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1-16 읽기

1-12 바울 일행은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를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이 알고 있다고 입을 연다. 바울 일행은 빌리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박해 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에게 전했다. 바울 일행은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마음이나 속임수로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에게 권면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 검정받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을 전했다. 사람의 환심을 살 필요가 없었다. 대신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복음을 전했다.

바울 일행은 항상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탐욕을 부리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증인이라고 담대히 말한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에게서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물론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데살로니가 성도 가운데서 유순하게 처신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주었고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 줄 생각이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에게 자신들의 수고와 고생을 상기시킨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다. 바울 일행은 경건하고 올바르고 흠 잡힐 데가 없도록 처신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도 하나님께서도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바울 일행은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데살로니가 성도 하나하나를 대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권면하고 격려하고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13-16 바울 일행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는 이유를, 데살로니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앋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 가운데서 살아 움직인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사람이다. 유대에 있는 성도가 유대 사람에게서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이 데살로니가 성도도 데살로니가 사람에게서 똑같은 고난을 받았다. 유대 사람은 주 예수와 예언자를 죽이고 성도를 내쫓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적대자가 되었다. 유대 사람은 바울 일행이 이방 사람에게 말씀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일까지도 방해한다. 자기들의 죄의 분량을 채운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렀다.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7/02/

////바울 일행은 그리스도의 사도이나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는 대신 온유한 어머니가 자녀을 양육하듯 일했다고 강조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해서 단순히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한다고 말한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신들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하듯이 자신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한 수고와 애씀을 기억해 달라고 당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편지한다.

////바울은 자신들의 사역을 첫번재로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었다’라고 평가한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 증거, 그 증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도 증인이 되신다고, 하나님도 알고계신다고 편지한다. 바울은 두번째로 자신들의 사역을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는 권면과 위로와 경계’ 였다고 평가한다.  바울은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과 위로와 경계로 가르쳤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친히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게) 행하게 하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요약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 일행의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계로 세워졌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일행이 떠난 후에도) 그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계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1-10 읽기

발신자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수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사람의 교회

문안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를 생각하면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기도시간에 데살로니가 성도를 기억한다. 데살로니가 성도가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며 인내하고 있음을 기억한다. 이러니 바울 일행이 보기에도 데살로니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자매들이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성도를 택하셨다는 것을 그들의 삶에서 알 수 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했다. 바울 일행은 복음에 합당하게 처신했고, 데살로니가 성도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데살로니가 성도는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고 바울 일행과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모범이 되었다. 주님의 말씀은 복음에 합당한 처신을 행한 데살로니가 성도로부터 각처에 두루 퍼졌다.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젇도로 하나님을 향한 데살로니가 성도는 믿음이 있었다. 사람들은 바울 일행에게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바울 일행을 영접했는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는지 소식을 전했다.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 장차 내릴 진노에서 성도를 건져 주실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어떻게 기다리는지 바울 일행에게 알려줬다.

//믿음의 행위는 믿음에 따라 행한 일이다. 개역개정에서는 믿음의 역사로 번역하는데 믿음이 한 일을 뜻한다. 믿음은 믿고 안 믿고 아니라, 믿음의 결과/열매로 드러나는 삶이다. //사랑의 수고는 사랑의 노력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라도 용서하는 삶이다. //소망의 인내 역시, 소망은 인내를 통해 열매 맺음을 전제로 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데살로니가 성도는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복음을 전해 준 바울 일행과 같이 복음에 합당한 처신을 한 것이다. //성도가 나눌 간증의 핵심은 1) 주님을 어떻게 영접했는지, 2) 영접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왔는지, 3)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그리고 4) 다시오실 주님을 어떻게 기다리는지, 이 네가지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다. 바울 일행도 데살로니가 성도도 복수다. 성도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이 믿음을 나누는 공동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자매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능력이다. 복음에 합당하게 처신하라!

https://quietwatersweb.wordpress.com/2019/07/01/

레위기 27:16-34

“주에게 바친 사람도 다시 무를 수 없다. 그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29)

//주께 바쳐 가장 거룩한 것이 되었을 때에는 팔거나 무르거나 할 수 없다. 주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이상 나의 생명조차 나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는 주님의 것이다. 베드로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고 성도의 정체성을 정리한다.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고 성도의 삶을 정리한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소유로 무를 수 없다. (무르려고 하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다.)  무를 수 없는 인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라고 하신다.  

레위기 27:1-15

1-8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셨다. 주께 드리기로 서약한 사람의 값을 돈으로 환산하여 드릴 때 스무 살부터 예순 살까지의 남자는 은 오십 세겔이고 여자는 은 삼십 세겔이다. 다섯 살부터 스무살까지 남자는 이십 세겔, 여자는 은 십 세겔이다. 난 지 한 달 된 아이부터 다섯 살까지는 남자는 오 세겔, 여자는 은 삼 세겔이다. 예순이 넘은 남자는 은 십오 세겔, 여자는 십 세겔이다. 서약한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정한 값을 내지 못할 경우에는 제사장이 서약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값을 정해 준다.

9-13 서약한 것이 짐승이면, 주께 바친 짐승은 거룩하게 된다. 거룩하게 된 짐승을 다른 것과 바꾸면 안 된다. 이미 바친 후 다른 짐승과 바꾸면 본래의 것과 바꾼 것 둘 다 거룩하게 바친 것이 된다. 바친 짐승이 부정한 경우 제사장이 품질을 판정하여 제사장이 값을 매긴다. 소유자가 그 짐승을 무르고 싶으면 그 짐승값이 오분의 일을 보태서 내야 한다.

14-15 어떤 사람이 집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께 바칠 때는 제사장이 그 집값을 매긴다. 집을 바친 사람이 그 집을 도로 무르고자 하면 그는 집갑에 오분의 일을 얹어서 물어야 다시 자기의 집이 된다.

//모세는 주께서 시내산에서 세우신 주의 규례와 법도와 율법을 정리한 후, 갑자기 서원에 관한 값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덧붙인다. 잊어버리고 빼먹은 내용을 더한 것일까? 부칙일까? //주의 백성의 몸은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주 앞에 (나이와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동등하다고 말씀하신다. 부자라고 몸값이 더 나가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사람은 제사장이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 할인을 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를 사기 위해서는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빈부의 차이가 없다. //주께 드려진 제물(짐승)은 드려지는 순간 주님의 것이 된다. 나중에 드리기로 했어도 이미 드리기로 마음에 정한 순간 거룩해 진다. 그래서 바꿀 수 없다. 바꾸겠다고 다른 제물을 드리기로 마음에 정하면 그 제물도 거룩해져서 둘 다 주님의 것이 된다. 음, 성도의 삶은 무엇을 하든 주님께 드려진 삶이다. 하는 일이 바뀐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하는 성도의 예배적 삶이 바뀔 수는 없다. 구약에서 짐승은 짐승값의 오분의 일을 보태서 무를 수 있지만 성도는 ‘자기 소유 전부’를 드려 하나님나라를 샀기 때문에 무를 수 없다. 집도 제물과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마치 서약을 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무를 수 없다는 뜻이다. 잘못된(흠이 있는) 서약만 무를 수 있다. 성도는 누구나 적어도 한 번은 하나님과 믿음의 증인들 앞에서 서약을 한다. 세례식이다. 결혼할 때 한 번 더 서약한다. 이 서약을 무를 수 있는가? 서약을 함부로 생각하는 세대라 많이 안타깝다. 

레위기 26:40-46

40-42 주의 백성이  자기들이 지은 죄, 조상들이 지은 죄, 곧 주님께 반항한 허물을 고백하고, 주님을 거슬렀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신들을 거스렸다는 것과,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들을 원수가 사는 땅으로 보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 겸손해지면, 주님께서는 야곱과 맺은 언약과 이삭과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주의 백성이 살던 땅을 기억하실 것이다.

43-45 주의 백성이 떠난 그 땅은, 주의 백성이 없는 동안 폐허로 있으면서 안식을 누릴 것이다. (땅은 안식을 누리나) 주의 백성은 주의 규례를 거역한 죄값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 죄값을 달게 받을 때, 그들이 죄값을 치르기 위해 원수의 땅에 잡혀가 있는 동안에도 주님은 절대로 주의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미워하지도 멸망시키지도 않겠다.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겠다. 내가 주 그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그 첫 세대와 맺은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들은 돌보는 나는 주다.

46 이상은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시켜 주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우신 여러가지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 주님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사이에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의 결론은 주님께 거스리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 겸손해 지라는 것이다. 겸손해서 죄값을 달게 받을 때 주님은 주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주의 백성과 세우신 언약을 깨뜨리지 않으신다. //성도가  죄값을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벌을 안 받는 것이 복이 아니라, 주의 자녀이기 때문에 벌을 받으니, 벌을 받는 것이 복이요, 따라서 벌을 달게 받을 수 있다. 물론 벌이 달 순 없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서 친히 보여주신 모습이다. 아무도 죄값을 달게 받지 않으니, 예수께서 십자가를 달게 지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의 자녀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용서하신다. //언약의 핵심은 주님께서 주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다. 곧 용서받은 주의 백성이 주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성도가 예수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다. 주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