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4:1-11 읽기

버림받은? 시인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의 백성에게서 진노를 거두지 않으십니까? 먼 엣날, 주님께서 친히 값주고 사신 주님의 백성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속량하시고 주님의 소유로 삼으신 이 백성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거처로 삼으신 시온산을 기억해 주십시오.

원수들이 주님의 성소를 이렇게 훼손해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으로 주님의 발걸음을 옮겨 주십시오. 주님의 대적들이 주님의 성소 한가운데서 승전가를 부르며 승리의 깃발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밀림의 벌목꾼들처럼 주의 백성을 마구 찍어버렸고, 성소의 모든 장식품도 산산조각 내었습니다. 주님의 성소에 불을 질렀고 주님의 이름을 모시는 곳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 뵙는모든 장소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징표도 더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예언자도 없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를 모욕하는 저 대적자들을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렵니까?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저 원수들을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렵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주님의 손을 거두십니까? 주님, 주님의 손을 품에서 빼시고, 그들을 멸하십시오.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오랫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간구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인, 주님의 성소마저 원수들의 차지가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 뵙는 모든 장소를 잃고 말았다. 시인은 더 이상의 기적도, 더 이상의 예언도 없다고 한탄한다. 지금까지 기적과 예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다. 하나님께서 표징과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수족으로 사용하하셨다. 마비된 시인은, 할 수 없이 주님께, 주님의 손으로 원수들을 멸해 주시길 바랄뿐이다. 과연 시인은 버림받았을까? 그러나 시인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다. 시인이 주님의 소유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 73:17-28 읽기

(시인은 악인의 형통에 대한 숙제를 안고 살았다.) 그러나 마침내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악인의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 깨닫게 된다.

주님께서는 악인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신다. 악인은 넘어져서 멸망에 이른다. 그들은 갑자기 놀아운 일을 당해, 공포에 떨다 마침내 끝장을 맞이한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에(악몽을 꾸듯) 온종일 괴로웠고, 아침마다 주의 말씀으로 벌을 받아야 했는데,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악인을 망하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시인은 악인의 형통이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아파야 할 일이라는 것을 몰랐다. 주님 앞에 있었지만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면 (주의 말씀을 따라 마음과 행동을 삼가면) 주님께서 시인의 오른손을 붙잡아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주님의 교훈으로 인도하셔서 마침내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신다는 것을 믿었다. 시인은 주님과 함께 함이 복이라고 노래한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시인은 주님만 바라겠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몸과 마음이 시들어가도 하나님을 반석삼아 살겠다고, 하나님이 시인이 받을 몫의 전부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주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망한다고 노래한다. 주님을 배반하는 사람은 망한다고 노래한다. 대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이 복이라고 노래한다. 주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을 전파하겠다고 다짐한다. 

//악인의 형통에 관한 숙제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곧 하나님과 함께 할 때 풀린다. 임마누엘이 세상의 형통보다 더 큰 복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풀린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절벽을 향해 달리는 브레이크가 파열된지도 모르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다름없다. 절벽에 다다르면 그때야 놀라 브레이크를 밟겠지만 공포에 떨며 떨어지고 만다. 이 결과를 아는 순간, 내가 더딘 것이, 시대를 뒤서 가는 것이 주님께서 나의 오른 손을 붙잡아 주신 결과라는 깨닫게 된다. //복음의 핵심도 임마누엘이 복이요, 하나님을 멀리하면 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해야 주님은 말씀으로 인도해주시고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켜 주신다.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

시편 73:1-16 읽기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시인은 이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다. 시인이 확신을 잃고 믿음을 버릴 뻔한 이유는

시인이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부러우면 지는거다.)

시인이 보기에 악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오히려 몸은 멀쩡하고 윤기가 흐르기 때문이다. 시인이 보기에 그들은 고통이 없는 것 같다. 재앙도 그들에게는 남의 얘기다. 그들은 오만하며, 폭력적이다. 그들은 똥배가 나왔으며, 거만하게 눈을 치켜 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 찬 말을 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 하기를 즐긴다. 하나님을 비방하고 사람들도 저주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도 악인에게 유혹되어, 악인들을 따라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 있으랴?” 하고 가장 높으신 분을 비하한다. 그런데도 악인들의 신세는 언제나 편하고 그들의 재산은 늘어가니, 시인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삶이 헛되었다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시인이 깨끗한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 온종일 시인을 떠나지 않았다. 행실을 깨끗하게 살기 위해 시인은 아침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다짐했다, 악인처럼 살아야지 하고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풀지 못한 숙제로 남겨야 했다.

//부러우면 지는거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런데 오히려 악인이 형통한 세상이니, 시인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믿음을 버릴 뻔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믿음을 붙잡고 주의 말씀으로 마음과 행실을 깨끗하게 한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한다. 주의 말씀을 채찍삼아 하루를 시작하고 주의 말씀을 위로삼아 하루를 정리한다. 이런 시인은 의인의 회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악인의 형통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숙제로 남아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함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다.

요한복음 13:31-38 읽기

31-35 유다가 나갔다. 예수께서 남은 제자들에게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고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때가 올) 것이다. 내가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너희에게도 말한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6-38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 올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 왜 지금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하고 맹세했다. 예수께서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전에, 저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지금과 나중! 예수께서는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또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성자 하나님께서도 이땅에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으셨다. //성도는 예수와 함께 할 때, 이 영광에 참여한다. 지금과 나중까지 이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곧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셨다. 당연히 우리도 지금 뿐만 아니라 나중까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맹세하지만, 오히려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지금 우리의 열정은 쉽게 무너지고 말 사상누각이요, 해변에 지은 모래성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나중’은 성령을 받은 후일 듯 싶다. 베드로에게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보혜사 성령. 이 성령을 받는 것이 승천하신 예수와 함께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지금 뿐만 아니라 나중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3:18-30 읽기

18-20 (다 깨끗하지는 않다.) 예수께서는 그렇다고 모두가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택한 사람들을 안다. 그리고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한 성경 말씀이 (시41:9?)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미리 말하시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제자들로 하여금 ‘내가 곧 나’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진정으로 진정으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보내는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이요,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사람이다.

21-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웠다. 예수께서는 구체적으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를 팔아 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배신자가 누구인지 몰라 서로 쳐다 보았다. 제자들 가운데 한명, 곧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베드로는 예수께 여쭈어 보라고 그에게 고갯짓을 하였다. 그는 예수께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시고, 빵조각을 적셔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 그가 빵조각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예수께서 가룟유다에게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명했다. 그곳에 있던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께서 가룟유다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몰랐다. 어떤 제자들은 유다가 돈자루를 맡고 있으므로 명절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보내신다고 생각했고, 다른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러 보내신다고 생각했다. 유다는 예수께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로 대하셨다. 아니 방금 전, 제자들을 앉히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으니 곧 친구 이상으로 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 중 배반하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괴로울 수 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왜 유다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을까? 시편 41:9 말씀은 분명 유다를 직접 지명하는 구절이 아닐 것인데… . 예수께서는 ‘내가 곧 나’이신 분이심을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신다.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도 결국 예수의 용서를 받는다. 그렇다면 마태의 기록처럼 가룟 유다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유다도 예수의 용서를 받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유다는 빵조각을 받고 나서 곧 나갔다. 때는 밤이 었다. 유다는 자신이 어둠 가운데 행하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빛이 어둠에 비쳤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 결국 유다는 ‘내가 곧 나’ 이신 예수를, 다시 말해 하나님이신 예수를 알지 못했다. 삼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