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2:1-11 읽기

1-8 유월절이 엿새 후로 다가왔다.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에 가셨다. 베다니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다른 사람들(제자들?)과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때 마리아가 매우 값비싼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찼다. 예수의 제자 중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팔면 삼백 데나리온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낭비하냐고 말했다. (가룟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회계 일을 맡으면서 이미 공금에 손을 대었던 도둑이었다.) 예수께서 “그대로 두어라, 그는(마리아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향유를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9-12 유대 사람들이 예수가 베다니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들은 예수도 보고,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했다.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했다. 왜냐하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예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지 않는 예수! 있을 때 잘해야 한다. 언제나 함께 있는 가난한 사람들! 마찬가지다. 내가 여유있을 때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내가 가진 것이 없을 때라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와 언제나 함께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난한 자와 언제나 함께 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예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다. 곧 가난한 자에게 예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함이 복이요, 복은 곧 예수와 함께 있는 것이다. 임마누엘! //삼백 데나리온. 한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년봉에 해당된다. 마리아는 년봉을 몽땅 예수께 드린 것이나, 예수께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액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부의 두 렙돈처럼, 많은 액수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 전부를 드려야 제값을 한다. 천국은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보화가 묻힌 밭을 사는 것이요, 자기 소유의 전부를 팔아 진주를 사는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 차별이 없이 적용된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로, 곧 자기 소유의 전부로 예수의 다스림을, 곧 천국을 산다. //예수도 보고 나사로도 보고. 예수는 교회당 안에 없다. 결국 세상은 성도를 보고 예수를 찾게 된다. 성도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도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나사로처럼) 죽어서도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음전도는 없다.    

요한복음 11:47-57 읽기

47-53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전해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예수가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지 논의했다. 예수를 그대로 두면 모두 예수를 믿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유대 땅과 유대 민족을 약탈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중 대제사장 가야바가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소” 하고 말했다. 가야바는 자기 생각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유대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공의회는 그날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54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로 더이상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셨다. 광야에 가까운 에브라임 마을로 가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다. 

55-57 유대 사람들의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성결하게 하려고 유월절이 되기 전부터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예수를 찾았다. 성전에서 예수가 명절을 지키러 올지 안올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 수군거렸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예수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예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생명의 빛으로 드러나셨다. 반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아서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마무리 하시면서 이미 이들을 정죄하셨다. (요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빛이 어둠에 비쳤지만 어둠은 깨닫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기가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예수의 죽음을 예언했다. 그 결과 공의회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했다. 민족을 살리겠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지만 자기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봐 증거를 인멸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어서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셨다. 반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월절 명절을 이용하여 예수를 잡으려고 현상금까지 걸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빛을 (예수를) 미워하여 빛으로 (예수께로) 오지 않는다. 자기들의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어둠을 더 사랑한다. 명절이라고 몸을 성결하게 한다고 마음이 정결해 지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말씀을 따라 빛이신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11:38-46 읽기

예수께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동굴 무덤은 돌로 막혀있었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셨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돌을 옮겼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 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셨다. 죽었던 나사로가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를 위로하러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그들에게 알렸다. 

//믿는다는 고백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마치 예수께서 마태복음 21장 포도원의 두 아들 비유가 연상된다. 믿는다는 (“예” 라는) 고백을 한 마르다는 “돌을 옮겨 놓아라” 라는 예수의 명령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더라도 다행히 돌을 옮겨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오” 라는 마음이어도)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믿음은 순종이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한적한 곳에서 혼자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아닌가?) 그런데 무리들을 위해서 공개적으로 기도하셨다. 성자 예수와 아버지 하나님이 하나임을 믿게 하시려고 기도하셨다. 성도의 기도는, 특별히 공적기도는 성도와 삼위 하나님의 사귐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예수의 말씀에 죽었던 나사로도 순종한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 아니다.) 죽음도 예수께 순종한 사건이다. 죽을 권세도 있고 다시 생명을 얻을 권세도 있으신 예수께서는 죽일 권세도 살리실 권세도 가지신 분이다. 곧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1:28-37 읽기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께서 마리아를 부르신다고 조용히 전했다.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서 예수께로 갔다.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동네 어귀에서 마리아도 만나주셨다.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해 주던 유대 사람들은 마리아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울려고 하는 줄 알고 마리아를 따라 나섰다. 마리아는 예수께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 마르다와 같이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겁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울고,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프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예수를 무덤으로 인도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의 눈물을 보고 “보시오. 그가 얼마나 나사로를 사랑했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하실 수 없었단 말이오?” 하고 말했다.

//예수를 찾아 뵌 마리아의 첫마디는 마르다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다처럼 예수께 무엇을 간청하지 않고 마냥 울었다. 동행한 유대 사람들도 마리아를 따라 울었다. 예수께서 마음이 아아프셨다. 예수께서도 마음으로 우셨다. 마르다에게 “네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고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마리아에게는 나사로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물으셨다. 사람들은 예수를 나사로의 무덤으로 인도했고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바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하고 로마 성도에게 편지했다. 성도는 이웃의 희노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눈물을 보고, 예수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지 못했다며 비아냥?거렸다. 이웃의 희노애락을 함께 나눈다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마르다에게 신앙고백을 끌어내셨던 예수께서 마리아에게는 다른 말씀없이 함께 눈물을 흘리시고 무덤으로 가셨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현장에서 굳이 신앙고백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냥 위로자가 되어주셨다. 성도도 세상을 향해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예수 믿으면’이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웃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요한복음 11:17-27읽기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시니,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은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오리 조금 넘는 곳이다. 많은 유대사람이 나사로의 죽음으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다가 예수께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말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다가 예수께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제가 압니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다가 예수께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가 믿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시자, 마르다는 버선발로 마중나갔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여기 계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여기 계시지 않더라도 나사로를 낫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가버나움 관원의 아들도 그렇게 나았다. 마르다는 여전히 예수의 능력에 대해서 몰랐다고 할 수 있다. //마르다는 이미 죽은 나사로를 위해 예수께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주시길 바랐을까? 예수께서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 비유처럼 오빠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바람과 상관없이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다가 생각하는 최고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최고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 //마르다는 오빠가 다시 살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마지막 날에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곧 성취될 일이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성도라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의 죽음을 맛보겠지만 이미 영생을 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미 삼위하나님과 여전히 (영원히) 교제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것을 믿느냐 ?’ 하고 물으셨다. 마르다는 예수께 “주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가 믿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마르다의 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마16:16) 다르지 않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예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고 말씀하셨듯이, 마르다의 고백은 예수의 말씀이 마르다 속에서 역사했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이라고 생각된다. 성도에게는 주님이 말씀으로 거하시고, 또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그러니 성도야말로 복있는 사람이다.