바울을 잡아 성 밖으로 끌고가 마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듯이 죽이려고 했다. 한편으로 소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예루살렘 치안을 맡고있던 천부장이 군인들과 백부장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군중들은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쳤다.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하고 어찌됨이냐 하고 물었다. 무리들은 천부장이 바울을 심문하자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천부장은 어수선한 분위기로 심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군부대로 바울을 이송했다. 무리들은 뒤따르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다.

오해를 사람의 지혜로 풀려고 하면 새로운 오해가 꼬리를 문다. 물론 주님은 사람의 연약함도 성령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신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했다. 환난을 당했다. 천부장에 의해 결박을 당함으로 오히려 바울의 생명은 보호 받았다. 역설적으로 결박과 환난이 생명의 길이다.

사도행전 21:17-26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형제들은 바울 일행을 기쁘게 맞아주었다. 도착 다음 날,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을 만나 문안하고 사역 보고를 했다.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은 바울의 선교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야고보와 장로들은 수 많은 유대인 형제들이 아직 율법을 열성적으로 지키는데,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모세 율법을 배반하고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고 알고 있어서, 바울에게 적대적이니 어찌할꼬 하며, 서원한 사람 네명의 결례를 행하고 그 비용을 대신 지불하여 유대인 형제들에게 율법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이라고 권면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다시한번 언급했다. (이방인에게 유대 관습을 존중해 달라고 편지했었듯이, 바울에게 유대 관습, 율법도 존중하라는 압박이었을까?)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의 권면을 따라 결례를 행했다.

바울이 (잠시나마) 무너졌다. 아니, 야고보와 장로들도 무너졌다. 가래로도 못막을 일을 호미로 막으려했다. 이번 기회에 예루살렘 교회는 첫 회의 결정을 다시한번 공고히 해야 할 기회로 삼아야 했다. 예루살렘 형제들 중에는 바울 일행을 기꺼이 맞아준 사람들이 있었다 (17). 바울은 자기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셨다고 낱낱이 보고했고 야고보와 장로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9,20). 그렇다면 야고보와 장로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첫 결정이 잘못된 결정이 아니라 바른 결정이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음을 선전해야 했다. 유대인 형제들을 바로 가르칠 기회였다. 물론 바울 자신은 겸손하게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원리를 적용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방 전도의 선구자적 위치에서는 따르지 말아야 할 권면이었다.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이렇게 그냥 덮지 않으실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를 (문화와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일방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한가지 원칙이 있다면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된 자들을 더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갇혀 땅끝에서 (지리적인 땅끝보다, 문화적 사회적 땅 끝)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생생한 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지리적 땅 끝에와서 사는 엠들도 문화적 사회적 땅 끝을 인식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수가 많다. 하물며 파송 교회는 어떨지 뻔하다. 노래(ㄱㄷ)해야 한다.

사도행전 21:1-16

고스-로도-바다라-두로에 상륙. 드디어 수리아에 도착. (안디옥에 들릴 겨를도 없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두로의 제자들을 찾아 일주일 머물며 교제했다. 두로의 제자들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결박과 환난을 성령의 감동으로 보고 바울을 말렸다. 두로의 제자들과 그들의 가족과의 헤어짐도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헤어지듯) 함께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재촉되었다. 두로에서 돌레마이로 배를 타고 내려가 그곳 형제들과 하루라도 교제한 후 다음 날 가이사랴에 도착했다.

가이사랴에는 일곱(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서 머물렀다. 빌립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딸이 네명 있었는데 모두 결혼하지 않았다. (예언의 은사는 주로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와 연결된다. 네 딸로 빌립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처녀라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았다는 기록이 본문에 없다는 것이 새롭다.)

빌립의 집에 머무는 동안 유대로부터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왔다. 아가보 역시 성령의 감동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고 예언했다. 드디어 우리(바울 일행)도 그곳사람들과 더불어 (빌립의 네 딸도 포함되었을까?)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울며 권면했다. 바울은 어찌하여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대답했다. 결박도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함이요, 죽음도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각오되었다고 하였다. 바울 일행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기도하고 더 이상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정에 가이사랴 제자 몇 명과, 구브로 사람 나손이 동행했다.

성령의 인도는 모순이 아니다. 바울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명하시고, 주변의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명하시지 않았다. 성령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 하셨고 주변의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에 간 바울이 결박과 환난 당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니 바울은 성령의 지시함애 따라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했으면 더 이상 내 뜻을 주장해서는 안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했으면 주의 뜻을 따르면 된다. 그런데 이게 어렵다. 내안에 사는게 그리스도가 아니라서 그렇다. 바울과 일행 안에는 그리스도가 사셨다. ‘내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하니라’ 라는 바울의 고백을 찬양으로 불러본다.

사도행전 20:28-38

바울은 이제 에베소 장로들을 주목한다. 에베소 지도자들에게 자신과 양떼를 위하여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지도자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고 말한다. 감독자라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펴야 한다고 말하면서 두가지 교회를 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첫째가 외부의 적이다. 연약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는 이리다. 두번째는 내부의 적이다. 지도자 중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자기 제자를 만드는 사람이다. 양떼를 위하여 조심하고, 자신을 위하여 조심해야 할 이유다.

바울은 조심하는 방법을 자신의 사역에 비춰 알려준다. 첫째가 눈물이다. 바울은 삼년이나 (에베소에서 2년 이상 사역하면서)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던 것을 기억하라고 한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다. 비딱하게 나가는 장성한 자녀를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라고 울면서 애원하는 부모의 모습이 연상된다. 지도자의 권위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다. 울음이다.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둘째는 말씀이다. 바울은 말씀을 ‘주와 및 은혜’의 말씀이라고 꾸몄다. 이 말씀을 가져야 눈물로 훈계할 수 있다. 말씀으로 지도자의 역량을 갖추라고 한다. 선생된 자는 조심해야 한다. 남을 가르치다 본인이 정작 몸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기 쉽기 때문이다.

특별히 ‘자기상을 이미 받았다’라는 책망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도 가르친다. 바울은 특별히 물질적인 탐심을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자신을 본 받아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충당하고, 또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도와 주라고 권면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사랑의 원리를 기억하라고 하였다.

쉽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와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함께 기도 했다. 다 크게 울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라는 말을 또 떠올리게 한다. 바울이 배에 오르기까지 악수하고 허그하고 키스하고…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한장 한장 얹어 놓듯 지체들이 서로 한 몸을 이루는 장면이 연상된다. 그러나 육신이 어찌 연결될 수 있으랴. 오직 성령에 매여야 한다. 성령에 매여야 한다. 육신을 생각하면 근심이나 하나님나라는 (성령에 매여) 의와 희락과 화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